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Gem · 한 권 요점
집필 시기 추정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사기 (史記)
황제에서 한 무제까지, 제왕과 제후와 평민의 삶을 130편에 담은 중국 최초의 통사
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영유종호)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에게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天下熙熙,皆為利來;天下壤壤,皆為利往
(천하희희, 개위리래; 천하양양, 개위리왕)
천하 사람들이 화락하게 오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며, 천하 사람들이 어지러이 오가는 것도 모두 이익 때문이다.
한눈에 보기
전설의 황제에서 한 무제 시대까지를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다섯 갈래 130편으로 엮은 책. 제왕의 연대기에 그치지 않고 책사와 장군, 자객, 관리, 협객, 상인의 삶까지 담았고, 마지막 편에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사연을 밝힌다. 130편의 요약과 열네 가지 대목으로 읽는다.
비슷한 책
- 헤로도토스 The Histories (역사)
- 플루타르코스 Plutarch’s Lives (영웅전)
- 공자 Analects (논어)
한 권 요점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사기』는 전한 시대의 사마천이 쓴 책으로, 130편 52만 6천 5백 자 분량이라고 저자 스스로 밝힙니다. 사마천은 마지막 편 태사공자서에서 자신의 내력을 이야기합니다. 사마씨는 대대로 천지와 사관의 일을 맡은 가문이었고,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공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용문에서 태어나 열 살에 고문을 외웠고, 스무 살에 강과 회수, 회계산, 제나라와 노나라를 유람했으며 낭중이 되어 파촉 이남에 사신으로 갔습니다. 한나라가 봉선을 거행할 때 따르지 못한 사마담은 분하여 죽음을 앞두고 아들의 손을 잡고 논저하려던 바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고, 사마천은 눈물로 그 뜻을 이어 3년 뒤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릉의 화로 옥에 갇히는 일을 겪고도 지난 일을 서술하기로 마음을 다졌고, 완성한 책을 명산에 감추고 부본은 서울에 두어 후세를 기다린다고 썼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제왕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한 책에 넣었다는 점입니다. 본기는 제왕의 시간을 세우고, 표는 연표를 얹으며, 서는 제도와 문물을 다루고, 세가는 제후와 공신의 가문을, 열전은 책사와 장군, 자객, 협객, 상인을 비롯한 개인과 이민족의 삶을 서술합니다. 아래 줄거리는 130편을 순서대로 따라가고, 중심이 되는 36편은 더 길게 정리했습니다. 이어지는 해설은 열네 가지 대목으로 책을 짚습니다. 인물의 죽음과 결말까지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
본기(本紀) 12편: 제왕의 연대기
본기는 오제에서 하·은·주, 진, 항우, 고조를 거쳐 한 무제에 이르는 제왕들의 시간순 기록입니다. 이 열두 편이 『사기』 전체의 뼈대를 이룹니다.
오제본기 (五帝本紀)
황제(黃帝)는 소전의 아들 헌원(軒轅)으로, 신농씨가 쇠하고 제후들이 서로 침탈하자 무기를 익혀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세 번 싸워 이기고 탁록(涿鹿)에서 치우(蚩尤)를 죽여 천자로 받들어졌다. 그 뒤 전욱(顓頊)·제곡(帝嚳)을 거쳐 방훈, 곧 요(堯)가 섰다. 요는 희중·희숙·화중·화숙에게 사방에서 때를 알리게 하고 1년을 366일로 맞추었으며, 재위 70년에 눈먼 자의 아들 우순(虞舜)을 천거받았다. 순은 아비 고수와 아우 상이 창고에 불 지르고 우물을 메워 죽이려 해도 빠져나와 효와 우애를 다했고, 역산에서 밭 갈면 사람들이 밭두둑을 양보했다. 요는 "끝내 천하의 병폐로 한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겠다"며 순에게 넘겼다. 순은 우(禹)를 사공, 기(棄)를 후직, 설(契)을 사도, 고요(皋陶)를 사로 삼는 등 22명에게 직을 맡겼고, 61세에 즉위해 39년 뒤 남순 중 창오에서 죽어 구의에 묻혔다. 아들 상균이 불초하여 우를 천거했다. 요의 연수는 본문에 두 가지로 다르게 적혀 있다. 태사공은 장로들의 말이 황제·요·순을 가리킴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본기 (夏本紀)
우(禹)는 곤(鯀)의 아들로, 곤이 9년에도 홍수를 막지 못해 순이 우산(羽山)에서 죽이자 아비의 일을 이어 사공이 되었다. 익(益)·후직과 산천을 정하며 13년을 밖에서 지내 집 문 앞을 지나도 들어가지 못했다. 옷·음식은 박하게 궁실은 낮게 하고 구주(九州)를 열어 토질·부세·공물·물길을 기록했으며 500리마다 오복(五服)을 두었고, 순이 현규를 주었다. 고요가 아홉 덕을 말하는 자리에서 우는 사방을 다니며 곡식을 나눈 일을 진술했다. 순이 죽자 우는 상균을 피했으나 제후가 따라 국호를 하후, 성을 사(姒)라 했다. 우는 익에게 정치를 맡기고 회계(會稽)에서 죽었는데, 익이 양보했으나 천하는 계(啓)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계는 불복한 유호씨를 감에서 쳐 멸했다. 이후 태강이 나라를 잃고 공갑은 귀신과 음란을 좋아해 덕이 쇠했다. 걸(桀)이 탕(湯)을 하대에 가뒀다 풀었는데 탕이 덕을 닦자 제후가 귀의해 걸을 쳤고, 걸은 명조로 달아나 죽으며 탕을 죽이지 않은 것이 한이라 했다. 우가 강남에서 제후를 모아 공을 헤아리다 죽었다는 설도 함께 전한다.
은본기 (殷本紀)
설(契)은 어머니 간적이 현조의 알을 삼켜 낳았다고 하며, 우의 치수를 도와 상(商)에 봉해졌다. 후손 성탕(成湯)은 이윤(伊尹)을 얻어(맛으로 설득했다고도, 다섯 번 청해서야 따랐다고도 전한다) 사방에 쳐진 그물의 세 면을 걷게 해 제후의 귀의를 얻고, 곤오와 하의 걸을 쳐 천자가 되었다. 탕 사후 태갑이 포악하자 이윤이 동궁에 3년 방축했다가 뉘우치자 정사를 돌려주었다. 태무 때 뽕나무가 조정에 나자 덕을 닦아 중종이라 했고, 중정 이래 9대가 어지러웠다. 반경(盤庚)은 성탕의 옛 터로 옮겼고, 무정(武丁)은 3년 말하지 않다가 꿈에 본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았다. 무을은 인형을 천신이라 하며 하늘을 쏘다 벼락에 죽었다. 마지막 제신(帝辛), 곧 주(紂)는 달기의 말만 따르며 술못·고기숲(酒池肉林)에서 밤새 마시고 포격의 형을 두었고, 구후·악후를 죽이고 서백 창(昌)을 유리에 가뒀다 풀어주었다. 비간의 가슴을 갈랐고 기자는 거짓 미친 체했다. 목야에서 패한 주는 녹대에서 불에 뛰어들었고, 무왕은 무경 녹보를 봉했으나 반란하자 주공이 죽이고 미자를 송에 세웠다.
주본기 (周本紀)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로, 어머니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아 낳았고 버려도 짐승과 새가 보호했다고 한다. 요·순을 거쳐 태(邰)에 봉해졌고, 공류가 빈(豳)에 나라를 세웠으며, 고공단보는 융적을 피해 "백성이 나 때문에 싸우게 할 수 없다"며 기산 아래로 옮겼다. 서백 창(昌, 문왕)은 노인을 공경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췄으나 숭후호의 참소로 유리에 갇혔다가 미녀·준마를 바치고 풀려났다. 무왕(武王)은 맹진에 800 제후가 모였으나 천명을 모른다며 돌아갔다가, 2년 뒤 병거 300승·호분 3천·갑사 4만 5천으로 목야에서 맹세하고 주(紂)의 70만 군을 무너뜨렸다. 성왕이 어릴 때 섭정한 주공이 관·채숙의 난을 3년 만에 평정했다. 목왕은 견융을 치다 황복이 오지 않았고, 여왕은 비방자를 죽이다 체로 달아나 공화(共和)가 정사를 보았다. 유왕은 포사를 위해 봉화로 제후를 속이다 견융에게 여산 아래서 죽었고, 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했다. 서주군이 진에 땅을 바치고 난왕이 죽자 진이 구정을 가져갔으며 7년 뒤 동주도 멸했다.
진본기 (秦本紀)
진(秦)의 선조는 전욱의 후예 여수가 현조의 알을 삼켜 대업을 낳았다고 하며, 대비는 우의 치수를 도와 영(嬴)씨 성을 받았다. 비자는 말을 잘 키워 효왕이 진에 읍을 주었고, 양공(襄公)은 평왕을 호송해 제후가 되었다. 목공(繆公, 재위 39년)은 백리해(百里傒)를 숫양 가죽 다섯 장으로 속량해 오고대부라 했고 건숙을 얻었다. 진(晉) 이오를 세워주었으나 약속한 하서 8성을 받지 못했고, 한(韓)에서 위기에 처하자 말고기를 먹고도 벌받지 않은 300인이 달려와 구해 혜공을 사로잡았다. 건숙·백리해가 곡하며 말렸는데도 정(鄭)을 습격하다 효(殽)에서 진(晉)에 전멸당하자 목공은 "내 잘못"이라 했다. 융의 유여는 이간으로 항복시켰고 융 12나라를 얻어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죽자 순장자가 177명이었다. 뒤에 효공(孝公)은 위앙(衛鞅)의 변법으로 함양에 도읍하고 41현을 두었으나 위앙은 거열형을 당했다. 소양왕 때 장평에서 조군 40여만을 학살했고 서주를 항복시켜 구정을 얻었다. 정(政)이 시황제가 되어 36군을 두었으며, 자영을 세운 뒤 제후가 멸했다.
진시황본기 (秦始皇本紀)
시황제 정(政)은 장양왕이 조에 인질일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이 낳았다고 전하며 13세에 즉위했다. 9년 노애(嫪毐)의 난을 진압해 20여 명을 효수하고 4천여 가를 촉으로 옮겼고, 여불위는 면직되어 죽었다. 17~26년 한·조·연·위·초·제를 차례로 멸했고, 연 태자 단이 보낸 형가(荊軻)는 시황을 찌르려다 실패했다. 천하를 합친 뒤 '황제' 칭호와 제(制)·조(詔)·짐(朕)을 정하고 수덕(水德)에 따라 검은색을 숭상했으며, 36군을 두고 병기를 녹이고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했다. 서불(徐巿)은 동남동녀 수천을 데리고 신선을 구하러 갔다. 34년 이사의 건의로 시·서·백가어를 불사르고, 35년 아방궁·여산에 형도 70여만을 썼으며 유생 460여 명을 함양에 묻었다. 37년 사구에서 죽자 이사·조고·호해가 유조를 속여 부소를 사사하고 호해를 세웠다. 진승이 일어나자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 하며 신하를 시험하고 이세를 자살시켰다. 자영은 재위 46일 만에 패공에게 항복했고 항적이 함양을 불살랐다. 가의의 〈과진론〉은 인의를 베풀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든다.
항우본기 (項羽本紀)
항적(項籍)은 자가 우(羽)이고 초의 장수 항연의 후손으로, 24세에 계부 항량(項梁)과 일어났다. 시황의 행렬을 보고 "저 자리를 빼앗아 대신할 수 있다"고 했고, 회계 태수를 베어 오중의 정병 8천을 얻었다. 항량은 정도에서 패사했다. 항우는 안양에서 송의를 베고 상장군이 되어 하수를 건너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부수어(沈船破釜) 싸운 끝에 왕리를 사로잡았으며, 항복한 장한을 옹왕으로 삼고 신안에서 항졸 20여만을 묻었다. 홍문(鴻門)에서 40만 군으로 패공을 치려 했으나 항장(項莊)의 검무(項莊拔劍起舞)에도 항백·번쾌·장량 덕에 놓쳤고, 함양을 불살라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어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고 의제를 죽이게 했다. 한 2년 3만으로 한왕의 56만을 팽성에서 깼으나 진평의 반간으로 범증을 잃었고, 홍구를 경계로 중분하는 약을 맺은 뒤 추격당해 해하(垓下)에서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자(四面楚歌) "力拔山兮氣蓋世"를 지었다. 800여 기로 포위를 뚫었으나 동성에 28기가 남았고,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라 하며 오강 정장의 도강 권유를 물리치고 스스로 목을 베었다. 태사공은 사사로운 지혜만 믿고 끝까지 하늘 탓을 했다고 비판한다.
고조본기 (高祖本紀)
고조는 패 풍읍 사람으로 성은 유(劉), 자는 계(季)이며, 어미가 큰 못에서 신과 만나는 꿈을 꿀 때 교룡이 위에 있었다고 전한다. 사수정장이 되어 함양에서 시황을 보고 "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탄식했고, 여공의 딸을 맞아 여후(呂后)가 되었다. 진승이 일어나자 부로들이 령을 죽이고 계를 패공으로 세웠다. 회왕의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가 왕" 약속에 따라 패상에서 자영의 항복을 받고 법삼장(法三章)만 두었다. 홍문에서 번쾌·장량 덕에 풀려났으나 항우가 한왕으로 삼아 남정에 보냈고, 한신(韓信)의 계책으로 삼진을 평정했다. 팽성에서 수수에 패했으나 진평의 이간으로 범증이 의심받아 죽었고, 광무에서 항우의 열 가지 죄를 들었다. 5년 해하에서 한신이 30만을 지휘해 항우를 깨고 범수 북쪽에서 즉위했다. 7년 평성에서 흉노에게 7일 포위되었고, 12년 경포를 치고 돌아오다 패에서 "大風起兮雲飛揚"을 지었다. 병이 깊자 치료를 거절하고 4월 갑진 장락궁에서 죽었으나 4일간 발상하지 않았다. 태사공은 한이 폐단을 바꿔 천통을 얻었다고 평한다.
여태후본기 (呂太后本紀)
여태후(呂太后)는 고조가 미천하던 때의 비로 효혜제(孝惠帝)를 낳았다. 고조가 척희의 아들 여의로 태자를 바꾸려 했으나 무산됐다. 고조 사후 태후는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 "인체(人彘)"라 불렀고, 조왕을 짐독으로 죽게 했다. 이를 본 효혜는 병들어 술로 정사를 폐했다. 효혜 붕어 뒤 장벽강의 권으로 여대·여산·여록이 남북군을 맡았고, 태후는 칭제(稱制)하여 우승상 왕릉(王陵)이 백마의 맹약을 들어 반대했는데도 여씨를 왕으로 세웠다. 소제를 가두어 폐하고 죽였으며 조왕 우는 굶어 죽었다. 8년 태후가 병이 깊어 여록·여산에게 병력으로 궁을 지키라 당부하고 붕어했다. 유장이 형 제왕에게 거병을 알리자 관영은 형양에서 제와 연합했고, 주발(周勃)은 역기를 통해 여록을 설득해 북군에 들어가 "왼팔을 벗으라" 하니 모두 따랐다. 유장이 여산을 죽이고 여씨 남녀를 모두 베었다. 대신들은 소제와 세 왕이 효혜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여 대왕을 세우니 문제(文帝)다. 소제 출생은 대신들의 말로만 전한다. 태사공은 혜제·고후 때 천하가 안정되고 형벌이 드물었다고 평했다.
효문본기 (孝文本紀)
효문황제(孝文皇帝)는 고조의 중자로 박태후의 아들이며 대왕으로 중도에 도읍했다. 고후 8년 여씨가 주살되자 진평(陳平)·주발이 맞이하려 했고, 장무는 의심했으나 송창이 천수를 설명했으며 거북점에 대횡이 나와 "천왕"이라 했다. 위교에서 영접받고 사양 끝에 즉위해 미앙궁에 들어갔다. 연좌·수노제를 폐하고 맏아들을 태자로 세웠으며 비방죄를 없애고 적전을 열어 친경했다. 일식에는 조서로 자신의 허물을 물었다. 제북왕 흥거의 반란과 회남왕 장의 모반이 있었고, 13년 순우공의 딸 제영이 속죄를 청하자 육형을 폐지하고 전조를 면제했다. 흉노가 14년 조나새를 치고 후6년 상군·운중에 들자 주아부 등이 막았다. 공손신의 토덕설, 황룡, 신원평의 사기와 삼족 멸이 이어졌다. 문제는 노대를 짓다 중민 열 집 재산이라며 그만두었고 패릉은 질그릇으로 하고 봉분을 쌓지 않았다. 남월왕 위타가 제호를 칭하자 덕으로 회유해 칭신케 했다. 후7년 6월 미앙궁에서 붕어하며 박장을 유조로 남겼다. 경제가 그 묘를 태종으로 했고, 태사공은 한 건국 40여 년 만에 덕이 지극하다 평했다.
