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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Gem · 한 권 요점

집필 시기 추정 기원후 1세기 말~2세기 초

Plutarch’s Lives

영웅전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 쉰 명을 짝지어 견준 전기, 역사가 아니라 삶을 쓰는 법

my design is not to write histories, but lives.

내가 쓰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삶이다.

Greece could not support a second Alcibiades.

그리스는 두 번째 알키비아데스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한눈에 보기

그리스 인물과 로마 인물을 한 쌍씩 짝지어 삶과 성격을 견주는 전기 50편.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건국 전설에서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브루투스, 안토니우스를 거쳐 갈바와 오토의 제국 초기까지, 전쟁과 정치의 인물들을 일화 중심으로 보여 준다. 인물별 줄거리와 열네 가지 대목으로 읽는다.

비슷한 책

한 권 요점

Plutarch’s Lives

『영웅전』은 플루타르코스가 쓴 책으로, 흔히 『대비열전』이라고도 불립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후 1세기 중반에서 2세기 초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 저술가로 알려져 있고,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 카이로네이아 출신입니다. 책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카이로네이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가 살던 때는 그리스가 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그는 두 세계를 모두 가까이 보며 그리스 인물과 로마 인물을 짝지어 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글은 존 드라이든이 이끈 영어 번역을 아서 휴 클러프가 고친 판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판에는 50편의 전기가 실려 있고, 대부분 그리스 인물 한 명과 로마 인물 한 명을 짝지은 뒤 마지막에 두 사람을 견주는 짧은 비교를 붙입니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리쿠르고스와 누마,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 같은 쌍이 대표적이고, 짝 없는 전기도 몇 편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전기에서 자신이 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삶이라고 밝히며, 성격은 큰 전투보다 사소한 말이나 농담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믿기 어려운 대목에서는 이설을 병기하고 단서를 답니다. 아래 줄거리는 전기를 책의 순서대로 따라가고, 이어지는 해설은 책이 보여 주는 주제를 열네 가지 대목으로 짚습니다. 인물의 죽음과 결말까지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

테세우스 (전설 속 인물)

서두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지도 가장자리에 '그 너머엔 사막뿐'이라 적는 지리학자처럼, 역사가 닿는 시대 너머에는 시인과 우화꾼만 사는 '경이와 허구'가 있다고 말한다. 리쿠르고스와 누마 다음으로 로물루스까지 올라가, 아테네를 세운 테세우스를 그와 짝짓는다. (우화가 이성으로 정화되어 역사의 모습을 띠기를 바라며, 믿기 어려운 대목은 너그럽게 읽어 달라고 청한다.)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와 트로이젠 왕 피테우스의 딸 아이트라 사이에서 났다. 델포이 신탁이 모호했던 탓에 아이게우스는 트로이젠에서 아이트라와 동침했고, 그것이 설득인지 속임수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큰 바위 밑에 칼과 신발을 숨기고 아들이 바위를 들 만큼 자라면 보내라고 일렀다. 바위를 든 테세우스는 안전한 뱃길 대신 육로를 택해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악당을 처단했다. 곤봉의 페리페테스, 소나무를 휘는 시니스, 크롬미온의 암퇘지 파이아(여자 강도였다는 설도 있다), 스키론(메가라 저술가들은 그가 악인이 아니었다고 반박하며,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모순'이라 부른다), 케르키온, 프로크루스테스가 차례로 쓰러졌다. 아테네에서는 메데이아의 독배를 아이게우스가 칼을 알아보고 쳐냈고, 팔라스의 쉰 아들이 일으킨 반란도 진압했다. 마라톤의 황소를 잡은 뒤, 아홉 해마다 청년 일곱과 처녀 일곱을 크레타에 바치는 세 번째 공물에 스스로 나서, 흰 돛 신호를 약속하고 떠났다. 아리아드네의 실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나 필로코로스 등은 달리 전하고, 아리아드네의 운명도 전승마다 엇갈린다. 귀환길에 기쁜 나머지 돛을 바꾸지 않아 아이게우스는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이후 아티카를 한 도시로 합치고 세 신분으로 나누었다. 아마존 안티오페를 데려온 일로 아마존이 아테네를 침공했으나 넉 달 뒤 강화했다. 쉰 살 무렵 헬레네를 납치했고, 에피로스에서 피리토오스는 개에게 찢기고 테세우스는 갇혔다가 헤라클레스가 풀어 주었다. 메네스테우스의 선동과 디오스쿠로이의 침공으로 아테네를 잃은 그는 스키로스로 가 리코메데스에게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스스로 미끄러졌다는 설도 있다). 훗날 키몬이 유골을 아테네로 옮겼고 무덤은 약자의 피난처가 되었다.

