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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Gem · 한 권 요점

집필 시기 추정 c. 6th–3rd century BC

The Upanishads

우파니샤드

이샤 · 카타 · 케나 우파니샤드

He who sees all beings in the Self and the Self in all beings, he never turns away from It (the Self).

모든 존재를 자아 안에서 보고 자아를 모든 존재 안에서 보는 사람은 결코 그 자아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다.

The good is one thing and the pleasant another. These two, having different ends, bind a man.

좋은 것은 하나이고 즐거운 것은 또 하나다. 목적이 서로 다른 이 둘이 사람을 묶는다.

한눈에 보기

힌두 사상의 뿌리가 된 고대 인도의 가르침. 소년과 죽음의 신의 대화, 밖으로 향한 감각을 안으로 돌리라는 요청,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법을 세 편의 우파니샤드에서 스물네 가지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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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요점

The Upanishads

우파니샤드는 고대 인도의 철학적 문헌이며 힌두 사상의 가장 깊은 뿌리로 여겨집니다.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는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와 제사의 규정이 중심인데, 각 베다의 끝에는 제사의 의미를 묻고 우주와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는 부분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파니샤드입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를 "베단타", 곧 베다의 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름의 뜻은 "가까이 앉는 것"으로 풀이되는 경우가 많은데, 제자가 스승 곁에 앉아 은밀한 가르침을 듣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파니샤드는 오랫동안 구전되었고, 어느 하나의 저자가 있다기보다 여러 세대의 현자들이 남긴 대화와 시의 모음입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800년경부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고, 이 글에서 읽는 세 편은 그보다 약간 뒤의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우파니샤드는 열세 편가량이 주요 작품으로 꼽히고, 전통적으로 백여덟 편으로 헤아리기도 합니다. 이 글은 그 가운데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읽혀 온 세 편, 곧 「이샤 우파니샤드」, 「카타 우파니샤드」, 「케나 우파니샤드」를 읽습니다. 세 편 모두 분량이 짧아서 우파니샤드의 정신을 맛보기에 좋습니다. 「이샤」는 모든 것 안에 신이 있음을 말하는 짧은 시이고, 「카타」는 소년 나치케타스와 죽음의 신 야마의 대화이며, 「케나」는 "누구의 힘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가"를 묻는 탐구입니다.

이 글은 힌두교의 신앙을 가르치는 글이 아니라 이 고전이 무엇을 묻고 어떻게 답하는지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한 가지 답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학파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이 글에 실린 해설은 번역자가 붙인 불이론 계열의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힌두교 안에도 다른 해석 전통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줄거리

세 편은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질문을 향합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세계의 근원과 어떤 관계인가? 우파니샤드의 답은 "아트만", 곧 개인의 가장 깊은 자아가 "브라만", 곧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일치는 이론으로 알아서는 닿지 않고 마음을 안으로 돌려 직접 체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샤」는 이 일치를 시로 선언하고, 「카타」는 한 소년이 죽음 앞에서 이 지혜를 얻어 가는 이야기로 풀어내며, 「케나」는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역설로 마무리합니다. 아래 스물네 가지는 이 순서를 따라 골랐습니다.

대목별로 읽기

1. 보이지 않는 전체에서 보이는 전체가 나온다

「이샤 우파니샤드」는 평화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That (the Invisible-Absolute) is whole; whole is this (the visible phenomenal); from the Invisible Whole comes forth the visible whole. Though the visible whole has come out from that Invisible Whole, yet the Whole remains unaltered.

저것(보이지 않는 절대)은 온전하다. 이것(보이는 현상)도 온전하다. 보이지 않는 온전함에서 보이는 온전함이 나온다. 보이는 온전함이 그 보이지 않는 온전함에서 나왔어도 전체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번역자는 우파니샤드가 궁극의 실재를 "저것"이라는 불확정한 말로 가리키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름이나 말로는 무한을 담을 수 없어서, 현자들은 한계를 두지 않으려고 "저것"이라고만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이 가르침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근원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의 나타남이라는 생각입니다. 평화의 기도로 시작하는 것도 마음이 고요해야 이런 물음을 다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모든 것을 신으로 덮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첫 시구는 삶의 태도를 요약합니다.