효경본기 (孝景本紀)
효경황제(孝景皇帝)는 효문의 중자로 모친은 두태후(竇太后)다. 원년 전조 절반을 면제하고 효문의 태종묘를 세워 흉노와 화친했다. 3년 오왕 비(濞)·초왕 무·조왕 수 등 일곱 왕이 서쪽으로 거병해 양(梁)을 에워쌌다. 조착(晁錯)을 죽이고 원앙을 보내 타일렀으나 멈추지 않아 두영과 주아부(周亞夫)가 토벌했고, 두영은 위기후에 봉해졌다. 4년 태자를 세우고 철(徹)을 교동왕으로 삼았다가, 7년 율태자를 폐해 임강왕으로 하고 교동왕을 태자로 세웠다. 임강왕은 중위부에서 죽었다. 중2년 흉노가 연(燕)에 들어 화친이 깨졌고, 중6년 양효왕이 죽어 양이 다섯으로 나뉘었으며 관명을 고쳤다. 후2년 한발과 역병이 있어 금령을 내렸다. 후3년 정월 태자가 관례를 치르고 갑자에 경제가 붕어했다. 태자가 즉위하니 효무제이며 외삼촌 분을 무안후에 봉했다. 본문은 일식·지진·혜성·우박 같은 이변을 해마다 기록한다. 태사공은 조착이 제후를 점진적이지 않게 깎아 일곱 나라가 일어났고 주보언의 말 뒤에야 제후가 약해졌다고 평했다.
효무본기 (孝武本紀)
효무황제(孝武皇帝)는 효경의 중자로 교동왕에서 태자가 되었고 즉위 초부터 귀신 제사를 공경했다. 조관·왕장을 써 봉선을 하려 했으나 황로를 좋아한 두태후가 두 사람을 자살하게 해 일이 폐해졌다. 이소군(李少君)은 부뚜막 제사로 단사가 황금이 되고 봉래 신선을 만나 봉선하면 죽지 않는다고 했고, 죽자 천자는 변화해 간 것으로 여겼다. 소옹은 문성장군이 됐으나 속임수가 드러나 주살됐다. 난대는 오리장군에 올라 위장공주를 얻었으나 방술이 다해 주살됐다. 분음에서 큰 솥을 얻어 감천에 모셨고, 공손경(公孫卿)이 황제의 솥·승천 이야기를 올리자 천자는 황제처럼 될 수 있다면 처자를 버리겠다고 했다. 태일 제단을 감천에 세워 삭단동지에 제사했고, 태산에서 봉하고 숙연산에서 선했으며, 방사를 바닷가에 보내 봉래를 구했으나 증험이 없었다. 태초(太初) 원년에 역법을 고쳐 정월을 세수로, 황색을 숭상했다. 천자는 방사의 말에 싫증을 내면서도 끝내 끊지 못했다. 태사공은 직접 순행·제사에 따라 살폈다고 한다.
표(表) 10편: 연표와 월표
표는 시대와 제후, 공신, 장상의 계보를 표로 묶은 부분입니다. 줄거리가 아니라 구조가 중요한 편이어서 서문의 요지만 한 줄로 정리합니다.
삼대세표 (三代世表) 황제부터 공화(共和) 이전까지 하·은·주 삼대의 계보를 표로 정리하고, 은 이전은 연대를 확정할 수 없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십이제후연표 (十二諸侯年表) 공화 원년(기원전 841)부터 주 경왕 때까지 주·노·제·진 등 열두 제후국의 연대를 나란히 적고 춘추 계열 저작의 유래를 밝힌다.
육국연표 (六國年表) 주 원왕 원년(기원전 476)부터 이세 3년까지 270년의 육국과 진의 연대를 적어, 진의 통일과 한으로의 귀속을 보인다.
진초지제월표 (秦楚之際月表) 이세 원년 진섭의 기병부터 기원전 202년까지를 월 단위로 적고, 5년 만에 천명이 세 번 바뀐 급변을 하늘의 뜻으로 논한다.
한흥이래제후왕연표 (漢興以來諸侯王年表) 한 초 동성 제후국의 팽창과 추은령(推恩)에 의한 분할로 제후가 약해지고 한이 강해지는 과정을 나라별 연표로 보여 준다.
고조공신후자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고조 때 공신으로 제후가 된 이들을 봉작 순서와 후계 승계로 정리하고, 몇 세 뒤 대부분 법을 어겨 후가 끊긴 것을 경계로 삼는다.
혜경간후자연표 (惠景間侯者年表) 효혜에서 효경까지 약 50년간 제후가 된 90여 명의 공로자와 자제를 표로 모으고, 장사왕의 충성을 특별히 언급한다.
건원이래후자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무제 건원 이래 흉노·월 정벌의 공으로 봉후된 이들을 표로 적고 변경 정벌의 필요를 논하며, 뒤에는 저선생의 보충이 붙는다.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建元以來王子侯者年表) 제후왕이 자제에게 읍을 나누어 주려면 조목을 올리라는 무제의 조서와, 그에 따라 후로 봉해진 왕자들을 표로 적는다.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고조 원년(기원전 206)부터 홍가 원년(기원전 20)까지 대사기와 승상·장군·어사대부의 임면을 해마다 한 줄씩 적은 표다.
서(書) 8편: 제도와 문물
서는 예와 음악, 율력과 천문, 제사, 치수, 재정 같은 제도와 문물을 주제별로 다룹니다.
예서 (禮書) 예가 인정과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생겼음을 삼대에서 한 무제의 정삭 개정까지 살피며, 『순자』 계통의 예론을 길게 싣는다.
악서 (樂書) 음악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고 치세와 난세의 음이 다름을 논하며, 한대의 악부 사례와 「악기」식 문답, 사광의 일화를 싣는다.
율서 (律書) 육률이 만사의 근본이며 병기와 군사의 정당성을 논하고, 효문의 평화로운 정책을 칭찬한 뒤 팔풍·십이율의 수리를 풀이한다.
역서 (曆書) 황제·전욱·요 때부터 정삭이 고쳐진 경위를 설명하고, 한 무제의 태초 개력까지와 그 뒤 해마다의 역표를 싣는다.
천관서 (天官書) 중궁과 동남서북 네 궁의 별자리, 오성, 일월식·잡성·운기를 서술하고, 천변에는 덕을 닦아 응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봉선서 (封禪書) 역대 제왕의 봉선과 제사 제도를 진·한까지 좇으며, 무제가 방사를 따라 봉선했으나 신선은 끝내 증험이 없었다고 적는다.
하거서 (河渠書) 우(禹)의 치수부터 정국거·호자 결궤 봉합까지 한대 수리 사업을 적고, 사마천이 직접 물길을 돌아본 감회를 밝힌다.
평준서 (平準書) 한 초의 궁핍과 문경 시대의 풍요, 무제의 전쟁과 염철 전매·산민령으로 재정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과정을 적는다.
세가(世家) 30편: 제후국과 공신의 가문
세가는 주나라 제후국과 한나라 제후왕, 공신 가문을 다룹니다. 공자와 진섭이 세가에 들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오태백세가 (吳太伯世家) 주 태왕의 아들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은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넘기려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오(吳)를 세웠다. 수몽(壽夢)의 막내 계찰(季札)은 현명했으나 왕위를 사양하고 연릉(延陵)에 봉해졌다. 공자 광(光)은 전제(專諸)를 시켜 요(僚)를 죽이고 합려(闔廬)가 되어 오자서(伍子胥)와 초의 영(郢)에 들어갔다. 합려가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해 죽자 아들 부차(夫差)는 월을 꺾었으나 자서의 간언을 물리치고 그에게 검을 내려 죽였다. 결국 월이 오를 멸하자 부차는 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했다.
제태공세가 (齊太公世家) 태공망 여상(呂尙)은 늙어 위수에서 낚시하다 주 서백(西伯)을 만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이 은을 이긴 뒤 영구(營丘)에 봉해져 상공업과 어염으로 제를 키웠다. 훗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써 규구(葵丘)에서 천자의 하사를 받는 패자가 되었으나, 관중이 죽자 그의 경고를 어기고 역아 등을 가까이했다. 환공이 죽은 뒤 아들들이 왕위를 다투어 시신이 67일간 방치되었다고 한다. 최저(崔杼)가 장공을 시해하고 안영(晏嬰)이 활약했으며, 끝내 전씨(田氏)가 힘을 키워 임금을 시해하고 전화(田和)가 제후가 되자 강(姜)씨 여상의 후손 제사가 끊겼다.
노주공세가 (魯周公世家) 주공 단(旦)은 무왕의 아우로, 무왕이 병들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고 그 글을 금등(金縢)에 넣어 두었다. 성왕이 어릴 때 섭정하자 관숙·채숙이 무경(武庚)과 반란했고, 주공은 동쪽을 쳐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했으며 7년 뒤 정권을 돌려주었다. 참소로 초로 달아났다가 금등의 글이 드러나 성왕이 울며 맞았다. 아들 백금(伯禽)을 노에 보내며 '한 번 머리 감는 데 세 번 머리를 쥔다'고 훈계했다. 뒤에 삼환(三桓)이 득세하고 공자가 협곡 회담에서 제를 굴복시켰으며, 노는 경공 이래 쇠약해져 초 고열왕에게 멸망했고 주공부터 34세를 이었다.
연소공세가 (燕召公世家) 소공 석(奭)은 무왕이 은을 멸한 뒤 북연에 봉해졌고, 감당나무 아래서 송사를 판결해 백성이 그 나무를 베지 않고 노래했다고 전한다. 쾌(噲)왕은 재상 자지(子之)에게 나라를 넘겨 큰 난이 났고 제가 쳐서 쾌가 죽었다. 이어 소왕(昭王)이 곽외(郭隗)를 스승 삼아 악의(樂毅) 등을 모았고, 악의가 제의 임치를 점령했으나 혜왕이 그를 의심해 바꾸자 전단(田單)이 반격했다. 마지막 왕 희(喜) 때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찌르려다 실패했고, 연은 33년 멸망했다. 사마천은 소공의 덕으로 희성 중 가장 늦게 망했다고 평한다.
관채세가 (管蔡世家) 문왕의 아들 중 관숙 선(鮮)은 관에, 채숙 도(度)는 채에 봉해져 무경(武庚)을 돕게 되었으나, 무왕이 죽자 주공을 의심해 무경과 반란했다. 주공이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유배했으며, 채숙의 아들 호(胡)는 행실을 고쳐 채중(蔡仲)으로 봉해졌다. 이후 채는 소후가 초 상국에게 가죽옷을 주지 않아 억류되는 등 곡절을 겪다가 초 혜왕에게 멸망했다. 부록으로 조숙 진탁(振鐸)의 조(曹)가 붙는데, 공공(共公)이 진 공자 중이(重耳)를 무례히 대했고 말기에 송에 멸망했다. 사마천은 관채의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세가에 실었다.
진기세가 (陳杞世家) 진(陳)은 순(舜)의 후손 호공 만(滿)이 주 무왕에게 봉해진 나라다. 여공의 아들 완(完)은 제로 달아나 훗날 진씨가 제에서 흥하리라는 점괘가 전한다. 영공(靈公)은 하희(夏姬)와 통하다 그 아들 하징서(夏徵舒)에게 죽었고, 초 장왕이 징서를 벌한 뒤 진을 현으로 삼으려 했으나 신숙시(申叔時)의 말로 진을 복위시켰다. 공자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진은 민공 24년 초 혜왕에게 멸망했는데 그해 공자가 죽었다. 기(杞)는 하 우(禹)의 후손으로 작고 사적이 적다. 사마천은 순의 덕이 지극해 후손이 세 시대에 걸쳐 오래 제사를 받았다고 평한다.
위강숙세가 (衞康叔世家) 강숙 봉(封)은 무왕의 아우로 관·채의 난 뒤 무경의 은 유민을 맡아 위(衞)에 봉해졌고, 주공이 「강고」「주고」「재재」를 지어 주었다. 선공(宣公)은 태자 급(伋)의 아내를 빼앗았고 아들 삭(朔)이 참소하자 급이 도적에게 죽게 되었는데, 이복 아우 수(壽)가 먼저 죽자 급도 따라 죽었다. 의공은 학을 좋아하다 적(翟)에게 죽었다. 영공 때 태자 괴외(蒯聵)가 달아나 손자 첩과 부자 다툼이 벌어졌고, 공회의 난에서 자로(子路)가 갓끈을 매고 죽어 공자가 슬퍼했다. 위는 점차 쇠해 진 통일 뒤 군(君) 각이 폐위되며 끊겼다고 한다. 사마천은 급과 수가 서로 죽음을 다툰 일을 슬퍼한다.
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 미자 개(開)는 주(紂)의 서형으로 음란을 간하다 듣지 않자 떠났고, 기자(箕子)는 거짓 미친 척하며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하다 죽었다. 무왕이 은을 이기자 미자가 복종했고, 무왕은 기자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물었으며 조선에 봉하되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관·채의 난 뒤 주공이 미자를 송에 봉했다. 양공(襄公)은 홍수(泓)에서 초와 싸우며 상대가 진을 갖추기 전에는 치지 않는다는 인의를 고집하다 패했다. 경공은 재앙을 백성에게 옮기라는 권유를 거부했고, 말년 왕 언(偃)의 폭정 끝에 송은 제·위·초에 멸망했다.
진세가 (晉世家) 당숙우(唐叔虞)는 성왕이 오동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장난삼아 봉했으나 사일(史佚)의 말로 실제 당에 봉해졌다고 한다. 곡옥(曲沃)의 환숙(桓叔) 계통이 3대에 걸쳐 본가를 이어받아 무공(武公)이 제후로 인정받았다. 헌공은 여희(驪姬)의 참소로 태자 신생(申生)을 죽게 했고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달아났다. 중이는 19년 망명 끝에 62세에 문공(文公)이 되어 성복에서 초를 꺾고 패자가 되었다. 이후 조순(趙盾)과 영공 시해, 육경의 전횡을 거쳐 지백이 멸망하고 조·한·위가 땅을 나눴으며 마지막 정공(靜公)이 서인이 되어 진의 제사가 끊겼다.
초세가 (楚世家) 초의 선조는 전욱(顓頊)에서 나와 계련(季連)에 이르고, 주 성왕 때 웅역(熊繹)이 단양에 봉해졌다. 웅통(熊通)이 주가 존호를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무왕(武王)을 칭했다. 장왕(莊王)은 3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오거(伍擧)의 비유를 듣고 나서 정치를 잡았고, 주의 정(鼎)의 크기를 물어 왕손만에게 덕에 있다는 답을 들었다. 영왕(靈王)은 비(比)·기질(棄疾)의 반란으로 굶어 죽었다. 평왕 때 비무기의 참소로 오자서가 오로 달아났고, 회왕(懷王)은 장의(張儀)에게 속아 진(秦)에서 죽었으며, 부추(負芻)가 포로가 되어 초가 멸망했다.
월왕구천세가 (越王句踐世家) 월왕 구천(句踐)은 우(禹)의 후예로 합려를 취리에서 쏘아 부상 입혔으나, 부차(夫差)에게 부초(夫椒)에서 패해 회계산에 갇혔다. 대부 종(種)이 오 태재 비(嚭)에게 뇌물을 써 강화했고, 구천은 쓸개를 맛보며(嘗膽) 범려(范蠡)와 종에게 군사와 국정을 맡겼다. 오자서가 죽은 뒤 월이 오의 태자를 죽였고 몇 해 뒤 크게 이겨 고소산에서 부차를 몰아 자살하게 했다. 구천은 패자로 책명되었다. 범려는 종에게 '새가 다하면 활을 감춘다'는 편지를 보내고 떠나 도주공(陶朱公)이 되었으며, 종은 칼을 받아 자결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구천을 우의 유업을 이은 현군으로 평한다.
정세가 (鄭世家) 정 환공(桓公) 우(友)는 주 여왕의 막내아들로 태사백의 조언대로 괵·회 사이로 백성을 옮겨 정을 세웠으나 견융에게 유왕과 함께 죽었다. 장공(莊公)은 어머니 무강이 아우 단(段)을 편들자 단을 물리치고 어머니를 가두며 황천에서나 보겠다 했으나 영고숙의 꾀로 화해했다. 이후 소공·여공이 번갈아 서며 혼란했다. 문공은 중이를 푸대접했고, 양공은 초 장왕 앞에 웃통을 벗고 항복해 용서받았다. 간공 때 자산(子産)이 집정하며 진 평공의 병을 진단했고, 그가 죽자 공자가 울었다. 정은 약해져 한 애후에게 멸망했다. 사마천은 권리로 합친 자는 권리가 다하면 멀어진다고 평한다.
조세가 (趙世家) 조(趙)의 선조 조보(造父)는 주 목왕의 어자로 서언왕의 난을 평정해 조성을 받았다. 조순(趙盾)은 영공을 시해했다는 기록을 남긴 채 돌아왔고, 도안고(屠岸賈)가 조삭 일족을 멸하자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가 고아 조무(趙武)를 지켰다고 한다. 양자(襄子)는 한·위와 지백을 멸하고 땅을 3분했다. 무령왕(武靈王)은 호복기사를 시행하고 중산을 쳤으나 아들 장(章)의 난 중 사구에서 굶어 죽었다. 혜문왕 때 인상여·염파·조사가 활약했고 장평에서 40만이 매장된 뒤 이목이 버텼으나, 왕 천(遷)이 진에 항복해 조가 멸망했다.
위세가 (魏世家) 위(魏)의 선조는 필공 고(畢公高)의 후손 필만(畢萬)으로, 진 헌공을 섬겨 위 땅을 받았다. 문후(文侯)는 22년 조·한과 제후가 되었고, 자하(子夏)에게 경예를 배우고 단간목을 예우했으며 이극(李克)·서문표(西門豹) 등을 썼다. 혜왕(惠王)은 한단을 빼앗았다가 계릉과 마릉에서 제에 대패해 방연이 죽고 태자 신이 사로잡혔다. 대량(大梁)으로 천도했고 맹가(孟軻)는 이를 말한 혜왕에게 인의를 말했다. 안리왕 때 신릉군(信陵君)이 5국 군대를 이끌어 진을 깨기도 했으나 왕 가(假) 3년 진이 대량에 물을 대 위가 멸망했다. 사마천은 하늘의 뜻이라 평한다.
한세가 (韓世家) 한(韓)의 한궐(韓厥)은 도안고가 조삭을 해치려 할 때 말렸고, 훗날 조무(趙武)에게 조씨의 땅을 돌려 제사를 잇게 했다. 강자(康子)는 조·위와 지백을 쳐 땅을 나누었고 경후 때 제후로 인정받았다. 소후 때 신불해(申不害)가 상이 되어 나라가 다스려졌다. 선혜왕은 진과 화해하자는 공중(公仲)의 말을 물리치고 초의 구원 허세를 믿다가 진에게 안문에서 패했다. 이후 이궐에서 24만을 잃었고, 왕 안(安) 5년 한비(韓非)를 진에 보냈으나 붙잡혀 죽었다. 9년에 안이 사로잡혀 영천군이 되며 한이 망했다. 사마천은 한궐의 일을 천하의 음덕이라 평한다.
전경중완세가 (田敬仲完世家) 진(陳) 여공의 아들 완(完)은 태어날 때 주 태사가 점쳐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번성하리라 했고, 제로 달아나 공정(工正)이 되어 전씨(田氏)를 이었다. 전걸(田乞)은 큰 말로 빌려주고 작은 말로 거두어 민심을 얻었고, 아들 상(常)은 간공(簡公)을 죽이고 평공을 세워 제의 실권을 잡았다. 전화(田和)가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 위왕(威王)은 9년간 정사를 보지 않다가 아 대부를 삶아 죽여 기강을 세웠고, 마릉에서 손자의 계책으로 방연을 깼다. 민왕(湣王)은 연 악의(樂毅)에게 쫓겨 요치(淖齒)에게 죽었으며, 마지막 왕 건(建)은 싸우지 않고 진에 항복했다.
공자세가 (孔子世家)
공자(孔子)는 노(魯) 추읍에서 숙량흘(叔梁紇)과 안씨(顔氏) 사이에 태어났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라 한다. 젊어 계씨의 창고 일을 맡았고 주(周)에서 예를 묻고 노자를 만난 듯하다고 전한다. 소공이 쫓겨나자 제(齊)로 가 소(韶) 음악을 배웠으나 안영(晏嬰)의 반대로 경공에게 쓰이지 못했다. 노로 돌아와 시서예악을 닦다가 중도재·사공·대사구가 되었고, 정공 10년 협곡(夾谷) 회맹에서 제를 굴복시켜 빼앗긴 땅을 돌려받았다. 삼도(三都)를 허물려다 성(成)에서 막혔고, 소정묘(少正卯)를 죽였으나 제가 보낸 여악을 계환자가 받자 노를 떠났다. 위·광·송·정·진·채를 떠돌며 광에서 5일 구금되고, 송에서 환퇴(桓魋)의 위협을 받고, 진·채에서는 양식이 끊겼다. 14년 만에 계강자가 불러 노로 돌아왔으나 쓰이지 못했고, 시 3,000여 편에서 305편을 추려 현가하고 『역』을 읽어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으며 『춘추』를 지었다. 제자는 3,000이고 육예에 통한 이가 72인이다. 기린을 잡자 도가 다했다 탄식했고, 안연·자로가 먼저 죽은 뒤 73세로 죽어 사수 가에 묻혔으며 자공은 6년간 무덤 곁에 살았다. 태사공은 사당과 예기를 보고 지성(至聖)이라 칭했다.
진섭세가 (陳涉世家)
진승(陳勝, 자 섭涉)은 양성 사람으로 젊어 품팔이를 하며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랴"고 탄식했다. 2세 원년 7월 여좌(閭左) 900명을 어양(漁陽)으로 수자리 보내던 중, 둔장이던 진승과 오광(吳廣)은 큰비로 기일을 어겨 모두 참형이 될 처지가 되자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을 사칭해 일을 일으키기로 했다. 비단에 '진승왕(陳勝王)'을 써 물고기 배에 넣고 여우 울음을 흉내 내 병졸을 놀라게 했으며, 장교를 죽이고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 외쳐 대초(大楚)를 칭했다. 진(陳)에 이르렀을 때 수레 600~700승, 기병 1,000여, 병졸 수만이었고 진을 점령해 왕이 되어 장초(張楚)라 했다. 무신(武臣)이 조왕, 한광이 연왕, 전담이 제왕을 스스로 칭했고, 주문(周文)은 장한(章邯)에게 희(戲)에서 패해 자결했다. 가왕 오숙은 부하 전장(田臧)에게 죽었고, 섣달 진왕은 하성보에서 마부 장가(莊賈)에게 살해되어 은왕(隱王)이라 시호했다. 왕 노릇은 6개월이었다. 옛 친구가 "夥頤"라 하자 그를 벴고, 이에 옛 사람들이 떠났다고 한다. 그가 보낸 이들이 마침내 진(秦)을 망하게 했고 고조는 탕에 묘지기 30호를 두었다. 말미의 가의(賈生) 글은 후대 부가로, 인의를 베풀지 않아 형세가 달라졌다고 한다.
외척세가 (外戚世家) 서두는 하·은·주가 외척의 도움으로 일어나 여인으로 망했다고 말한다. 한(漢)에서는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을 죽이고 여씨를 왕으로 세웠다가 멸망을 불렀다. 박태후(薄太后)는 한왕의 총애를 입어 대왕(代王), 곧 문제를 낳았고 여후 때 눈에 띄지 않아 화를 면했다. 두태후(竇太后)는 대왕의 총애를 받아 경제를 낳았고 팔려 갔던 동생 두광국(竇廣國)과 다시 만나 부둥켜 울었다. 왕태후는 무제를 낳았고 율희(栗姬)가 폐해졌으며,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되어 위청·곽거병이 귀해졌다. 저선생이 보태 쓴 부분이 뒤에 붙어 있다.
초원왕세가 (楚元王世家) 초 원왕 유교(劉交)는 고조의 막내 아우로 팽성에 도읍했다. 고조는 젊을 때 형수가 솥을 긁은 일 때문에 큰형 아들만 봉하지 않았다가 태상황이 말하자 그 아들 신(信)을 갱힐후로 봉했다고 한다. 손자 왕 무(戊)는 오와 모반하다 주아부에게 패해 자결했고, 경제는 원왕의 아들 예(禮)를 세웠다. 이어 조왕 유수(遂)가 소개되는데 오초와 모반해 한단에서 7개월 버티다 성이 물에 무너져 자살했다. 사마천은 초왕이 신공(申公)을, 조왕이 방여선생을 썼다면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고 '안위는 명령을 내리는 데, 존망은 사람을 맡기는 데 있다'고 했다.
형연세가 (荊燕世家) 형왕 유가(劉賈)는 유씨의 어느 계통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는 한왕을 따라 항적을 쳤고, 초 땅의 양식을 태워 항우를 괴롭혔으며 해하에서도 싸웠다. 6년 한신을 폐한 뒤 형왕으로 세워졌으나 경포가 반란하자 싸우다 패해 죽었다. 연왕 유택(劉澤)은 먼 일족으로 영릉후가 되었고, 여후 때 전생(田生)의 계책으로 여산을 여왕으로 세우도록 힘쓴 대가로 낭야왕이 되었다. 여후 사후 문제를 세우는 일에 참여해 연왕으로 옮겼다. 후손 정국(定國)은 인륜을 어지럽힌 죄로 공경들에게 '금수의 행실'이라 지탄받아 자살하고 나라가 없어졌다. 사마천은 형왕이 계책으로 강회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본다.
제도혜왕세가 (齊悼惠王世家) 제 도혜왕 유비(劉肥)는 고조의 맏서자로 70성을 받았다. 혜제 때 입조해 혜제와 평민처럼 연회한 일로 여태후의 노여움을 사 성양군을 바치고 풀려났다. 아우 주허후 장(章)은 여후 연회에서 경전가를 불러 여씨를 풍자했고, 여후가 죽자 형 제왕 애왕(哀王)에게 은밀히 알려 안팎으로 호응해 여씨를 치기로 했다. 제왕이 거병하고 관영(灌嬰)이 형양에서 연화(連和)했으며, 장은 주발·진평과 여씨를 죽였으나 대신들은 제왕이 아닌 대왕(문제)을 세웠다. 이후 제는 일곱으로 나뉘었다. 사마천은 제도혜왕의 나라가 가장 컸으나 분열은 이치라고 평한다.
소상국세가 (蕭相國世家) 소하(蕭何)는 패현 사람으로 법에 밝아 고조를 보호했고, 함양에서 다른 장수들이 금백을 나눌 때 진의 율령과 도서를 거두었다. 한왕에게 한신(韓信)을 추천했고, 관중을 지키며 군량과 병졸을 계속 대어 초한 전쟁을 뒷받침했다. 항우를 죽인 뒤 공이 첫째로 인정되어 찬후(酇侯)가 되자 고조는 사냥개와 사람의 비유로 그 공을 변호했다. 여후와 한신을 죽였고,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는 의심에 땅을 싸게 사 몸을 낮추기도 했다. 혜제 때 후임으로 조참을 인정하고 죽어 문종후(文終侯)가 되었으며, 사마천은 그의 공훈이 환히 빛났다고 평한다. 후손이 죄로 후를 잃어도 천자가 거듭 찾아 이었다.
조상국세가 (曹相國世家) 조참(曹參)은 패의 옥연(獄掾)으로 있다가 고조가 일어나자 중연으로 따라 진을 멸하는 데 힘썼다. 한신과 함께 위표를 생포하고 제를 평정하는 등 두 나라와 122개 현을 함락한 전공을 세웠다. 제의 승상이 되어 개공(蓋公)의 황로술을 따라 9년간 청정한 정치로 칭송받았다. 소하가 죽자 상국이 되어 그의 약속을 그대로 지켰으며, 문사에 서툰 장자를 쓰고 밤낮 술을 마셨다. 혜제가 아들을 시켜 책망하자 곤장을 쳤고, 혜제 앞에서 '법령이 밝으니 지키면 된다'고 답했다. 상국 3년 만에 죽어 의후(懿侯)가 되었고 백성은 '소하가 법을 만들었고 조참이 지켰다'고 노래했다.
유후세가 (留侯世家)
유후 장량(張良)은 선조가 한(韓)의 재상을 지냈고, 진이 한을 멸하자 가산을 털어 자객을 구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철추로 습격했으나 부거를 맞혔다. 하비에 숨었다가 이교(圯) 위 노인에게 신발을 주워 신겨 주고 세 번째 만에 책 한 편을 받았는데, 이는 『태공병법』이라 한다. 진섭이 일어나자 패공(沛公)을 따라 요관(嶢關)을 속임수로 깨고, 진 궁에 머물려는 패공에게 번쾌의 간언을 받아들이라 했으며, 홍문(鴻門)의 위기는 항백(項伯)과 연을 맺어 풀었다. 한왕에게 잔도를 불태우라 하고 경포·팽월·한신 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기라 했다. 한 3년 역식기가 6국 후손을 세우자 하자 젓가락을 빌려 여덟 가지 불가함을 들어 막았고, 한신이 제왕을 청할 때는 달래 인을 주게 했다. 6년 제 3만 호를 사양하고 유(留)를 청해 유후가 되었으며, 옹치(雍齒)를 먼저 봉해 장수들의 불안을 가라앉히고 관중 도읍론에 찬성했다. 고조가 태자를 여의로 바꾸려 하자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모셔 태자를 모시게 하여 막았다. 삼촌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으니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고 싶다며 곡식을 끊고 도인을 배웠고, 후에 죽어 문성후(文成侯)가 되었다. 태사공은 그 모습이 부인처럼 아름다웠다고 했다.
진승상세가 (陳丞相世家) 진평(陳平)은 가난하나 책을 좋아했고, 마을 제사에서 고기를 고르게 나누며 천하를 맡아도 이같이 하겠다고 말했다. 위왕과 항우를 섬기다 떠나 한왕에게 와서 호군중위가 되었고, 주발 등이 형수와 사통하고 금을 받았다고 참소했으나 위무지가 능력을 쓰라고 변호했다. 형양에서 황금으로 반간을 써 범증을 항우에게서 떼어 놓았고, 여자 2,000명을 내보내 한왕을 탈출시켰다. 여후 사후 주발과 모의해 여씨를 주살하고 문제를 세웠다. 문제 2년에 죽어 헌후(獻侯)가 되었고, 스스로 음모가 많아 후손이 끊기리라 했다고 하며, 사마천은 그가 본디 황노술을 좋아했다고 평한다.
강후주발세가 (絳侯周勃世家) 주발(周勃)은 누에 채반을 짜고 장례 피리를 불던 사람으로, 고조를 중연으로 따라 진을 멸하고 한중에서 장군이 되어 연왕 장도 등을 깼으며 강후(絳侯)가 되었다. 순박하고 후덕해 글과 유세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후 사후 진평과 모의해 여씨를 주살하고 문제를 세웠으나, 뒤에 반란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박태후의 말로 풀려났다. 아들 조후 주아부(周亞夫)는 세류의 엄한 군령으로 문제의 감탄을 샀고 오초의 난을 석 달 만에 평정했다. 그러나 경제의 뜻을 어겨 소원해졌고, 아들이 산 갑옷 사건으로 정위에서 닷새 단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사마천은 아부가 자기를 지나치게 믿고 배우지 않아 곤궁했다고 평한다.
양효왕세가 (梁孝王世家) 양 효왕 무(武)는 문제의 아들로 경제와 같은 두태후 소생이다. 경제가 후사를 정하지 않았을 때 '천추만세 후에 왕에게 전하겠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했다. 오초칠국의 난에 수양을 지켜 주아부와 석 달을 버텼고, 이후 40여 성의 땅과 막대한 금을 가졌다. 율태자가 폐위되자 두태후가 효왕을 후사로 삼으려 했으나 원앙(袁盎) 등이 반대했고, 효왕은 양승·공손궤를 시켜 원앙을 죽였다. 한안국의 주선으로 풀려났으나 다시 입조를 거절당한 채 병으로 죽었다. 태후가 슬퍼하자 경제는 양을 5국으로 나눠 아들 다섯을 왕으로 세웠다. 저선생이 보태 쓴 부분도 붙어 있다.
오종세가 (五宗世家) 경제의 아들 13명이 모두 왕이 되었고 어머니는 다섯이라 오종(五宗)이라 한다. 하간 헌왕 덕은 유학을 좋아했고, 임강 민왕 영은 태자에서 폐위된 뒤 종묘 담 안에 궁을 지은 죄로 소환되어 자살했는데 강릉 부로들이 왕이 돌아오지 못하리라며 울었다고 한다. 강도 역왕 비는 오를 치는 공을 세웠고, 교서 우왕 단은 음험하고 포악했다. 조왕 팽조는 간교해 상과 이천석을 말꼬투리로 몰아냈고, 중산왕 승과 서로 비난했다. 상산 헌왕 순의 집안은 병수발 문제로 나라가 끊겼다. 사마천은 오초 난 뒤 한이 이천석을 두고 승상을 상(相)으로 고쳐 제후의 권한을 빼앗았다고 한다.