All this, whatsoever exists in the universe, should be covered by the Lord. Having renounced (the unreal), enjoy (the Real). Do not covet the wealth of any man.

우주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은 주로 덮여야 한다. (헛된 것을) 버리고 (참된 것을) 누려라.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라.

"덮는다"는 말은 모든 것 속에서 신을 알아보라는 뜻이라고 해설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모든 것에 스며 있다는 의식이 확고해지면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구별에 매달리는 마음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누리라"는 말에는 "지키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자아에 대한 앎이 가장 큰 보호이기 때문입니다. 버림과 누림이 함께 나오는 이 첫 구절은 세상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헛된 것에 매달리지 않을 때 참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말로 읽힙니다.

3. 행위를 하되 행위에 물들지 않는 길

그렇다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둘째 시구는 행위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If one should desire to live in this world a hundred years, one should live performing Karma (righteous deeds). Thus thou mayest live; there is no other way.

이 세상에서 백 년을 살기를 바란다면, 카르마, 곧 올바른 행위를 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며 다른 길은 없다.

해설은 여기서 말하는 행위를 사사로운 동기 없이 오직 신을 위해 하는 행위로 풉니다. 하층 욕망에 눈이 멀어 하는 행위는 사람을 묶지만, 같은 행위도 신에게 맡기는 마음으로 하면 사람을 정화하고 해방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이후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가르침, 곧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하는 길로 이어집니다. 앞서 소개한 『기타』와 나란히 읽으면 두 경전의 연결이 잘 보입니다.

4. 움직이지 않으면서 마음보다 빠른 것

「이샤」는 자아의 성질을 역설로 노래합니다.

That One, though motionless, is swifter than the mind. The senses can never overtake It, for It ever goes before.

저 하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마음보다 빠르다. 감각은 결코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앞서 가기 때문이다.

이어서 말합니다. 그것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멀리 있고 또 가까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의 안에 있고 또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해설은 이렇게 풀이합니다. 유한한 사물은 한 번에 한 곳에만 있을 수 있지만 아트만은 모든 곳에 있으므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요구하는 말이라기보다 이해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말입니다. 가까이 있으면서 멀게 느껴지는 이유도 말합니다. 이해할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있지만 감각의 욕망과 자기기만의 구름에 덮인 사람에게는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5. 모든 존재를 자아 안에서 본다

「이샤」의 중심 시구는 윤리적 결론을 담고 있습니다.

He who sees all beings in the Self and the Self in all beings, he never turns away from It (the Self).

모든 존재를 자아 안에서 보고 자아를 모든 존재 안에서 보는 사람은 결코 그 자아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다.

다음 시구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He who perceives all beings as the Self for him how can there be delusion or grief, when he sees this oneness (everywhere)?

모든 존재를 자아로 보는 사람에게 이 하나됨을 어디서나 볼 때 어떻게 미혹과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해설은 슬픔과 미혹이 다양성에 대한 믿음에서 생기고, 그 믿음이 경쟁과 이기심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존재를 자기 자신 안에서 보는 사람은 질투와 슬픔, 미움이 사라지고, 그래서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보편적 연민의 근거로 자주 인용됩니다. 다만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이 생각이 개인의 책임이나 사회의 구별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힌두 사상 안에서도 오래 논의된 문제입니다.

6. 지식도 무지도 한쪽만으로는 어둠이다

「이샤」의 가장 난해한 대목은 지식과 무지를 함께 말합니다.

They enter into blind darkness who worship Avidya (ignorance and delusion); they fall, as it were, into greater darkness who worship Vidya (knowledge).

아비디야(무지와 미혹)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눈먼 어둠에 들어가고, 비디야(지식)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더 큰 어둠에 떨어진다.

이어서 이 시구는 두 가지를 함께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해설은 둘의 관계를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 견줍니다. 한쪽만으로는 최종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함께 취할 때 최고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심 없는 행위가 마음을 정화해 불멸하는 본성을 보게 하고, 그 앎이 신에 대한 앎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입니다. 지식을 쌓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 더 큰 어둠에 떨어진다는 말은 지적 교만을 경계하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구는 같은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원인과 보이는 현상도 어느 한쪽만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7. 진리의 얼굴은 황금 원반에 가려 있다

「이샤」의 끝부분은 태양에게 올리는 기도입니다.

The face of Truth is hidden by a golden disk. O Pushan (Effulgent Being)! Uncover (Thy face) that I, the worshipper of Truth, may behold Thee.

진리의 얼굴은 황금 원반에 가려 있다. 푸샨(빛나는 존재)이여, 진리를 섬기는 제가 당신을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소서.

태양의 눈부신 빛이 오히려 그 뒤의 실재를 가린다는 이미지입니다. 해설은 태양을 모든 지혜의 원천인 무한한 존재의 상징으로 풉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빛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고, 마침내 이렇게 선언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푸루샤, 그것이 곧 나입니다." 화려한 것에 눈이 멀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눈부심의 비유로 말하는 이 대목은, 오늘날에도 겉모습에 가려진 것을 보라는 요청처럼 읽힙니다.

8. 마음이여,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해 힘쓰라

「이샤」는 죽음의 순간에 읊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O mind, remember, remember thy deeds! Remember! Seek not fleeting results as the reward of thy actions, O mind! Strive only for the Imperishable.

마음이여, 네가 한 일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기억하라! 마음이여, 네 행위의 보상으로 스쳐 가는 결과를 구하지 말라. 오직 썩지 않는 것을 위해 힘쓰라.

해설은 이 구절이 임종의 자리에서 자주 낭송되어, 몸은 사라질 것이고 영혼은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고 설명합니다. 몸과 영혼의 구별이 마음에 분명히 서면 육체적 쾌락과 물질에 대한 갈망이 떨어져 나가고, 죽음은 낡은 옷을 벗는 일에 불과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삶의 마지막에도 흔들리지 않을 기준이 무엇인지를 일깨웁니다. 해설은 이어서 영혼이 바다이고 우리가 물방울이라는 비유를 덧붙입니다. 물방울은 바다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은 작고 약하지만 바다와 하나가 되면 바다의 힘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9. 어린 나치케타스의 믿음

「카타 우파니샤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 아버지가 하늘의 보상을 바라며 가진 것을 모두 바치는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바치는 소들은 이미 물도 풀도 먹을 힘이 없는 늙은 소들이었습니다. 어린 아들 나치케타스는 그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These cows have drunk water, eaten grass and given milk for the last time, and their senses have lost all vigour. He who gives these undoubtedly goes to joyless realms.

이 소들은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풀을 먹고, 젖을 냈으며, 감각의 힘을 모두 잃었다. 이런 것을 바치는 사람은 틀림없이 기쁨 없는 세계로 간다.

해설은 이 소년의 마음에 "슈라다"가 들어섰다고 설명합니다. 슈라다는 단순한 믿음 이상으로, 자립심과 옳고 그름에 대한 독립적인 감각,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어른 앞에서 입을 열 처지가 아닌 소년이 아버지의 불완전한 제사를 걱정하여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버지, 저는 누구에게 주실 건가요?" 세 번을 물었을 때 짜증이 난 아버지는 "너를 죽음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소년은 그 말이 헛되지 않도록 죽음의 신 야마의 집으로 갑니다.

10. 손님을 사흘 굶긴 죽음의 신

야마는 집에 없었고, 나치케타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을 기다립니다. 돌아온 야마의 가솔이 말합니다.

Like fire a Brahmana guest enters into houses. That fire is quenched by an offering. (Therefore) O Vaivaswata, bring water.

불처럼 브라만 손님이 집에 들어온다. 그 불은 공양으로 꺼진다. 그러니 바이바스바타여, 물을 가져오라.