삼왕세가 (三王世家) 대사마 곽거병이 황자들의 봉작을 청하자 승상 청적 등이 굉(閎)·단(旦)·서(胥)를 왕으로 세우자고 주청했다. 황제는 가르치지 못한 아이를 왕으로 세울 수 없다며 열후로 삼으라 했으나 신하들이 거듭 상주했고, 열후 27인과 의논한 끝에 허락했다. 4월 을사일에 굉을 제왕, 단을 연왕, 서를 광릉왕으로 세우고 어사대부 탕이 책문을 읽었다. 사마천은 연·제의 일은 취할 것이 없으나 문장이 볼 만해 세가에 붙였다고 한다. 저선생은 굉이 일찍 죽어 나라가 끊긴 일, 단과 서가 모반을 꾀하다 자살한 일을 보태었다. 왕부인이 아들 굉의 봉지를 낙양으로 청했으나 무제가 제(齊)를 권했다는 일도 전한다.
열전(列傳) 70편: 사람들의 이야기
열전은 현자와 책사, 장군, 자객, 관리, 이민족, 상인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의 삶을 서술합니다. 마지막 편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백이열전 (伯夷列傳)
사마천은 육예에서 믿을 만한 것을 살핀다며, 요가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양보했다는 세간의 말은 글이 거의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한다.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서로 자리를 양보하다 함께 달아났고, 서백(西伯)을 찾아갔으나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목주를 싣고 주(紂)를 치러 가는 길이어서 말고삐를 잡고 간했다. 좌우가 베려 하자 태공(太公)이 의로운 사람이라며 부축해 보냈다. 천하가 주나라를 따르자 둘은 주나라 곡식 먹기를 부끄러워해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고, 죽기 전에 노래를 지었다. 사마천은 "원망한 것인가, 아닌가"를 묻고, 천도가 늘 선인을 돕는다면 안연은 가난하다 일찍 죽고 도척(盜蹠)은 날마다 사람을 죽이고도 천수를 누린 것은 어찌 된 일이냐며 "천도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 하고 미혹을 토로한다. 끝으로 백이·숙제는 공자를 만나 이름이 더 드러났고 안연은 천리마 꼬리에 붙어 드러났듯, 평범한 사람이 이름을 세우려면 청운지사(青雲之士)에 붙지 않고는 어렵다고 맺는다.
관안열전 (管晏列傳) 관중(管仲)은 젊을 때 포숙아(鮑叔牙)와 사귀었고, 포숙은 그의 현명함을 알아 공자 규(糾)의 편에 섰다가 갇힌 그를 환공(桓公)에게 천거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를 아홉 번 모아 패자로 만들었고, 재화를 유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며 화를 복으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나를 아는 이는 포숙"이라 했다. 백여 년 뒤 안영(晏嬰)은 세 임금을 섬기며 절검했고, 갇힌 월석보(越石父)를 속량했다가 그의 책망을 듣고 상객으로 모셨으며 마부를 대부로 천거했다. 태사공은 안자의 마부라도 되겠다고 한다.
노자한비열전 (老子韓非列傳)
노자는 초(楚) 고현(苦縣) 사람으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耼)이며 주나라 수장실의 사관이었다. 예를 물으러 온 공자(孔子)에게 교만과 욕심을 버리라 했고, 공자는 제자에게 노자가 용 같다고 했다. 주나라가 쇠하자 떠나 관(關)에서 관령 윤희(尹喜)의 청으로 오천여 자의 책을 쓰고 간 뒤 종적을 몰랐으며, 본문은 160여 세 또는 200여 세를 살았다고 전하고 태사 담(儋)이 노자인지는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한다. 장자(莊子)는 몽(蒙) 사람 주(周)로 십여만 자의 책을 남겼고, 초 위왕이 재상으로 불렀으나 희생 소의 비유를 들어 거절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았다. 신불해(申不害)는 한 소후의 재상으로 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한비(韓非)는 한나라 공자로 말을 더듬었으나 글을 잘 썼고,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을 섬겼다. 「고분」·「오두」 등 십여만 자를 지었는데, 진왕(秦王)이 보고 이 사람과 노닐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다. 한이 사신으로 보내자 진왕은 기뻐했으나, 이사와 요가가 한의 공자이니 진을 위하지 않을 것이라 참소했다. 옥에 갇힌 한비는 이사가 보낸 독약으로 자살했고, 진왕이 후회해 사면하려 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 태사공은 한비가 지극히 각박하다고 평한다.
사마양저열전 (司馬穰苴列傳) 전양저(田穰苴)는 제 경공 때 진(晉)과 연의 침공에 밀리자 안영(晏嬰)의 천거로 장군이 되었다. 그는 감군으로 온 임금의 총신 장고(莊賈)가 약속한 시각에 늦자 군법에 따라 베고, 달려 들어온 사자의 종자와 수레도 베어 군율을 세웠다. 병사와 같은 몫을 먹으며 보살피자 병든 자도 앞다투어 싸워 진군은 물러나고 연군은 흩어졌으며 잃은 땅을 되찾았다. 대사마가 되었으나 참소로 물러나 병들어 죽었고, 훗날 위왕이 그의 법을 『사마양저병법』으로 붙였다고 한다.
손자오기열전 (孫子吳起列傳)
손무(孫武)는 오왕 합려(闔廬)가 보는 앞에서 궁녀 180명을 조련하다 웃는 두 총희를 군법대로 베고, 그 뒤 모두 규율대로 움직이게 했다. 합려는 그를 장수로 삼아 서쪽으로 초의 영(郢)에 들어갔다. 백여 년 뒤 손빈(孫臏)은 동문 방연(龐涓)의 모함으로 두 발을 잘리고 얼굴에 먹을 새긴 채 제로 탈출해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말 경주의 계책으로 천금을 얻게 했고, 위를 쳐 조를 구하는 계릉(桂陵)의 전투를 이겼다. 13년 뒤 마릉(馬陵)에서는 아궁이를 10만, 5만, 3만 개로 줄여 방연을 유인하고 나무에 글을 새겨 만 개의 쇠뇌를 숨겼으며, 방연은 스스로 목을 찔렀다. 오기(吳起)는 위(衛) 사람으로 아내를 죽여 노의 장수가 되어 제를 깨고, 위 문후(魏文侯) 밑에서 진(秦)의 다섯 성을 빼앗았으며 병사의 종기 고름을 빨아 주었다. 무후에게 나라의 보배는 덕에 있다고 했으나 모함을 받아 초로 가서, 도왕(悼王)의 재상으로 법을 밝히고 불요불급한 관직을 폐해 초를 강하게 했다. 도왕이 죽자 종실 대신들이 쏘아 죽였고, 연좌로 멸족된 집이 70여 가였다. 태사공은 두 사람이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고 슬퍼한다.
오자서열전 (伍子胥列傳)
오원(伍員, 자서)은 초 평왕(平王)의 태부 오사(伍奢)의 둘째 아들이다. 비무기(費無忌)의 참소로 태자 건(建)이 쫓기고 오사가 갇히자, 형 오상(伍尚)은 부름에 응해 아버지와 함께 죽었고 오원은 활을 당겨 사자를 겨누고 달아났다. 소관(昭關)을 넘고 어부의 도움으로 오나라에 이른 그는 공자 광(光)에게 전저(專諸)를 천거했고, 광은 오왕 요(僚)를 죽이고 합려(闔廬)가 되었다. 합려 9년 오자서와 손무는 초를 쳐 다섯 번 싸워 영(郢)에 이르렀고, 소왕을 찾지 못하자 평왕의 무덤을 파 시신을 삼백 번 채찍질했다.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복수가 너무 심하다고 하자 날은 저물고 길은 멀어(日暮途遠) 거꾸로 행했다(倒行逆施)고 답했고, 신포서는 진(秦)에서 7일 밤낮 곡하여 구원병을 얻었다. 합려는 월을 치다 죽었고, 부차(夫差)는 부초에서 월을 깨 구천(句踐)의 항복을 받았다. 자서는 월을 놓아주면 안 된다고 간했으나 백비(伯嚭)의 말을 따랐고, 제를 칠 때도 간하다 백비의 참소로 촉루(屬鏤) 검을 받아 자결하며 눈을 오 동문에 걸어 달라 했다. 9년 뒤 월이 오를 멸하고 부차를 죽였다. 태사공은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이름을 남겼다고 평한다.
중니제자열전 (仲尼弟子列傳) 공자는 업을 받아 통달한 제자가 77인이라 했다. 안회(顏回)는 가난 속에서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다 일찍 죽었고, 자로(子路)는 거칠었으나 제자가 되어 위나라 난리에서 갓끈을 매고 죽었다. 재여(宰予)는 낮잠으로 꾸짖음을 들었다. 자공(子貢)은 제·오·월·진을 오가며 설득해 노나라를 보존했다고 하며 재물도 모았다. 자하(子夏)는 아들을 잃고 눈이 멀었고, 유약(有若)은 공자와 닮아 세워졌다가 쫓겨났다. 35인은 기록이 남고 42인은 이름뿐이라 한다. 태사공은 공씨 고문을 근거로 편을 이루었다.
상군열전 (商君列傳)
상군(商君)은 위(衛)의 서공자 공손앙(公孫鞅)으로, 위(魏)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혜왕에게 쓰지 못하겠거든 죽이라 했으나 쓰이지 못했다. 진(秦) 효공(孝公)이 현자를 구한다는 말에 서쪽으로 가 네 번 만났는데, 제도·왕도에는 졸다가 패도에 움직이고 강국의 술을 말하자 며칠을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감룡(甘龍)과 두지(杜摯)의 반대를 물리치고 좌서장(左庶長)이 되어 십오(什伍) 연좌, 군공 작위, 사투 형벌 등의 법을 정했다. 법을 믿게 하려 나무를 옮기면 10금, 이어 50금을 준다 하여 옮긴 이에게 곧 지급했다. 태자가 법을 어기자 부(傅) 공자 건(虔)을 형하고 사(師) 공손가(賈)를 묵형했고, 10년 뒤 백성은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을 만큼 되었다. 대량조(大良造)가 되어 함양으로 천도하고 31현을 두었다. 위의 공자 앙(卬)을 술자리 맹약으로 속여 사로잡아 하서 땅을 얻고 상(商) 15읍에 봉해졌다. 조량(趙良)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고, 효공이 죽자 공자 건 무리가 모반을 고했다. 관문 객사에서 법의 연좌 때문에 객사에서 묵지 못하고 위(魏)에도 거절당해 상읍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정(鄭)의 민지에서 죽었고, 혜왕은 시신을 거열했다. 태사공은 천성이 각박하다고 평한다.
소진열전 (蘇秦列傳)
소진(蘇秦)은 동주 낙양 사람으로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배웠으나 곤궁히 돌아와 가족에게 비웃음을 샀다. 『주서음부』를 읽고 1년 만에 췌마를 터득했고, 진(秦) 혜왕에게는 쓰이지 못했다. 연 문후에게 조와 합종하라 설득해 거마를 받고, 조 숙후에게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진을 치자고 하여 수레 100승과 황금 천일 등을 받아 제후들과 약조하러 갔다. 한 선왕에게는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꼬리는 되지 말라"는 속담을 들었고, 위·제·초도 따르니 여섯 나라 합종의 종약장이 되어 재상을 겸했다. 낙양을 지날 때 전에 비웃던 형제와 형수가 엎드려 음식을 올리자 "어찌 전에는 오만하고 후엔 공손한가" 하고 천금을 종족에게 나눠 주었다. 조 숙후가 무안군에 봉하고 종약서를 진에 던지자 진은 15년간 함곡관을 엿보지 못했다. 뒤에 합종이 풀려 연으로 간 소진은 제가 빼앗은 10성을 돌려받았다. 역왕의 모친과의 일이 문제될까 두려워 제로 가 객경이 되었으나, 대부들이 보낸 자객에게 찔려 죽으며 자신을 거열해 조리돌리라 하여 범인이 나타나게 했다. 아우 소대(蘇代)와 소려(蘇厲)도 유세를 배웠고, 소대는 연을 위해 제를 쳤다. 태사공은 소진이 반간으로 죽어 천하가 웃었다고 한다.
장의열전 (張儀列傳)
장의(張儀)는 위(魏)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초 재상의 벽옥 사건으로 매를 맞고도 아내에게 "내 혀가 아직 있는가" 물었다. 소진은 몰래 사람을 붙여 장의가 진 혜왕에게 쓰이게 했고, 장의는 소진의 술을 깨닫지 못했다며 감탄했다. 진이 촉(蜀)을 칠지 한(韓)을 칠지 정할 때 사마착(司馬錯)이 촉을 주장했고 혜왕이 따라 10월 만에 평정했다. 장의는 위 땅을 취하고 재상이 되어 위 애왕에게 합종을 버리고 진과 화친하게 했다. 제와 절교하면 상·어 땅 600리를 주겠다고 초 회왕을 속였는데, 나중에 6리라 하여 초가 진을 쳤다 크게 패했다. 진이 검중을 요구하자 초왕이 장의를 원해 스스로 갔고, 근상(靳尚)과 정수(鄭袖)의 도움으로 풀려나 초에 연횡을 설득했다. 이어 한·제·조·연을 차례로 설득해 모두 진을 섬기게 했고 무신군(武信君)에 봉해졌다. 혜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서자 참소를 받았고 제후들이 다시 합종했다. 장의는 위로 가서 제가 위를 치게 한 틈에 한을 치자고 하여 위의 재상으로 1년을 지내다 위에서 죽었다. 태사공은 두 사람이 참으로 "기울고 위태로운 선비"라 하되, 소진이 먼저 죽어 더 미움받았다고 한다.
저리자감무열전 (樗里子甘茂列傳) 저리자(樗里子) 질(疾)은 진 혜왕의 이복동생으로 지모가 많아 '지낭'이라 불렸고, 장수로 조·초를 쳐 엄군에 봉했으며 소왕 때 죽어 위남에 묻혔다. 감무(甘茂)는 하채 사람으로 한중과 촉을 평정하고 좌승상이 되었다. 의양을 칠 때 세 사람이 말하면 어머니도 의심한다는 증삼 이야기로 무왕에게 식양의 맹세를 받아내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향수(向壽)의 참소로 제로 달아났다가 위에서 죽었다. 손자 감라(甘羅)는 열두 살에 장당을 설득하고 조에서 다섯 성을 얻어 상경에 올랐다.
양후열전 (穰侯列傳)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진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으로, 소왕을 세우는 데 힘썼고 재상이 되어 백기(白起)를 천거했다. 백기는 이궐에서 한·위 24만을 베었고 초의 영(郢)을 빼앗았다. 위염은 양과 도에 봉해져 부가 왕실보다 많았다. 위의 대량을 포위했다가 수가(須賈)의 설득으로 군을 물렸고, 제를 치려 하자 소대가 편지로 막았다. 위(魏)의 범수(范睢)가 소왕에게 외척 전횡을 말하자 소왕이 깨달아 그를 면직하여 관문 밖으로 보냈고, 위염은 수레 천 대를 이끌고 나가 도에서 죽었다.
백기왕전열전 (白起王翦列傳) 백기(白起)는 진 소왕의 장수로 이궐에서 한·위 24만을 베고 초의 영(郢)을 빼앗아 무안군에 봉해졌다. 장평(長平)에서 반간으로 조괄(趙括)이 염파(廉頗)를 대신하자 기병(奇兵)으로 조군을 끊어 40만 항복자를 속여 묻었다. 뒤에 한단 공격을 반대하다 응후와 소왕의 미움을 받아 두우(杜郵)에서 검을 받아 자결했고, 죽기 전 장평의 일을 죄로 인정했다고 한다. 왕전(王翦)은 시황의 초 정벌에 60만을 청하고 전택을 거듭 청해 의심을 피했으며, 보루를 지켜 초를 깨고 항연을 죽였다.
맹자순경열전 (孟子荀卿列傳) 태사공은 『맹자』에서 양 혜왕이 이익을 묻는 대목을 읽고 책을 덮으며 이익이 어지러움의 시작이라 탄식한다. 맹가(孟軻)는 제·양에서 쓰이지 못하고 『맹자』 7편을 지었다. 추연(騶衍)은 음양과 오덕전이(五德轉移)를 논하고 중국이 천하의 81분의 1이라 했으나 결론은 인의로 돌아갔고 왕들의 존대를 받았다. 순우곤(淳于髡)은 혜왕과 독대하며 침묵한 이유를 밝히고 벼슬하지 않았다. 순경(荀卿)은 제 직하에서 세 번 좨주가 되었고 난릉령이 되어 그곳에 묻혔으며, 이사가 그의 제자였다.