고대 인도에서 손님은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고, 특히 성직자나 출가자에게 소홀하면 집안에 불행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야마는 사흘 밤을 굶긴 잘못을 갚기 위해 소년에게 세 가지 소원을 허락합니다. 첫째 소원은 아버지의 화가 풀리고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야마는 이를 허락합니다. 죽음의 신 앞에서 소년이 가장 먼저 빌었던 것이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아버지의 평안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11. 죽음 뒤에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둘째 소원은 하늘로 이끄는 제사의 불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고, 야마는 기꺼이 가르쳐 주며 그 불에 소년의 이름을 붙여 줍니다. 마지막 셋째 소원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There is this doubt regarding what becomes of a man after death. Some say he exists, others that he does not exist. This knowledge I desire, being instructed by thee.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존재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 앎을 원합니다.

야마는 신들도 이것을 의심했다며 다른 소원을 고르라고 달랩니다. 오래 살 자손, 소와 코끼리, 황금, 광대한 땅, 마차와 악기와 아름다운 여인들까지 약속합니다. 나치케타스는 모두 거절합니다.

O Death, these are fleeting; they weaken the vigour of all the senses in man. Even the longest life is short.

죽음이여, 그것들은 스쳐 가는 것이고 사람의 모든 감각의 활력을 약하게 합니다. 가장 긴 수명조차 짧습니다.

소년은 죽음의 신을 마주하고 있는데 재물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오직 그 비밀에 대한 가르침을 청합니다. 해설은 야마가 이 시험으로 소년이 지식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한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죽음 앞에서 쾌락과 안락을 물리치고 진실을 구하는 소년의 모습은 이 이야기를 우파니샤드의 가장 사랑받는 대목으로 만들었습니다.

12. 좋은 것과 즐거운 것

야마의 가르침은 선택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The good is one thing and the pleasant another. These two, having different ends, bind a man. It is well with him who chooses the good. He who chooses the pleasant misses the true end.

좋은 것은 하나이고 즐거운 것은 또 하나다. 목적이 서로 다른 이 둘이 사람을 묶는다. 좋은 것을 택하는 사람은 잘되고, 즐거운 것을 택하는 사람은 참된 목적을 놓친다.

다음 시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좋은 것과 즐거운 것이 사람에게 다가오면 지혜로운 사람은 둘을 살피고 가려서 좋은 것을 택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의 쾌락을 사랑해 즐거운 것을 택합니다. 해설은 길이 두 갈래이며 한쪽은 신을 향하고 다른 쪽은 세속의 쾌락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길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 어긋나고, 삶의 걸음마다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에도 즉각적인 만족과 오래 가는 가치 사이의 선택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13.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끈다

야마는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Fools dwelling in ignorance, yet imagining themselves wise and learned, go round and round in crooked ways, like the blind led by the blind.

무지 속에 살면서도 자신이 지혜롭고 박식하다고 상상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눈먼 자가 눈먼 자에게 이끌리듯 굽은 길을 빙글빙글 돈다.

또한 사후 세계는 재물의 현혹에 빠진 생각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만 있고 다른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듭 죽음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지적 자만을 경계하는 가장 유명한 경구의 하나로, 복음서의 비슷한 표현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해설은 장난감에 끌리는 아이처럼 쾌락과 권력, 명예에 끌리는 사람을 말하며, 죽는 부분과 죽지 않는 부분이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점을 짚습니다.

14.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

야마는 이 앎을 전하는 일의 어려움도 말합니다.

He about whom many are not even able to hear, whom many cannot comprehend even after hearing: wonderful is the teacher, wonderful is he who can receive when taught by an able teacher.

많은 사람이 듣는 것조차 못 하고,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것. 스승도 놀랍고, 능숙한 스승에게 배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놀랍다.

해설은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영적 앎을 전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보리수 아래 젊은 스승이 앉아 있고 그 곁에 늙은 제자가 있는데, 제자의 마음은 의문으로 가득했지만 스승이 침묵만 지켜도 의문이 하나씩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르침이 말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야마는 이 자아가 논증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고 못 박습니다.

O Dearest, this Atman cannot be attained by argument; It is truly known only when taught by another (a wise teacher).