맹상군열전 (孟嘗君列傳)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정곽군 전영의 서자로 5월 5일에 태어나 버려질 뻔했으나, 영을 설득해 집안을 맡고 설(薛)을 이어 식객 수천을 거느렸다. 진에 가서 재상이 되었다가 갇혔는데, 개 도둑이 훔친 호백구로 행희에게 청하고 닭울음 흉내로 함곡관을 나와 풀려났다. 풍환(馮驩)은 빚 문서를 불살라 설 백성의 마음을 얻었고, 파면된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민왕이 교만해지자 위로 가 제를 치는 데 가담했다. 죽은 뒤 아들들이 다투자 제와 위가 설을 멸해 후사가 끊겼다고 한다.
평원군우경열전 (平原君虞卿列傳)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조의 공자로 빈객이 수천이었고, 절름발이를 비웃은 미인의 목을 베어 떠난 빈객을 되돌렸다. 진이 한단을 포위하자 초에 합종을 청하러 갈 때 모수(毛遂)가 스스로 나서 칼을 잡고 초왕을 설득해 합종을 이루었다. 이동(李同)의 말을 받아 재산을 풀어 결사대 3천을 모았고 초·위의 구원으로 한단이 풀렸다. 우경(虞卿)은 유세로 상경이 되어 진과의 강화와 땅 할양을 두고 계책을 냈으나 위제를 버리지 못해 조를 떠나 곤궁해졌고, 『우씨춘추』를 지었다. 태사공은 평원군이 이익에 눈이 어두웠다고 평한다.
위공자열전 (魏公子列傳) 위 공자 무기(無忌)는 안희왕의 동생으로 신릉군(信陵君)에 봉해졌고 식객 삼천을 두어 제후가 십여 년 위를 침범하지 못했다. 진이 한단을 포위하자 이문의 문지기 후영(侯嬴)의 계책으로 총희 여희(如姬)가 훔친 병부를 얻고, 주해(朱亥)가 진비(晉鄙)를 철추로 쳐 죽여 병력을 빼앗아 진군을 물리쳤다. 이후 다섯 나라 군대로 진군을 함곡관까지 몰았으나 진의 반간으로 의심받아 군권을 잃고 술과 여색으로 지내다 병들어 죽었다. 고조는 그를 흠모해 묘지기를 두었고, 태사공은 이문을 직접 찾아보았다.
춘신군열전 (春申君列傳) 황헐(黃歇)은 초 경양왕을 섬기다 진 소왕이 초를 치려 하자 글을 올려 막고 태자 완(完)과 함께 진에 볼모로 갔다. 왕이 병들자 태자를 마부로 변장시켜 돌려보내고 자신은 남아 병을 핑계 댔으며 응후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태자가 고열왕이 되자 재상이 되어 춘신군에 봉해졌고, 식객 삼천을 거느리고 노를 멸했으며 순경을 난릉령으로 삼았다. 아들이 없는 왕에게 이원(李園)의 누이를 바쳐 아들이 태자가 되게 했으나, 왕이 죽자 이원이 극문에서 그를 찔러 죽이고 집안을 멸했다. 태사공은 그의 우유부단을 평한다.
범저채택열전 (范睢蔡澤列傳) 범저(范睢)는 위의 수가(須賈)를 따라 제에 갔다가 모함으로 재상 위제(魏齊)에게 매질을 당하고 변소에 던져졌으나 죽은 척하여 탈출해 장록(張祿)이라 이름을 바꾸고 진으로 갔다. 소왕에게 원교근공(遠交近攻)을 권하고 태후와 양후를 몰아낸 뒤 응후에 봉해졌다. 사신으로 온 수가를 모욕하고 위제의 머리를 요구했고, 위제는 자결했다. 뒤에 연의 채택(蔡澤)이 공을 이루면 물러나라고 설득하자 범저는 그를 천거하고 병을 이유로 인수를 반납했다. 채택은 재상이 되었다가 몇 달 뒤 사임해 강성군이 되었다.
악의열전 (樂毅列傳) 악의(樂毅)는 위 문후의 장수 악양의 후손으로 연 소왕에게 예우를 받아 아경이 되었다. 소왕의 복수 뜻에 따라 조·초·한·위와 합종하여 제를 깨고 임치에 들어가 칠십여 성을 연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며 거와 즉묵만 남았다. 소왕이 죽고 혜왕이 서자 전단(田單)의 반간으로 소환되자 화를 두려워해 조로 가 망제군이 되었고, 연이 패하자 후회한 혜왕에게 답서를 보냈다. 연과 조를 오가다 조에서 죽었고, 고제는 후손 악숙을 화성군에 봉했다. 태사공은 괴통과 주보언이 그의 글을 읽고 울었다고 전한다.
염파인상여열전 (廉頗藺相如列傳)
염파(廉頗)는 혜문왕 16년 제를 크게 깨고 상경이 되었다. 인상여(藺相如)는 환관장 무현(繆賢)의 사인이었는데, 진 소왕이 열다섯 성과 화씨벽(和氏璧)을 바꾸자 하자 벽을 받들고 진에 가서 흠이 있다고 속여 벽을 되받고 "머리와 벽을 함께 부수겠다"고 항변했으며, 몰래 벽을 조에 돌려보냈다(완벽귀조, 完璧歸趙). 민지(澠池)의 회합에서는 소왕에게 질장구를 치게 했다. 상경이 되어 염파보다 윗자리에 서자 염파는 반드시 욕보이겠다고 했으나, 상여는 국가의 급함이 먼저라며 피했고 염파는 가시나무를 지고 사죄해(肉袒負荊)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조사(趙奢)는 알여(閼與)를 구원해 진군을 깨고 마복군(馬服君)이 되었다. 장평에서 염파가 방어하자 조왕이 진의 반간에 속아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로 교체했다. 상여와 조괄의 모친이 말렸으나 왕은 듣지 않았고, 조괄은 백기에게 포위되어 사십여 일 뒤 전사했으며 조가 잃은 수가 사십오만이었다. 염파는 위로 달아났다가 곽개의 모함으로 쓰이지 못하고 수춘에서 죽었다. 이목(李牧)은 북변에서 흉노 십여만 기를 깨고 무안군이 되었으나 곽개의 반간으로 죽어 조는 망했다. 태사공은 죽음을 알고 용감한 것은 어렵지 않고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렵다고 평한다.
전단열전 (田單列傳) 전단(田單)은 제의 종실 먼 일족으로 임치의 하급 관리였다. 연이 제를 깨자 일족의 수레 굴대 끝에 쇠를 씌워 안평에서 탈출하고 즉묵을 지켜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연 혜왕이 서자 반간으로 악의 대신 기겁(騎劫)이 오게 했다. 신사(神師)를 세우고 포로의 코를 베고 무덤을 파게 하여 성민의 분노를 키웠으며 거짓 항복으로 방심시킨 뒤, 뿔에 칼을 묶고 꼬리에 불을 붙인 소 천여 마리를 풀어 연군을 대파했다. 기겁은 죽고 칠십여 성이 회복되어 양왕을 맞았고, 전단은 안평군에 봉해졌다. 태사공은 정(正)으로 합치고 기(奇)로 이긴다고 평했다.
노중련추양열전 (魯仲連鄒陽列傳) 노중련(魯仲連)은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높이 여긴 제 사람이다. 진이 한단을 포위하자 위 장군 신원연이 진을 황제로 높이자고 하는데, 노중련은 진이 황제가 되면 동해에 몸을 던지겠다며 설득해 그만두게 했다. 평원군이 천금을 주려 하자 거절하고 떠났다. 뒤에 요성을 지키던 연 장수에게 화살에 묶은 글을 보내 치욕을 씻으라 권하자 장수는 자결했고, 전단이 벼슬을 주려 해도 바닷가로 숨었다. 추양(鄒陽)은 양 효왕을 섬기다 참소로 갇히자 옥중에서 글을 올려 풀려났고 상객이 되었다. 태사공은 노중련의 기개를 높이 평한다.
굴원가생열전 (屈原賈生列傳) 굴원(屈原)은 초 회왕의 좌도로 신임을 받았으나 상관대부의 참소로 멀어져 『이소』를 지었다. 장의의 속임수에 회왕이 제와 끊고 진에 패했으며, 굴원의 만류에도 회왕은 진에 가 억류되어 죽었다. 자란의 참소로 유배된 굴원은 어부와 문답한 뒤 「회사」를 짓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한의 가의(賈誼)는 문제 때 이십여 세에 태중대부가 되어 개혁을 건의했으나 모함으로 장사왕 태부로 좌천되었고 굴원을 조문하는 부와 「복조부」를 지었다. 양 회왕이 낙마해 죽자 자책하다 서른셋에 죽었다고 한다.
여불위열전 (呂不韋列傳) 양적의 큰 상인 여불위(呂不韋)는 한단에 볼모로 있던 진의 공자 자초(子楚)를 보고 '기이한 물건이니 사 둘 만하다'며 재물을 들여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게 했다. 자초가 한단의 미희를 청해 받았고 그 여인이 정(政)을 낳았다고 본문은 적는다. 자초가 장양왕이 되자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고, 정이 서자 중부로 불렸으며 식객을 모아 『여씨춘추』를 지었다. 태후와 통하던 중 노애(嫪毐)를 바쳤으나 노애가 반란을 꾀해 삼족이 멸했고, 여불위도 면직되고 촉으로 옮기라는 서신을 받자 짐독을 마셔 죽었다.
자객열전 (刺客列傳)
조말(曹沫)은 노 장공의 장수로 가(柯)의 맹약에서 비수로 제 환공을 위협해 빼앗긴 땅을 돌려받았고, 관중이 신의를 지키라고 말려 환공이 땅을 돌려주었다. 오의 전저(專諸)는 구운 생선 배 속의 비수로 오왕 요(僚)를 찔러 죽이고 죽었다. 진(晉)의 예양(豫讓)은 지백(智伯)의 원수 조 양자를 노려 변소 인부로 위장하고, 옻칠하고 숯을 삼키고도 붙잡혀, 양자의 옷을 세 번 칼질한 뒤 칼에 엎드려 죽었다. 지(軹)의 섭정(聶政)은 엄중자(嚴仲子)의 황금 백 일을 모친 생전에는 거절했으나 모친이 죽자 한(韓)에 가 재상 협루를 찔러 죽이고 자기 얼굴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죽었다. 누이 영(榮)도 시체 곁에서 울다 죽었다. 형가(荊軻)는 위(衛) 사람으로 연 태자 단(丹)의 청을 받아, 번오기(樊於期)의 머리와 독항(督亢)의 지도, 서 부인의 독 바른 비수를 갖고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역수(易水)에서 떠났다. 함양궁에서 지도 끝에 비수가 드러났으나(圖窮而匕首見) 진왕이 기둥을 돌며 달아났고, 하무저(夏無且)가 약 주머니로 쳤으며 왕이 칼로 형가의 다리를 베었다. 형가는 산 채로 협박해 약속을 받으려 해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연은 5년 뒤 멸망했고 고점리(高漸離)도 시황을 축으로 치려다 처형되었다. 태사공은 세간의 과장된 이야기를 바로잡는다.
이사열전 (李斯列傳)
이사(李斯)는 초 상채 사람으로 변소의 쥐와 창고의 쥐를 보고 탄식한 뒤 순경(荀卿)에게 배우고 진(秦)으로 갔다. 여불위의 사인이 되어 진왕에게 천하를 통일할 때라고 설득했고, 객을 쫓자는 논의가 일자 「간축객서」를 올려 철회시켰으며 정위, 이어 승상이 되었다. 시황 34년 순우월(淳于越)의 분봉 주장에 맞서 『시』『서』와 백가의 책을 태우자고 건의해 시황이 따랐다. 시황이 순행 중 사구(沙丘)에서 죽자 조고(趙高)가 호해(胡亥)를 설득하고 이사를 압박해 끝내 따르게 했고, 가짜 조서로 호해를 세우고 부소(扶蘇)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했다. 진승·오광이 일어나자 이세가 책망했고, 이사는 두려워 「독책」을 올려 군주의 방종을 법술로 정당화했다. 이는 이세의 뜻에 아첨한 것이라고 본문이 직접 밝힌다. 조고는 이사의 아들 이유(李由)와 도적이 같은 고을 출신이라며 모함했고, 이사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했으며 옥중 상서는 올려지지 않았다. 이세 2년 7월 오형을 받고 요참되었고 삼족이 멸했다.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 바쳤고 이세를 자결하게 했으며, 자영이 조고를 죽였으나 석 달 뒤 패공에게 항복했다. 태사공은 이사가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몽염열전 (蒙恬列傳) 몽염(蒙恬)은 조부와 부친이 진을 섬긴 장수 집안으로, 제를 깨고 삼십만 군으로 흉노를 몰아내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 장성을 쌓았다. 동생 몽의(蒙毅)는 조고(趙高)의 죄를 법대로 판결한 일이 있었다. 시황이 사구에서 죽자 조고가 호해·이사와 모의해 호해를 세우고 부소와 몽염에게 사죄를 내렸다. 몽염은 사자를 의심해 재청하다 갇혔고, 조고의 모함으로 몽의도 변론하다 죽었다. 몽염은 선조의 가르침을 지켜 지맥을 끊은 죄라 탄식하며 독약을 먹었으나, 태사공은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탓이라 비판한다.
장이진여열전 (張耳陳餘列傳)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대량 사람으로 문경지교를 맺었고, 진(秦)의 현상금을 피해 숨었다가 진승(陳涉)이 일어나자 조 땅을 공략해 무신을 조왕으로 세웠다. 거록이 포위되었을 때 진여가 구원하지 않아 장이가 책망하면서 둘은 원수가 되었다. 진여는 상산왕 장이를 쳐서 한에 투항하게 했으나, 한 3년 한신과 장이가 지수에서 진여를 죽였다. 장이는 조왕이 되었고 아들 장오(張敖)가 뒤를 이었다. 고조의 무례에 재상 관고(貫高)가 시해를 꾀하자 관고는 고문에도 왕은 모른다 했고 장오가 풀려나자 목을 쳤다. 태사공은 이익으로 사귄 탓이라 평한다.
위표팽월열전 (魏豹彭越列傳) 위표(魏豹)는 옛 위의 공자로 형 위구가 자결한 뒤 초 회왕의 병력으로 위왕이 되었다가 서위왕으로 옮겼다. 한에 속했으나 팽성에서 한이 패하자 부모 병문안을 핑계로 돌아가 배반했고, 한신에게 사로잡혀 뒤에 주가(周苛)에게 죽었다. 팽월(彭越)은 거야택의 고기잡이로, 소년들을 모아 유격군으로 초의 양식길을 끊고 해하의 승리를 도와 양왕에 봉해졌다. 진희의 반란 때 병을 핑계로 군을 보내지 않자 고제의 질책을 받았고, 반역 고발로 체포되어 촉으로 유배되었다가 여후의 계략으로 다시 고발당해 일족이 모두 죽었다.
경포열전 (黥布列傳) 경포(黥布)는 육(六) 사람으로 젊어 관상쟁이에게 "형벌을 받은 뒤 왕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고, 정말 묵형을 받자 웃었다. 항량(項梁)과 항우를 따라 공을 세워 구강왕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출병하지 않아 항왕의 원망을 샀고, 수하(隨何)의 설득으로 한(漢)에 귀순했다. 처자는 초에 몰살되었으나 회남왕이 되어 항적을 쳤다. 한신·팽월의 죽음에 두려워 반란했으나 고조에게 패했고, 장사애왕의 속임수로 파양에서 농민에게 죽었다. 태사공은 그의 선조를 두고 의문을 던졌다.
회음후열전 (淮陰侯列傳)
회음(淮陰) 출신 한신(韓信)은 가난한 평민 시절 정장 집에 얹혀 먹다 떠났고, 빨래하는 노파(漂母)에게 밥을 얻었으며 푸줏간 젊은이의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는 모욕(胯下之辱)을 당했다. 항량·항우를 섬기다 쓰이지 못해 한으로 도망쳤고, 소하(蕭何)가 달아난 그를 쫓아가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 천거해 대장에 올랐다. 삼진을 평정하고 위·대를 깨뜨렸으며 정형(井陘)에서 1만 병사로 배수진(背水陣)을 쳐 조의 진여(陳餘)를 격파했고, 연을 굴복시키고 제(齊)를 습격해 용저(龍且)를 유수에서 죽였다. 가왕을 청하다 제왕에 봉해졌고, 무섭과 괴통(蒯通)의 삼분 권유를 거절했다. 초왕이 되어 표모에게 천금을 주었으나, 종리매(鍾離眛)를 숨겼다는 고발에 고조가 운몽에 오자 결박되자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는 삶긴다(狡兔死良狗烹)"고 한탄했고 회음후로 강등되었다. 원망하다 진희(陳豨)와 내통해 10년 거짓 조서로 여후·태자를 습격하려다 소상국의 속임수로 입궁해 장락궁에서 참수되었고 삼족이 멸했다. 태사공은 겸양했다면 주공·소공에 비길 공이라 평했다.
한신·노관열전 (韓信盧綰列傳) 한왕 신(韓王信)은 옛 한나라 왕손으로 장량이 얻어 장수가 되었고 한왕에 올랐다. 흉노 묵돌(冒頓)에게 포위되어 화해를 구하다 의심받자 흉노에 투항했고, 고제를 평성 백등에서 포위하는 데 가담했다가 11년 참합에서 참수되었다. 노관(盧綰)은 고조와 같은 마을, 같은 날 태어난 벗으로 연왕이 되어 가장 총애받았다. 진희가 반하자 사신을 보내 연결하려 했고, 고조가 부르자 병을 칭하다 고조 붕어 뒤 흉노로 가 죽었다. 진희(陳豨)는 대왕이라 자칭하고 반했다가 번쾌에게 베였다. 태사공은 두 사람이 흉노로 간 일을 슬퍼했다.
전담열전 (田儋列傳) 전담(田儋)은 옛 제나라 왕족으로, 거짓으로 노비를 묶고 관청에 가 현령을 죽인 뒤 제왕이 되었으나 장한(章邯)에게 임제에서 죽었다. 사촌동생 전영(田榮)은 항량이 장한을 깨자 전가(田假)를 쫓아내고 전담의 아들 시(市)를 왕으로 세웠다. 이후 항우의 봉책에 맞서 스스로 제왕이 되었으나 평원에서 살해되었다. 아우 전횡(田橫)은 아들 광(廣)을 왕으로 세우고 재상이 되었는데, 한신이 습격하자 역이기를 삶아 죽였다. 한이 천하를 얻자 5백여 명과 섬에 들어갔고, 고제의 부름에 낙양 앞 시향에서 목을 찔렀다. 섬의 5백 명도 모두 따라 자살했고, 태사공은 그 절개를 기렸다.
번·역·등·관열전 (樊酈滕灌列傳) 번쾌(樊噲)는 개백정 출신으로 홍문(鴻門)의 연회에 방패를 들고 뛰어들어 항우를 침묵시켰고, 고조의 병중에는 문을 밀고 들어가 간했다. 여후의 동생 여수를 아내로 맞아 중용되었다. 역상(酈商)은 수천을 이끌고 패공에 귀속했고, 아들 역기(酈寄)는 여씨 주살 때 여록을 속여 "벗을 판 자"라 불렸다. 하후영(夏侯嬰)은 마부로 팽성 패주 때 아이를 버리려는 한왕을 거스르며 효혜와 노원을 끝까지 태웠고, 문제 영입에 앞장섰다. 관영(灌嬰)은 비단장수 출신 기병 지휘관으로 항적을 동성에서 추격했고 문제 때 승상이 되었다. 태사공은 이들의 미천한 옛 집을 보고 감회를 적었다.
장승상열전 (張丞相列傳) 장창(張蒼)은 율력을 좋아해 패공을 따랐고, 참수당할 뻔했을 때 왕릉(王陵)이 살려 주었다. 문제 때 승상이 되어 한나라를 수덕(水德)이라 정하고 율력을 정리했으며, 공손신(公孫臣)의 토덕설을 반대했으나 황룡이 나타나 물러나 백 살 넘어 죽었다. 주창(周昌)은 강직해 고조에게 "걸·주 같은 군주"라 했고, 말더듬이로 태자 폐립을 반대했으나 조왕 여의(如意)는 고조 사후 독살되었다. 신도가(申屠嘉)는 승상으로 총신 등통(鄧通)을 꾸짖었으나 조조(晁錯)를 탄핵하다 실패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후 승상들은 자리만 채웠고, 뒷부분은 정화 이래 승상들을 간략히 잇는다. 태사공은 장창이 진의 전욱력을 고수한 점을 의문시했다.
역생·육가열전 (酈生陸賈列傳) 역이기(酈食其)는 고양의 가난한 문지기로 광생(狂生)이라 불렸는데, 평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던 패공(沛公)을 길게 읍하며 꾸짖어 상좌에 앉혔다. 후에 제(齊)나라로 가 전광(田廣)을 설득해 군대를 풀게 했으나, 한신이 기습하자 전광이 속았다며 그를 삶았다. 그는 굴하지 않고 "큰일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육가(陸賈)는 남월에 사신으로 가 위타(尉他)를 신하로 칭하게 했고, 고조에게 『신어(新語)』를 바쳐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느냐"고 했다. 여씨 때는 진평과 주발을 이어 주었다. 평원군 주건(朱建)의 일도 곁들였고, 태사공은 세간의 역생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부·근·괴성열전 (傅靳蒯成列傳) 이 장은 세 공신의 전기다. 양릉후 부관(傅寬)은 위나라 기장으로 패공을 따라 삼진을 평정하고 한신 휘하에서 제나라 역하군을 깨 양릉후에 봉해졌으며, 진희 토벌 때 대(代)에 주둔했다. 신무후 근흡(靳歙)은 기도위로 오창에서 항적군을 깨고 강릉의 왕을 생포했으며 초왕 한신을 진에서 잡았고, 벤 머리와 포로, 항복시킨 성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괴성후 주설(周緤)은 늘 고조의 참승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조가 진희를 직접 치러 가려 하자 울며 만류했고, 고조는 이를 사랑으로 여겨 특권을 주었다. 태사공은 부관·근흡의 공을 "하늘이 준 것"이라 하고 주설을 돈후한 군자로 칭찬했다.
유경·숙손통열전 (劉敬叔孫通列傳) 유경(劉敬, 본명 누경婁敬)은 수자리 가다 갈옷 차림으로 고제를 알현해 관중 도읍을 설득했고, 장량도 동의해 천도했다. 흉노 정탐 때 약한 병사만 보임은 매복이라 반대했으나 투옥되었다가 평성 포위 뒤 풀려났고, 화친책을 올리고 호족을 관중에 옮기게 했다. 숙손통(叔孫通)은 진나라 박사로 이세 앞에서 "작은 도적일 뿐"이라 아첨해 상을 받고 달아났다. 한왕에게는 초풍 옷을 입어 환심을 얻었고, 노 유생들과 조회 의식을 정해 고제가 "황제의 귀함을 알았다"고 말하게 했다. 태자 폐립은 진 헌공·부소의 예로 간했다. 태사공은 유경의 유세와 숙손통의 변화를 칭찬했다.
계포·난포열전 (季布欒布列傳)
계포(季布)는 초나라 협객으로 항적의 장수가 되어 한왕을 자주 괴롭혔고, 항우가 망하자 고조가 천금을 걸고 숨겨 주면 삼족을 멸한다 했다. 복양 주씨(周氏)가 그를 머리 깎고 칼 씌운 노예로 꾸며 노(魯)의 주가(朱家)에게 팔았고, 주가가 등공을 설득해 사면되어 낭중이 되었다. 혜제 때 흉노 선우가 여후에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자 번쾌가 10만으로 치겠다 했으나, 계포는 번쾌를 베어야 한다며 고제도 40만으로 평성에서 곤란했다 하여 논의를 멈추었다. 문제 때 어사대부로 불렸다가 한 달 만에 돌려보내지자 한 사람의 칭찬과 비방으로 쓰고 버리면 천하가 본다고 하여 문제를 부끄럽게 했다. '황금 백 근보다 계포의 승낙 하나'라는 초 속담이 퍼졌다. 동생 정공(丁公)은 팽성에서 고조를 놓아 주었으나 항우가 망한 뒤 불충하다 하여 베어졌다. 난포(欒布)는 양나라 사람으로 가난할 때 사귄 팽월이 속량해 주었고, 팽월이 모반으로 삼족이 멸하고 머리가 낙양에 걸리자 곡하며 제사했다. 고조가 삶으려 하자 팽월의 공을 말하고 공신들이 불안해할 것이라 하여 풀려나 도위가 되었고, 훗날 연상이 되자 연·제에 난공사가 세워졌다.
원앙·조조열전 (袁盎鼂錯列傳) 원앙(袁盎)은 문제 때 거만한 주발(周勃)을 "공신일 뿐 사직신이 아니다"라며 눌렀고, 훗날 주발이 모반으로 고발되자 홀로 무죄를 밝혔다. 문제가 비탈로 달리려 하자 "천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고 말렸다. 조조(鼂錯)는 형명을 배워 태자의 "지낭(智囊)"이라 불렸고, 제후 땅을 깎자 그의 아버지가 독을 마시고 죽었으며 열흘 뒤 7국이 반했다. 원앙은 "조조를 베어 사과하면 군사가 물러난다"고 했고 조조는 동시에서 참수되었지만 오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원앙은 후에 양왕이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 태사공은 "옛것을 바꾸고 상도를 어지럽히면 죽지 않으면 망한다"고 평했다.
장석지·풍당열전 (張釋之馮唐列傳) 장석지(張釋之)는 원앙의 천거로 알자가 되었고, 색부(嗇夫)를 상림령에 올리려는 문제를 말재주보다 장자를 쓰라며 막았다. 태자와 양왕이 사마문에서 내리지 않자 불경죄로 탄핵했고, 정위가 되어서는 어가 말을 놀라게 한 자를 벌금형으로 판결하며 "법은 천자와 천하가 함께 지키는 것"이라 했다. 고조 묘 옥환을 훔친 자는 법대로 처벌하게 했다. 경제 즉위 뒤에는 왕생(王生)의 계책으로 사죄했다. 풍당(馮唐)은 염파·이목을 부러워하는 문제에게 "있어도 쓰지 못하실 것"이라 하고, 운중수 위상(魏尚)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말해 복직시켰다. 태사공은 두 사람의 말을 "불편불당"에 비겼다.
만석·장숙열전 (萬石張叔列傳) 만석군 석분(石奮)은 15세에 고조의 소리가 되었고, 네 아들이 모두 2천 석이 되자 경제가 만석군이라 불렀다. 그는 궁문에서 종종걸음을 쳤고 자손의 잘못은 꾸짖지 않고 밥을 끊어 스스로 사죄하게 했다. 아들 석건(石建)은 글자의 획이 하나 모자란 것에 두려워했고, 석경(石慶)은 승상이 되었으나 능력이 없었다. 위관(衛綰)은 장자로 칭송받아 승상이 되었으나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직불의(直不疑)는 동료의 금을 대신 갚았고 "형수와 간통했다"는 비방에 "나는 형이 없다"고만 답했다. 장숙(張叔)은 옥사를 올릴 때 눈물을 흘렸다. 태사공은 이들을 "말은 어눌하되 행동은 민첩하다"는 말에 비겼다.
전숙열전 (田叔列傳) 전숙(田叔)은 조나라 사람으로 황로술을 배워 조왕 장오(張敖)의 낭중이 되었다. 조왕이 고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자 맹서(孟舒) 등과 머리를 깎고 칼을 쓴 채 따라가 장안에 갔고, 풀려난 뒤 군수·제후상에 임명되었다. 문제 앞에서는 병사를 잃은 맹서를 장자라 변호해 복직시켰다. 경제 때 양효왕이 원앙을 죽인 사건은 "불문에 부치시라"고 보고했고, 노상(魯相)으로 가서는 왕의 재물을 소송한 백성을 매질하되 왕에게 보상하게 했다. 아들 전인(田仁)은 태자의 난에 태자를 놓았다 하여 주살되었다. 뒷부분은 저선생이 보충한 임안과 전인의 이야기이며, 태사공은 전숙을 공자 말에 비겼다.
편작·창공열전 (扁鵲倉公列傳) 편작(扁鵲)은 정(鄭) 사람 진월인(秦越人)으로, 장상군(長桑君)이 준 약을 상지수에 30일 타 마시고 사람의 오장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조간자(趙簡子)가 인사불성일 때 곧 깨어난다고 예측했고, 죽은 괵(虢) 태자를 시궐로 진단해 일으켰으며, 제 환후에게는 병이 깊어짐을 일렀으나 믿지 않아 환후는 죽었다. 이혜(李醯)가 시기해 자객을 보내 그를 죽였다. 창공 순우의(淳于意)는 양경(陽慶)에게 맥서를 받아 생사를 진단했고, 형벌을 받게 되자 딸 제영(緹縈)의 상서로 풀려나 육형이 폐지되었다. 그가 올린 진료기록 스물다섯 건가량이 이어진다. 태사공은 편작이 재주로 화를 입었다고 평했다.
오왕비열전 (吳王濞列傳) 오왕 비(濞)는 고제 형 유중의 아들로, 경포 토벌에 공을 세워 오왕이 되었다. 고제는 "50년 뒤 동남에 난이 있으면 너 아니냐"며 경계했다. 오 태자가 황태자와 박 놀이 중 맞아 죽은 뒤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았고, 돈과 소금으로 부유해졌다. 조조(晁錯)가 봉지를 깎자 교서왕 등과 연합해 경제 3년 광릉에서 거병했다. 원앙의 사과책으로 조조가 처형됐으나 오왕은 "나는 이미 동제(東帝)"라며 물러서지 않았고, 주아부(周亞夫)가 창읍에 방벽을 쌓아 양도를 끊자 오군은 양식이 끊겨 패했다. 오왕은 동월에서 피살되었고 교서왕과 조왕도 자살했다. 태사공은 화근이 아들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위기무안후열전 (魏其武安侯列傳) 위기후 두영(竇嬰)은 오초 난 때 대장군이 되어 형양을 지켰으나 두태후가 죽자 세력을 잃었고, 곁에는 관부(灌夫)만 남았다. 무안후 전분(田蚡)은 왕태후의 동생으로 승상이 되어 권세가 극에 달했다. 전분이 두영의 밭을 요구했다 거절당해 원한을 품었고, 혼례 잔치에서 술에 취한 관부가 욕한 일로 불경죄로 탄핵해 일족을 잡아들였다. 두영이 경제의 유조를 내세워 구하려 했으나 사본이 없어 조서 위조로 몰렸다. 관부는 멸족하고 두영도 위성에서 기시되었으며, 전분도 그해 병들어 죽었다. 태사공은 두영은 시세를 몰랐고 관부는 불손했으며 전분은 권세를 믿었다고 평했다.
한장유열전 (韓長孺列傳) 한안국(韓安國)은 양효왕의 중대부로 오초 반란 때 동쪽 경계를 막아 이름을 얻었고, 대장공주에게 눈물로 호소해 태후와 경제의 마음을 풀었다. 옥리 전갑(田甲)에게 "죽은 재도 다시 타지 않겠느냐"는 모욕을 당했으나 훗날 양 내사가 되자 그를 용서했다. 전분에게 오백 금을 보내 천거를 얻어 어사대부가 되었고, 흉노 화친 논의에서는 왕회(王恢)의 반대에도 화친을 주장했다. 마읍 매복 작전은 단우가 눈치채 실패했고 왕회는 자살했다. 안국은 어진 이를 추천했으나 재물도 탐했다고 평가된다. 승상이 되지 못했고 어양에서 흉노에 패해 질책을 받은 뒤 근심하다 원삭 2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장군열전 (李將軍列傳)
이광(李廣)은 농서 성기 사람으로 문제 14년 흉노가 소관에 쳐들어오자 종군해 활솜씨로 중랑이 되었고, 문제는 고조 때였다면 만호후도 대단치 않았을 것이라 아까워했다. 상군 태수 때 백 기로 흉노 셋을 쫓아 둘을 쏘아 죽이고 하나를 사로잡았으며, 수천 기병과 마주치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고 누워 흉노를 물러나게 했다. 무제 때 안문에서 패해 생포되었으나 죽은 척하다 흉노 아이의 말을 빼앗아 탈출했고, 속전으로 서인이 되었다. 우북평 태수로 있을 때 흉노는 그를 '한의 비장군'이라 부르며 몇 해 피했다. 그는 상을 부하와 나누어 이천석 40여 년에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고, 병사가 물을 다 마시기 전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여러 번 출전했으나 공이 없었고, 농서 태수 때 항복한 강인 800여 명을 속여 죽인 일을 가장 큰 화로 꼽았다. 원수 4년 대장군 위청을 따라 나섰으나 동쪽 길로 돌려져 길을 잃었고, 문책을 받자 예순이 넘어 도필리를 다시 대할 수 없다며 스스로 목을 쳤다. 온 군과 백성이 울었다. 손자 이릉은 5천 보병으로 선우 8만에 포위되어 항복했고 한은 그 일족을 멸했다.