사랑하는 이여, 이 아트만은 논증으로는 얻을 수 없다. 지혜로운 스승이 가르칠 때에만 참으로 알려진다.

해설은 이 비밀이 추리나 지적 곡예로는 알 수 없고 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의식 상태에서만 얻어진다고 덧붙입니다. 이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앎은 이성적 논증을 넘어서려는 전통에 서 있습니다. 이 입장이 체험을 중시하는 장점을 갖는 한편 논증의 검증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15.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자아

마침내 야마는 소년이 청한 비밀에 답합니다.

This Self is never born, nor does It die. It did not spring from anything, nor did anything spring from It. This Ancient One is unborn, eternal, everlasting. It is not slain even though the body is slain.

이 자아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것에서 생겨나지 않았고, 어떤 것도 그것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이 오래된 존재는 태어나지 않았고 영원하며 끝이 없다. 몸이 죽임을 당해도 그것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다음 시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If the slayer thinks that he slays, or if the slain thinks that he is slain, both of these know not. For It neither slays nor is It slain.

죽이는 자가 자기가 죽인다고 생각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자기가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둘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이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시구는 『바가바드 기타』에도 거의 같은 형태로 나옵니다. 두 경전의 가까운 관계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이 구절은 몸이 사라져도 자아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위로의 의미로 읽혀 왔습니다. 다만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대목은 죽음을 마주한 사람의 마음에 대한 말이지, 남을 해치는 일에 면죄를 주는 말이 아닙니다.

16. 자아가 택하는 사람에게만 자아가 드러난다

야마는 이 자아에 이르는 방법이 학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This Self cannot be attained by study of the Scriptures, nor by intellectual perception, nor by frequent hearing (of It); He whom the Self chooses, by him alone is It attained.

이 자아는 경전을 공부해서도, 지적인 인식으로도, 자주 듣는 것으로도 얻을 수 없다. 자아가 택하는 사람, 그에게만 그것이 얻어진다.

해설은 이 말을 이렇게 풉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에게 똑같고 자비는 모두에게 미치지만, 불순하고 세속적인 마음의 사람은 마음을 열 줄 몰라서 그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을 하느님이 택하는데, 그에게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지 않고 감각을 다스리지 못하며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사람은 지식으로도 이 자아에 이를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앎이 삶의 변화와 따로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17. 마차의 주인은 자아이다

「카타」의 가장 유명한 비유가 이어집니다.

Know the Atman (Self) as the lord of the chariot, and the body as the chariot. Know also the intellect to be the driver and mind the reins.

아트만(자아)을 마차의 주인으로, 몸을 마차로 알라. 또한 지성을 마부로, 마음을 고삐로 알라.

이어서 감각은 말이고 감각의 대상은 길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더 이어집니다.

But he who is full of discrimination and whose mind is always controlled, his senses are manageable, like the good horses of a driver.

그러나 분별력이 가득하고 마음이 늘 다스려진 사람의 감각은 마부의 좋은 말처럼 다룰 만하다.

분별이 없고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은 사람의 감각은 마부의 사나운 말처럼 날뛰고, 그는 끌려가게 됩니다. 해설은 마부가 길을 알고 고삐를 다룰 줄 알아야 무사히 목적지에 닿는다고 설명합니다. 삶의 길에서 마음과 감각이 높은 분별의 통제 아래 있을 때에야 목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후 서양에서 플라톤의 마차 비유와 자주 비교됩니다. 욕망과 이성의 관계를 이렇게 그림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 두 전통에 모두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8. 감각 너머의 단계들

야마는 자아에 이르는 단계를 차례로 보여 줍니다.

Beyond the senses are the objects, beyond the objects is the mind, beyond the mind is the intellect, beyond the intellect is the great Atman.

감각 너머에는 대상이 있고, 대상 너머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 너머에는 지성이 있고, 지성 너머에는 위대한 아트만이 있다.