흉노열전 (匈奴列傳)
흉노(匈奴)는 하후씨의 후예 순유(淳維)에서 나왔다고 하며, 가축을 따라 이동하고 성곽·문서 없이 말로 약속하며, 이로우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나 도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본문은 주 태왕·목왕·유왕, 진 목공이 유여를 얻은 일,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 몽염의 북벌과 장성까지 중원과의 관계를 서술한다. 진 말 선우 두만(頭曼)의 태자 묵돌(冒頓)이 월지에 인질로 갔다가 도망해 만기를 거느렸고, 명적을 따라 쏘도록 훈련해 아버지를 쏘아 죽이고 선우가 되었다. 동호가 천리마와 연지를 요구하자 주었으나 땅을 요구하자 '땅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동호를 멸했고, 활 쏘는 병사 30여만을 거느렸다. 고조는 평성 백등산에서 7일 포위되었다가 연지에게 뇌물을 보내 풀려났고 유경이 공주를 보내는 화친을 맺었다. 환관 중행열(中行說)은 항복해 선우를 도우며 한의 옷·음식을 따르지 말라 가르쳤다. 문제 14년 14만 기가 소관에 침입했다. 무제 때 마읍 매복 작전이 실패해 화친이 끊겼고, 위청이 하남을 취해 삭방을 쌓았으며, 곽거병이 기련산에서 이기고 혼야왕이 항복했다. 원수 4년 대원정 뒤 이광리의 투항까지 서술하며, 태사공은 장상을 가려 임용함에 달렸다고 한다.
위장군표기열전 (衛將軍驃騎列傳)
대장군 위청(衛青)은 평양 사람으로 평양후 집 시첩 위온의 아들이며, 어려서 양을 치고 이복형제에게 노비 취급을 받았다. 누나 위자부가 입궁하자 황후 일가가 그를 잡아 죽이려 했으나 친구 공손오가 구했다. 원삭 원년경 용성에서 수백을 베었고, 하남을 취해 삭방군을 두어 장평후가 되었다. 원삭 5년 6장군을 지휘해 밤에 우현왕을 포위, 1만5천을 얻어 대장군이 되었으며 강보의 세 아들까지 봉해졌다. 원삭 6년 정양 출전에서 조신이 흉노에 항복하고 소건은 속전으로 서인이 되었는데, 위청은 장수를 직접 베지 않겠다며 천자에게 맡겼다. 조카 곽거병(霍去病)은 18세에 800기로 2,028명을 베어 관군후가 되었다. 원수 2년 표기장군으로 언지산·기련산을 쳐 3만여를 베었고 혼야왕의 항복으로 하서를 얻었다. 원수 4년 위청과 곽거병이 각 5만 기로 막북에 나가 선우가 달아났고, 이광은 길을 잃어 자결했으며, 곽거병은 7만여를 베고 낭거서산에서 봉했다. 말 14만 필 중 돌아온 것은 3만 필이 안 되었다. 곽거병은 3년 뒤, 위청은 14년 뒤 죽었고 위씨는 24년 만에 5후가 박탈되었다.
평진후주보열전 (平津侯主父列傳) 공손홍(公孫弘)은 옥리 출신으로 가난하게 돼지를 치다 60세에 현량으로 발탁되었고, 검소함과 상의 뜻을 따르는 처신으로 총애받아 승상 평진후에 올랐다. 급암(汲黯)이 그를 위선이라 탄핵해도 사죄로 받아넘겼다. 본문은 그가 겉은 너그럽고 속은 깊어 틈이 있던 자에게 몰래 앙갚음했다고 한다. 주보언(主父偃)은 상서 하루 만에 부름을 받아 추은령으로 제후를 약화시켰으나 "오정식을 못 하면 오정팽을 당할 뿐"이라 하며 횡포를 부리다 공손홍의 주장으로 멸족되었고, 시신은 공거(孔車) 한 사람만 거두었다.
남월열전 (南越列傳) 위타(尉佗)는 진의 남해 용천령으로, 남해위 임효(任囂)의 부탁을 받아 진이 망하자 계림·상군을 합쳐 남월 무왕이 되었다. 한 고조 때 육가(陸賈)가 와서 왕으로 인정했고, 문제 때 다시 온 육가에게 사죄하며 제호를 버렸으나 나라 안에서는 예전 칭호를 썼다. 손자 호와 영제를 거쳐 흥이 즉위하자 모후 규태후가 내속을 청했으나, 승상 여가(呂嘉)가 왕과 태후와 한 사자를 죽이고 반란했다. 한의 노박덕과 양복이 번우를 함락해 남월은 9군이 되었고, 5세 93년 만에 망했다.
동월열전 (東越列傳) 민월왕 무제(無諸)와 동해왕 요(搖)는 월왕 구천의 후예로, 진을 멸하는 데 가담해 한에서 각각 왕으로 세워졌다. 민월이 동구를 포위하자 무제가 장조(莊助)를 보내 구원했고, 동구는 강회 사이로 옮겼다. 민월이 남월을 공격하자 한이 출병했고, 동생 여선(餘善)이 영(郢)을 죽여 머리를 바쳤다. 여선은 한이 동월왕으로 인정했으나 남월 반란 때 양다리를 걸치다 결국 반해 "무제" 새를 새기고 한의 교위들을 죽였다. 한이 4로로 쳐서 여선은 부하들에게 죽었고, 천자는 백성을 강회 사이로 옮겨 동월 땅은 비었다.
조선열전 (朝鮮列傳) 조선왕 만(滿)은 연 사람으로, 연왕 노관이 흉노로 달아날 때 천여 명과 동쪽으로 가 패수를 건너 왕험에 도읍했다. 손자 우거(右渠) 때 한의 사자 섭하(涉何)가 조선 비왕 장(長)을 죽이고 공을 꾸며 보고해 도위가 되었으나 조선이 그를 죽였다. 한은 누선장군 양복(楊僕)과 좌장군 순체(荀彘)를 보냈는데 둘이 불화했다. 원봉 3년 니계상 삼 등이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4군이 되었다. 순체는 공을 다투다 기시되고 양복은 속전으로 서인이 되었다. 태사공은 우거가 지세를 믿다 망했다고 정리한다.
서남이열전 (西南夷列傳) 서남이에는 야랑(夜郞)과 전(滇), 공도 등이 있으며, 초 위왕 때 장교(莊蹻)가 전지에 이르렀다가 길이 막혀 전왕이 되었다. 건원 연간 당몽(唐蒙)이 남월에서 촉의 구장을 먹는 것을 보고 야랑을 통해 월을 제압하자고 상서해 건위군을 두고 길을 닦았으나, 사졸이 굶고 죽어 공손홍의 말에 따라 대부분 철회했다. 장건이 대하에서 촉 물건을 보고 서쪽 길을 찾았고, 전왕은 한 사자에게 "한과 우리 중 어느 쪽이 크냐"고 물었다. 남월 격파 뒤 서이는 군이 되었고 전왕은 항복해 왕인을 받았다. 야랑과 전만 왕인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상여열전 (司馬相如列傳)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촉군 성도 사람으로 어려서 책과 검을 익혔고 인상여를 흠모해 이름을 바꿨다. 경제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아 양효왕에게 가서 〈자허부〉를 지었고, 효왕이 죽자 돌아와 가난했다. 임공령 왕길을 찾아가 부자 탁왕손의 과부 딸 문군(文君)을 거문고로 마음을 건드려 밤에 도망쳐 아내로 삼았고, 문군이 술집을 열고 상여가 그릇을 씻자 탁왕손이 부끄러워 노비 백 명과 돈 백만을 나눠 주었다. 양득의가 황제에게 상여를 말해 〈천자유렵부〉를 바치고 낭이 되었다. 당몽이 야랑 길을 열며 파촉 백성을 놀라게 하자 격문으로 달랬고, 중랑장으로 부절을 들고 서이를 정리해 영관도를 통하고 손수에 다리를 놓았다. 촉 노인들의 비난에는 〈난촉부로〉로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다고 답했다. 뇌물을 받았다는 상서로 면직되었다가 복직했다. 말을 더듬고 소갈병이 있었으며, 〈대인부〉를 올려 무제에게 구름을 능가하는 기운이라는 평을 받았다. 죽은 뒤 무제가 사자를 보내 책을 구하자 아내가 남긴 봉선에 관한 글을 바쳤다. 태사공은 허황한 말이 많으나 요지는 절검에 귀착한다고 평했다.
회남형산열전 (淮南衡山列傳) 회남 여왕 장(長)은 고조의 막내아들로, 어머니가 조왕 장오의 일로 갇혀 자살한 일을 원망해 문제 때 벽양후를 철추로 쳐 죽였다. 이후 교만해져 천자 흉내를 내다 모반이 발각되어 촉으로 호송되던 중 단식해 죽었다. 그 아들 회남왕 안(安)은 독서를 좋아하고 명성이 높았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원망해 오피(伍被)의 간언을 물리치고 반란을 준비했다. 손자 건의 고발과 오피의 자수로 전모가 드러나 안은 자결했고 일족은 멸족되어 국은 군이 되었다. 형산왕 사(賜)도 모반을 꾀하다 자결했다.
순리열전 (循吏列傳) 순리열전은 법령과 형벌이 아니라 직분을 받들고 이치를 따르는 다스림을 말하며 다섯 사람을 싣는다. 초의 손숙오(孫叔敖)는 3개월 만에 재상이 되어 가르침으로 백성을 이끌었고 화폐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정의 자산(子産)은 5년 만에 풍속이 바로잡혔고 죽자 백성이 통곡했다. 노의 공의휴(公儀休)는 생선 선물을 거절하고 자기 집 아욱과 베틀을 치워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초의 석사(石奢)는 살인자인 아버지를 풀어주고 스스로 자결했고, 진의 이리(李離)는 오판으로 사람을 죽이자 책임을 지고 죽었다.
급정열전 (汲鄭列傳) 급암(汲黯)은 복양 사람으로 7대째 경대부 집안이며, 하남 수해 때 부절로 곡식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도 무제가 어질다 하여 풀려났다. 거만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승상 전분에게도 절하지 않았고, 무제 면전에서 "내심은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푼다"고 해 무제를 노하게 했다. 장탕과 공손홍을 아첨꾼이라 했고, 혼야왕 일로 상인들을 죽이는 것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회양태수로 가서 7년 뒤 죽었다. 정당시(鄭當時)는 협기 있고 선비를 잘 추천했다. 태사공은 두 사람이 권세를 잃자 빈객이 끊긴 일을 슬퍼한다.
유림열전 (儒林列傳) 태사공은 학관의 길이 넓어진 대목에서 책을 덮고 탄식했다며 시작한다. 공자 사후 제자들이 흩어졌고 진의 분서로 육예가 결손되었으며, 한 초에는 유자가 쓰이지 않다가 무제 때 전분과 공손홍이 유학을 일으켰다. 신공(申公)은 《시》를 훈고로만 가르쳤고, 원고생(轅固生)은 두태후가 《노자》를 두둔하자 맞서 돼지우리에 들어가는 벌을 받았다. 복생(伏生)은 분서 때 《상서》를 벽에 숨겨 29편을 전했고, 동중서(董仲舒)는 《춘추》에 밝았으나 재이를 논한 글이 주보언에게 훔쳐져 죽을 뻔하고 공손홍의 모함으로 교서왕 상이 되었다.
혹리열전 (酷吏列傳)
서문에서 태사공은 법령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맑고 흐림의 근원이 아니며 관건은 덕에 있다고 하고, 혹리 열 사람을 싣는다. 질도(郅都)는 경제 때 직간하고 제남 간씨 삼백여 집을 족멸했으며 중위로서 종실이 '창응(蒼鷹)'이라 불렀으나, 두태후가 법으로 엮어 참수했다. 영성은 아랫사람을 젖은 땔나무 묶듯 다뤘고 '젖먹이 호랑이를 볼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은 만나지 말라'는 말이 났다. 조우와 장탕(張湯)은 율령을 정해 견지법을 만들었고, 장탕은 어려서 쥐를 재판한 일화에서 출발해 정위·어사대부가 되었다. 황제의 뜻에 맞춰 옥사를 다루고 회남·형산 반란 옥사를 끝까지 파헤쳤으며, 백금과 오수전, 염철 독점, 고민령으로 국용을 댔다. 박사 적산이 화친을 말하자 장새에 보내 한 달 남짓에 목이 베이게 했다. 결국 세 장사의 모함으로 자살했고 가산은 오백 금을 넘지 않았다. 의종은 정양에서 하루 사백여 명을 죽였고, 왕온서(王溫舒)는 하내에서 호활 천여 가를 연좌해 피가 십여 리 흘렀으며 겨울을 한 달 늘렸으면 했다. 온서를 본받은 이천석들 때문에 도적이 늘자 침명법이 만들어졌으나 소리가 보고를 숨겨 더 늘었다. 두주(杜周)가 정위일 때 조옥 연루자가 6-7만이었다.
대완열전 (大宛列傳)
대완의 일은 장건(張騫)에서 비롯한다. 건원 중 낭이던 장건은 흉노가 깨뜨린 월지와 함께 흉노를 칠 사신을 구한다는 말에 응해 감보와 농서를 나섰다가 흉노에 십여 년 억류되었고, 아내와 자식까지 얻었으나 한의 부절을 잃지 않았다. 탈출해 대완을 거쳐 대월지에 갔으나 월지는 안락해 보복할 뜻이 없었고, 돌아오다 다시 잡혔다가 흉노 내란을 틈타 귀국했다. 백여 명으로 떠나 13년 뒤 둘만 돌아왔다. 그는 대완·오손·강거·안식·조지·대하의 사정을 보고했고, 대하에서 본 공죽장과 촉포로 신독을 거쳐 촉에서 길을 열자 청했으나 저·작·곤명에 막혔다. 박망후가 되었다가 기한을 어겨 속전으로 서인이 되었고, 오손 연합책으로 오손에 갔으나 요령을 얻지 못했다. 그가 부사를 여러 나라에 보낸 뒤 사신이 오가기 시작했고 사신은 모두 박망후를 일컬었다. 사신 소종이 이사성의 좋은 말을 청했으나 대완이 거절하고 사신을 죽이자, 이광리(李廣利)가 이사장군으로 나섰다. 1차 원정은 욱성에서 패해 돌아온 자가 열에 한둘이었고, 2차에 대완성을 40여 일 포위해 왕 무과의 머리를 받고 선마 수십 필, 중하 마 3천여 필을 얻었다. 통틀어 4년이었다. 태사공은 《山海經》의 괴물은 말하지 않겠다고 한다.
유협열전 (游俠列傳)
한비자는 유자와 협객을 모두 비판했으나, 태사공은 유협이 말은 반드시 믿고 행동은 반드시 결행하며 허락한 바를 성실히 지키고 곤액에 달려가는 점을 칭찬할 만하다고 한다. '허리띠 고리를 훔치면 죽고 나라를 훔치면 제후가 된다'는 속담으로 인의가 권세 쪽에 있음을 꼬집는다. 한 이래 주가(朱家)·전중·극맹·곽해를 들며, 붕당을 지어 약자를 짓밟는 호폭은 협객도 수치로 여겼다고 구분한다. 노의 주가는 숨겨 살린 호걸이 수백이었으나 집에 여재가 없었고, 계포를 구하고도 그가 귀해진 뒤 만나지 않았다. 극맹은 어머니 상에 조문 수레가 천 대였으나 죽자 십 금도 남지 않았다. 곽해(郭解)는 젊어 살인과 도굴을 일삼다 나이 들어 덕으로 원한을 갚았다. 조카가 죽자 도적을 놓아주고 조카를 탓했으며, 무릉으로 이주 대상이 되자 위장군이 가난해서 안 맞는다고 말하니 황제는 포의의 권세가 장군에게 말하게 했으니 가난하지 않다 했다. 그가 모르는 사이 객이 그를 비난한 유생을 죽이고 혀를 잘랐으나, 어사대부 공손홍이 대역무도라 의논해 일족이 멸해졌다. 태사공은 곽해의 외모와 말이 보잘것없는데도 천하가 그 명성을 흠모한다며 애석해했다.