그 너머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그 너머에 푸루샤, 곧 우주적 영혼이 있으며, 푸루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해설은 이것이 거친 것에서 점점 미세한 것으로 올라가는 분별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실천의 방법도 말합니다. 말, 곧 모든 감각을 마음으로 다스리고, 마음을 지성으로, 지성을 위대한 자아로, 그것을 평온한 최고의 자아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널리 인용되는 외침이 나옵니다.

19. 일어나라, 깨어나라

Arise! Awake! Having reached the Great Ones (illumined Teachers), gain understanding. The path is as sharp as a razor, impassable and difficult to travel, so the wise declare.

일어나라! 깨어나라! 위대한 이들(깨달은 스승들)을 찾아가 이해를 얻으라. 그 길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건너기 어렵고 가기 힘들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해설은 이것이 현자들의 영원한 외침이라고 말합니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 진리를 직접 본 사람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쉽지 않아 경솔하거나 게으른 사람은 안전하게 갈 수 없으며, 강하고 깨어 있고 끈기 있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이 구절은 훗날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즐겨 인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적 가르침이 곧 삶의 방향 전환의 요청이라는 점이 이 한 줄에 담겨 있습니다.

20. 감각은 밖으로 향하게 만들어졌다

왜 우리는 안에 있는 자아를 보지 못할까요?

The Self-existent created the senses out-going; for this reason man sees the external, but not the inner Atman (Self).

스스로 있는 자는 감각을 밖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바깥을 보고 안의 아트만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때로 불멸을 바라는 현자가 눈을 바깥에서 돌려 자신 안의 아트만을 본다고 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대비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바깥의 쾌락을 쫓다가 널리 퍼진 죽음의 올가미에 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멸의 본성을 알아 덧없는 것들 속에서 영원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의가 늘 바깥으로 향한다는 이 관찰은, 스마트폰과 화면에 시선을 빼앗기는 오늘의 일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으로 돌아보라는 요구가 얼마나 반대 방향의 노력인지를 알려 줍니다.

21. 여기 있는 것이 저기에도 있다

야마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What is here (in the visible world), that is there (in the invisible); he who sees difference (between visible and invisible) goes from death to death.

여기(보이는 세계)에 있는 것이 저기(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있다. 둘 사이에 차이를 보는 사람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간다.

해설은 참된 지혜의 눈에는 창조자와 창조된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에너지가 나타난 두 얼굴이라는 점은 물리 과학도 인정하게 되었다고 덧붙입니다. 바깥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빠져 있는 사람은 덧없는 형상에 매달리기 때문에 죽음에서 죽음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비를 맞은 산꼭대기의 물이 사방의 바위로 흘러가듯 차이를 보는 사람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as pure water poured into pure water becomes one, so also is it with the Self of an illumined Knower (he becomes one with the Supreme).

맑은 물을 맑은 물에 부으면 하나가 되듯, 깨달은 아는 이의 자아도 그러하다. 그는 최고의 존재와 하나가 된다.

22. 요가는 감각을 단단히 붙드는 일

「카타」의 끝부분은 수행의 방법을 말합니다.

When the five organs of perception become still, together with the mind, and the intellect ceases to be active: that is called the highest state.

다섯 지각 기관이 마음과 함께 고요해지고 지성도 활동을 멈출 때, 그것을 최고의 상태라 부른다.

이어서 요가라는 말의 뜻이 밝혀집니다.

This firm holding back of the senses is what is known as Yoga. Then one should become watchful, for Yoga comes and goes.

감각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이것이 요가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요가는 오고 가기 때문이다.

해설은 요가가 문자 그대로 낮은 자아를 높은 자아와 잇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과 힘을 흩뜨리는 것들에서 자신을 떼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룬 합일도 방심하면 다시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대목은 욕망이 가라앉을 때의 해방입니다.

When all desires dwelling in the heart cease, then the mortal becomes immortal and attains Brahman here.

마음속에 깃든 모든 욕망이 그칠 때, 죽을 존재는 불멸이 되어 바로 여기서 브라만에 이른다.

나치케타스는 야마가 가르친 이 지혜와 요가의 규칙을 얻어 불순함과 죽음에서 벗어나 브라만에 이르렀다고 이야기는 맺어집니다.