영행열전 (佞幸列傳) 영행열전은 벼슬 잘하는 것은 임금에게 맞는 것만 못하다는 속담으로 시작하며, 고조의 적유와 혜제의 굉유처럼 재능 없이 아첨으로 총애받은 자들을 든다. 문제의 등통(鄧通)은 꿈에 자신을 밀어 올려 준 황두랑과 닮아 총애를 얻었고 구리산을 받아 돈을 찍었으나, 문제의 종기를 빨아 준 일로 태자의 원망을 사 경제 때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의 집에서 굶어 죽었다. 한언(韓嫣)은 강도왕을 놀라게 한 일로 태후의 미움을 사 죽음을 받았다. 이연년(李延年)은 누이 덕에 귀했다가 누이가 죽자 형제가 주살되었다.
골계열전 (滑稽列傳) 골계열전은 웃음 섞인 말로 풍간한 사람들을 싣는다. 제의 순우곤(淳于髡)은 큰 새 은어로 위왕을 깨우쳐 정사를 바로잡게 했고, 조에 구원을 청해 초군을 물렸으며, "술이 극에 이르면 어지럽다"며 밤샘 술을 말렸다. 초의 우맹(優孟)은 말을 대부의 예로 장사지내려는 장왕을 풍자해 말려 놓았고, 손숙오 흉내로 그의 아들이 봉지를 받게 했다. 진의 우전(優旃)은 병사들의 교대와 동산 확장 중지를 이끌어 냈다. 뒤에 저선생이 동방삭과 서문표 등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일자열전 (日者列傳) 태사공은 예로부터 왕이 된 자가 복서로 천명을 정했다며, 장안 동시에서 점을 치던 초인 사마계주(司馬季主)를 소개한다. 중대부 송충(宋忠)과 박사 가의(賈誼)가 그를 찾아와 복서는 천한 일이 아니냐고 묻자, 계주는 오히려 지금의 현자라는 자들이 아첨과 이익을 좇는 "창과 활을 들지 않은 도적"이라 몰아붙였다. 복서는 천지를 본받고 인의를 따르니 선왕도 먼저 점쳤다고 하자, 두 사람은 말을 잃고 물러나 탄식했다. 송충은 후에 죄를 받았고 가의는 양회왕 태부로 있다 한을 품고 죽었다. 저선생이 이를 보충한다.
귀책열전 (龜策列傳) 태사공은 성왕이 건국할 때 복서를 귀히 여겼고 무제 때 복관이 크게 늘어 폐해도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하는 저선생이 태복관에서 옮겨 적은 보충이라 한다. 신귀의 이름과 여강군에서 바치는 거북 이야기에 이어, 송 원왕 때 어부 예차(豫且)가 강이 하에 보낸 신귀를 잡은 일이 길게 나온다. 원왕이 꿈에서 도움을 청한 거북을 놓아주려 하자 박사 위평(衛平)은 이 거북을 얻는 자가 천자라며 말렸고, 왕은 받아들여 점쳤다. 끝에는 거북점의 징조 판정이 길게 나열되는데 일부는 글자가 어그러져 해독이 불확실하다.
화식열전 (貨殖列傳)
태사공은 노자의 이웃 나라와 오가지 않는 이상을 인용하며, 소리·색·맛과 영화를 좇는 습속은 바꿀 수 없으니 가장 좋은 정치는 그것에 따르는 것이라 한다. 산서·산동·강남·북방의 물산을 들고 농·산림·공·상이 의식의 근원이라 한다. 태공망이 영구에 봉해져 어염을 통하게 해 제가 부강해졌고, 관중이 경중구부를 두었다. 월왕 구천은 범려와 계연을 써 10년에 월이 부유해졌고, 범려는 도(陶)에서 도주공이 되어 19년에 세 번 천금을 이루고 두 번 나눠 주었다. 자공은 조·노 사이에서 매매해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유했고, 백규는 때를 보아 '남이 버리면 내가 취한다'고 했다. 오씨 라(烏氏倮)와 파의 과부 청(清)도 부로 이름을 얻었다. 한이 관량을 열자 부상대고가 천하를 다녔고, 관중·파촉·제·노·초월 등 지역별 풍속을 서술했다. '천하가 오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며 작위 없이 봉군처럼 사는 이를 소봉(素封)이라 했고, 가난에서 부로 가려면 농은 공만 못하고 공은 상만 못하다고 한다. 촉 탁씨와 완 공씨 같은 철 부호와 도간·사사·임씨 사례를 들고, 부는 일정한 업이 없고 능한 자에게 모인다고 맺는다.
태사공자서 (太史公自序)
사마씨는 전욱 때 천지를 맡은 중려의 후예로 주의 사관을 대대로 맡다 흩어졌고, 진의 사마착, 사마근 등이 이어져 담(談)이 태사공이 되었다. 담은 육가(음양·유·묵·명·법·도덕)의 요지를 논해 도가를 높이 평가했다. 아들 천(遷)은 용문에서 태어나 열 살에 고문을 외웠고, 스무 살에 강·회와 회계산, 제·노를 유람했으며 낭중이 되어 파촉 이남에 사신 갔다. 한이 봉선을 거행할 때 담은 따르지 못해 분하여 죽게 되자, 천의 손을 잡고 태사가 되어 논저하려던 바를 잊지 말라 했다. 천은 눈물로 구문을 빠뜨리지 않겠다고 했고, 3년 뒤 태사령이 되어 석실금궤의 책을 엮었다. 호수(壺遂)가 공자는 왜 춘추를 지었느냐 묻자 동중서의 말로 답하고, 자신은 옛일을 서술할 뿐 짓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 뒤 이릉의 화로 옥에 갇혀 '이는 내 죄'라 탄식했고, 서백·공자·굴원·손자·한비 등이 발분해 저술한 일을 들어 지난 일을 서술하고 미래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어 십이본기·십표·팔서·삼십세가·칠십열전의 서문이 이어지고, 합 130편 52만 6천 5백 자로 '태사공서'를 이루었다 하며 명산에 감추고 부본은 경사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목별로 읽기
1. 다섯 갈래의 구성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모두 130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기가 제왕의 시간을 세우고, 표가 그 시간 위에 제후와 공신을 놓고, 서가 제도와 문물을 주제별로 정리하며, 세가와 열전이 사람의 삶을 채웁니다. 연대기 하나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다섯 갈래로 나누어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한 사건이 여러 편에 걸쳐 다른 얼굴로 나타나기도 해서, 같은 전쟁을 항우본기와 고조본기, 회음후열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편에서 저자는 이 책이 어떻게 놓일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藏之名山,副在京師,俟後世聖人君子
(장지명산, 부재경사, 사후세성인군자)
명산에 감추고 부본은 서울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를 기다린다.
이 책이 당대보다 후세의 독자를 향해 쓰였다는 선언입니다.
2. 발분하여 쓴 책
마지막 편 태사공자서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으로 태사의 일을 이은 사마천은 이릉의 화로 옥에 갇히고, 그때의 탄식이 책에 남아 있습니다.
是余之罪也夫
(시여지죄야부)
이것이 내 죄로구나.
그는 서백과 공자, 굴원, 손자, 한비 같은 사람들이 막힌 처지에서 발분하여 저술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지난 일을 서술하고 앞날을 생각하기로 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통에서 나온 글이라는 점이 책 전체의 숨결을 이룹니다.
3. 선양과 치수
오제본기에서 요는 아들이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순에게 천하를 넘깁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終不以天下之病而利一人
(종불이천하지병이리일인)
끝내 천하가 병드는 것으로 한 사람을 이롭게 하지는 않겠다.
하본기의 우는 13년 동안 밖에서 홍수를 다스리며 이런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過家門不敢入
(과가문불감입)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천하를 모두의 것으로 보는 이상이 책의 첫머리에 놓여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4. 백성의 입과 진의 멸망
주본기에서 소공은 비방을 억누르려는 여왕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防民之口,甚於防水
(방민지구, 심어방수)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심하다.
진시황본기는 법과 권력의 극단을 보여 줍니다. 이사가 분서를 건의하며 내세운 규정은 이것이었습니다.
以古非今者族
(이고비금자족)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멸족한다.
그리고 가의는 진이 망한 이유를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인의불시이공수지세이야)
인의를 베풀지 않으니 공격하는 형세와 지키는 형세가 달라졌다.
천하를 얻는 일과 지키는 일은 다르다는 이 말은 이후의 왕조 이야기에도 겹쳐 읽힙니다.
5.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은 같은 장면을 보고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시황의 행렬을 본 항적은 이렇게 말합니다.
彼可取而代也
(피가취이대야)
저 자리는 빼앗아 대신할 수 있다.
함양에서 같은 행렬을 본 유계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嗟乎,大丈夫當如此也
(차호, 대장부당여차야)
아,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오강에서 정장이 강동으로 건너길 권하자 항우는 이렇게 답하고, 그 선택이 그의 마지막이 됩니다.
天之亡我,我何渡為
(천지망아, 아하도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가 건너서 무엇 하겠는가.
천하를 얻은 고조는 고향 패에서 축을 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바람이 일어나 구름이 날아오른다.
승자와 패자를 모두 사람으로 그리는 이 대비가 이 책의 특징입니다.
6. 평민의 반란: 진섭
공자가 세가에 오른 것처럼 평민 출신 진섭도 세가에 올라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시선을 보여 줍니다. 젊은 진섭은 비웃는 동료에게 이렇게 탄식합니다.
燕雀安知鴻鵠之志哉
(연작안지홍곡지지재)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
이 구절에서 홍곡지지(鴻鵠之志)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수졸들을 선동할 때 그가 외친 말은 이것입니다.
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영유종호)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에게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출신보다 시세가 사람을 만든다는 이 외침은 반란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7. 공자와 백이
공자세가의 공자는 위기 속에서도 담담합니다. 송에서 환퇴가 나무를 뽑고 죽이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天生德於予,桓魋其如予何
(천생덕어여, 환퇴기여여하)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공자는 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後世知丘者以春秋,而罪丘者亦以春秋
(후세지구자이춘추, 이죄구자역이춘추)
후세에 나를 아는 자도 『춘추』 때문일 것이고, 나를 탓하는 자도 『춘추』 때문일 것이다.
열전의 첫 편 백이열전은 선한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을 묻습니다. 공자의 말로 백이와 숙제가 원망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합니다.
求仁得仁,又何怨乎
(구인득인, 우하원호)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사마천의 논평은 이렇습니다.
舉世混濁,清士乃見
(거세혼탁, 청사내현)
온 세상이 혼탁할 때 맑은 선비가 드러난다.
8. 말로 시대를 흔든 사람들
소진과 장의, 상앙은 말과 법으로 나라를 움직인 사람들입니다. 소진은 한 선왕을 설득하며 속담을 인용합니다. 계구우후(鷄口牛後)로 알려진 말입니다.
寧為雞口,無為牛後
(영위계구, 무위우후)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
낙양으로 돌아와 형수에게 건넨 말에는 인간사의 씁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何前倨而後恭也
(하전거이후공야)
어찌 전에는 거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하십니까.
장의는 매를 맞은 뒤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視吾舌尚在不
(시오설상재부)
내 혀가 아직 있는지 보시오.
상앙은 태자가 법을 어기자 이렇게 말하며 법의 엄격함을 세웠으나, 결국 자신이 만든 법에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法之不行,自上犯之
(법지불행, 자상범지)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9. 의리와 목숨: 염파, 계포, 예양, 형가
염파와 인상여 열전은 불화가 화해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사죄한 염파와 인상여는 이렇게 관계를 맺습니다.
卒相與驩,爲刎頸之交
(졸상여환, 위문경지교)
마침내 서로 기뻐하며 목을 베어 줄 수 있는 벗이 되었다.
염파가 가시나무를 지고 사죄한 일은 부형청죄(負荊請罪)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포열전에는 약속의 무게를 보여 주는 속담이 실려 있습니다. 후대에 일낙천금(一諾千金)으로 굳어진 말입니다.
不如得季布一諾
(불여득계포일낙)
계포의 승낙 한 번을 얻는 것만 못하다.
자객열전의 예양은 지백의 원수를 갚기로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士爲知己者死,女爲説己者容
(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뻐하는 이를 위해 몸단장한다.
형가가 역수에서 이별하며 부른 노래의 첫 구절은 책의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風蕭蕭兮易水寒
(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갑다.
10. 한신과 이사: 능력과 처신
회음후 한신은 고조가 자신은 몇 명을 거느릴 수 있느냐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臣多多而益善耳
(신다다이익선이)
신은 많을수록 더 좋을 뿐입니다.
여기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사열전은 능력 있는 사람의 자리를 다룹니다. 젊은 이사는 변소의 쥐와 창고의 쥐를 보고 이렇게 탄식합니다.
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
(인지현불초비여서의, 재소자처이)
사람이 어질거나 못난 것은 쥐와 같아서 어디에 처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가 진왕에게 올린 간축객서의 유명한 구절은 이것입니다.
太山不讓土壤,故能成其大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태산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 큼을 이루었다.
두 열전은 능력 있는 사람이 어디에 서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문제를 보여 줍니다.
11. 장량과 공신의 두려움
유후세가의 장량은 직접 싸우지 않고 계책으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고조의 평가는 이것입니다.
運籌策帷帳中,決勝千里外
(운주책유장중, 결승천리외)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한다.
진 궁에 머물려는 패공을 장량이 말리며 번쾌의 말을 빌려 한 충고는 이렇습니다.
忠言逆耳利於行,毒藥苦口利於病
(충언역이이어행, 독약고구이어병)
충언은 귀에 거슬려도 행함에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써도 병에 이롭다.
반면 한나라 건국 뒤에는 공신들의 불안이 이어집니다. 난포는 팽월의 처형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臣恐功臣人人自危也
(신공공신인인자위야)
신은 공신들이 모두 스스로 위태롭다고 여길까 두렵습니다.
12. 장군과 흉노
이광열전의 이광은 자결을 앞두고 부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且廣年六十餘矣,終不能復對刀筆之吏
(차광년육십여의, 종불능부대도필지리)
나 광은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니 끝내 다시 형리 앞에 서지 못하겠다.
사마천은 그에 대한 평을 속담으로 맺습니다.
桃李不言,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
복숭아와 자두나무는 말이 없어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난다.
흉노열전의 묵돌은 동호가 땅을 요구하자 허락을 말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
(지자, 국지본야, 내하여지)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그것을 주겠는가.
위장군표기열전의 곽거병은 무제가 저택을 하사하려 하자 이렇게 사양합니다.
匈奴未滅,無以家為也
(흉노미멸, 무이가위야)
흉노를 멸하지 못했는데 집을 어디에 쓰겠는가.
13. 혹리, 유협, 화식: 법과 의리와 돈
혹리열전에는 가혹한 관리들이 등장합니다. 영성에 대해 관동의 관리와 이졸들이 부른 말은 이것입니다.
寧見乳虎,無値寧成之怒
(영견유호, 무치영성지노)
차라리 젖먹이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은 만나지 말라.
유협열전은 법 밖의 사람들을 다룹니다. 사마천은 유협의 덕목을 이렇게 꼽습니다.
其言必信,其行必果,已諾必誠
(기언필신, 기행필과, 이낙필성)
말은 반드시 미덥고,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내며, 한 번 승낙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그리고 속담을 인용해 인의가 권세 쪽에 있다고 비꼽니다.
竊鉤者誅,竊國者侯
(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화식열전은 돈의 이야기입니다. 천하가 오가는 이유를 그는 이익으로 규정합니다.
天下熙熙,皆為利來;天下壤壤,皆為利往
(천하희희, 개위리래; 천하양양, 개위리왕)
천하 사람들이 화락하게 오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며, 천하 사람들이 어지러이 오가는 것도 모두 이익 때문이다.
백규가 시세를 보고 거래한 원칙은 이렇게 전합니다.
人棄我取,人取我與
(인기아취, 인취아여)
남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남이 취하면 나는 준다.
제왕만이 아니라 협객과 상인까지 한 책에 넣은 것이 『사기』의 폭을 보여 줍니다.
14. 이 책을 읽는 방법
130편을 처음부터 읽기보다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골라 읽는 편이 좋습니다. 항우본기, 고조본기, 회음후열전을 이어 읽으면 한 전쟁이 세 사람의 시점에서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공자세가와 백이열전, 노자한비열전으로는 사상가의 삶을 읽을 수 있고, 자객열전과 계포난포열전, 염파인상여열전은 의리와 약속의 이야기로 짧고 강렬합니다. 한 무제 시대의 관점으로는 이광과 흉노, 위장군표기, 대완열전을 읽고, 마지막으로 태사공자서로 저자의 뜻을 확인하면 책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표와 서는 줄거리 중심으로 읽기에는 건조하니 서문만 훑어보셔도 좋습니다.
이 글과 이어 읽을 책은 역사, 영웅전, 논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고전의 한 권 요점은 ReadGem 블로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