23. 눈의 눈, 귀의 귀

「케나 우파니샤드」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By whom commanded and directed does the mind go towards its objects? Commanded by whom does the life-force, the first (cause), move? At whose will do men utter speech? What power directs the eye and the ear?

누구의 명령과 지시로 마음은 대상을 향해 가는가? 누구의 명령으로 으뜸 원인인 생명력이 움직이는가? 누구의 뜻으로 사람들은 말을 하는가? 어떤 힘이 눈과 귀를 이끄는가?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 이 질문에 스승은 이렇게 답합니다.

It is the ear of the ear, the mind of the mind, the speech of the speech, the life of the life, the eye of the eye.

그것은 귀의 귀, 마음의 마음, 말의 말, 생명의 생명, 눈의 눈이다.

해설은 보통 사람은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도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고 감각이 알려 주는 만큼만 안다고 말합니다. 드러난 형상과 그 형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우파니샤드의 가장 독특한 선언이 나옵니다. 말이 밝히지 못하지만 말을 밝혀 주는 것, 그것이 브라만이지 사람들이 여기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That which speech does not illumine, but which illumines speech: know that alone to be the Brahman (the Supreme Being), not this which people worship here.

말이 비추지 못하지만 말을 비추는 것, 오직 그것을 브라만(최고의 존재)으로 알라. 사람들이 여기서 섬기는 이것이 아니다.

같은 형식으로 마음, 눈, 귀, 숨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대상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되는 주체의 자리가 브라만이라는 것입니다. 해설은 보통 알려진 의식의 세 상태, 곧 깨어 있음과 꿈과 깊은 잠 외에 이를 넘어선 "네 번째 상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24. 안다고 생각하면 모르는 것이다

「케나」는 앎의 역설로 가장 깊이 들어갑니다.

He who thinks he knows It not, knows It. He who thinks he knows It, knows It not.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것을 안다.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해설은 이 말이 겸손의 가르침이라고 풀이합니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것의 무한함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는 척하는 사람은 아직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설명을 듣고 안다고 결론짓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아는 것은 설명으로 전해지지 않고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대답도 역설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우파니샤드는 우화로 끝납니다. 브라만이 신들을 위해 승리를 거두자 신들은 그 승리를 자기 것이라 여기며 우쭐합니다. 브라만이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자 불의 신 아그니와 바람의 신 바유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다가갑니다. 그런데 브라만이 그들 앞에 놓은 지푸라기 하나를 불사르지도 날려 보내지도 못합니다. 마지막에 인드라가 다가가자 그 모습은 사라지고 우마가 나타나 가르칩니다. 신들의 승리는 브라만의 승리였다고 말입니다. 해설은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진짜 행위자는 신 하나뿐이고 눈과 귀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능력은 그분에게서 독립된 힘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푸라기 하나를 못 태운 불의 신 이야기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는 교만이 얼마나 얇은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해학입니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이 글에서 읽은 세 편은 모두 짧아서 한 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 읽는다면 「카타 우파니샤드」부터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소년과 죽음의 신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있어서 읽기 쉽고, 우파니샤드의 핵심 주제가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그다음 「이샤」의 짧은 시구들을 읽으면 같은 생각이 다른 목소리로 되풀이됩니다. 「케나」는 가장 철학적이어서 앞의 두 편을 읽은 뒤에 읽으면 좋습니다. 번역자의 해설은 불이론 베단타의 관점에서 쓰여 있으므로, 본문의 시구와 해설을 구분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우파니샤드는 힌두교의 신앙 전통 안에서 거룩한 경전으로 읽혀 왔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철학적 탐구서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고, 읽는 방식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우파니샤드 내부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공존하며, 후대에는 자아와 신의 관계를 하나로 보는 학파와 구별해서 보는 학파가 나뉘었습니다. 한 번에 이해하려 하지 말고 한 구절씩 천천히 되새기면서, 앞서 읽은 『바가바드 기타』나 『도덕경』, 『법구경』과 견주어 읽으면 동양 사상이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말로 풀어낸 모습이 한결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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