로물루스 (전설 속 인물, 전통 연대로는 기원전 8세기)

플루타르코스는 로마라는 이름의 기원부터 저자마다 갈린다고 하며, 펠라스고이인 설, 트로이 여인 로마가 배를 불태웠다는 설 등을 든다. 로물루스의 출생도 아이네아스의 아들이라는 설, 타르케티우스 왕의 환영 이야기 등 여럿이나, 가장 많이 믿는 것은 페파레토스의 디오클레스가 전한 이야기다. 알바의 누미토르는 아우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그의 딸은 베스타 여사제가 되었으나 임신해 쌍둥이를 낳았다. 아이들은 궤짝에 담겨 강에 버려졌고 늑대가 젖을 먹이고 딱따구리가 돌보았으며,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길렀다. 늑대 이야기가 유모 아카 라렌티아 이름의 중의성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청년이 된 쌍둥이 중 레무스가 붙잡혀 누미토르 앞에 서자 출생의 징표가 드러났고, 로물루스가 가세해 아우물리우스를 죽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기가 극적이고 꾸민 듯하다는 의심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운명이 때로 시인 같음을 떠올리면 전부 불신할 것은 아니라고 한다. 둘은 도시를 세우기로 하고 새점을 쳐, 레무스는 독수리 여섯 마리, 로물루스는 열두 마리를 보았다(속임수였다는 설도 있다). 레무스는 도랑을 뛰어넘다 죽었고, 죽인 이는 로물루스 또는 켈레르라고 한다. 4월 21일 건립했고 보병 3천, 기병 300의 군단과 원로원 100명이 정해졌다. 건립 넉 달 뒤 사비니 처녀 약탈이 일어났고, 숫자는 30명이라는 설과 527명(발레리우스 안티아스), 683명(유바) 설이 갈린다. 케니나의 아크론을 일대일 대결로 죽여 최초의 '오피마 전리품'을 바쳤고, 타르페이아의 배신과 사비니와의 전투 끝에 헤르실리아 등 여인들이 양군 사이에 뛰어들어 화해를 이끌어, 두 왕이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타티우스는 통치 5년째에 살해되었고, 이후 피데나이, 카메리아, 베이이를 이겼다. 베이이 전에서 로물루스가 적 1만4천 중 절반 이상을 죽였다는 말은 전설에 가까워 믿기 어렵다고 한다. 승리 뒤 그는 오만해졌고, 7월 노네스에 홀연히 사라졌다. 원로원이 그를 찢었다는 설과 폭풍 속에 사라졌다는 설이 있고, 프로쿨루스는 그가 퀴리누스 신이 되었다고 맹세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육신까지 하늘로 올리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영혼만 신에게 돌아간다고 논평한다. 나이 쉰넷, 재위 서른여덟 해였다고 한다('그들이 말하기를').

리쿠르고스 (전설적 입법자, 연대 불확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의 가계, 여행, 죽음의 장소와 방식, 특히 그가 만든 법과 정체에 관해 역사가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거의 모든 진술이 이의에 부딪힌다고 시작한다. 연대도 이피토스와 같은 시대라는 설(아리스토텔레스), 훨씬 오래되었다는 설, 동명이인 둘이라는 티마이오스의 추측이 갈린다. 그는 에우노모스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소요를 말리다 푸줏간 칼에 찔려 죽었다. 형 폴리덱테스가 일찍 죽자 왕위는 리쿠르고스에게 왔으나, 형수가 임신 중임을 알고 아이가 사내면 왕이라 선언하고 섭정만 맡았다. 왕비가 아이를 없애 주겠다며 결혼을 요구하자 응하는 척하다가, 사내가 태어나자 만찬 중에 '스파르타인이여, 왕이 태어났다'고 하고 카릴라오스라 이름했다. 재위는 여덟 달이었다. 왕비 쪽의 모함을 피해 그는 외유를 떠나 크레타에서 법제를 살피고 시인 탈레스를 데려왔으며, 아시아에서는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 접해 옮겨 적었다. 이집트 여행은 이집트인들의 말로 전하고, 스페인·아프리카·인도 여행은 아리스토크라테스 한 사람의 증언에만 의존한다고 한다. 귀국한 뒤 델포이 신탁을 받고 서른 명의 유력자와 함께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왕과 합쳐 서른 명(원로 스물여덟)의 원로원을 세웠다. 이어 라코니아를 3만 몫으로, 스파르타 시 주변은 9천 몫으로 나누었는데(6천 또는 4천5백이라는 이설도 있다), 한 몫은 남편 곡식 70말, 아내 12말을 낼 만큼이었다. 금은 대신 철돈을 쓰게 해 사치를 사라지게 했고, 모두가 공동 식탁(피디티아)에서 먹게 했다. 이 때문에 부자들이 돌을 던졌고 알칸드로스가 그의 눈 하나를 쳤으나(눈은 잃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리쿠르고스는 그를 벌하는 대신 곁에 두어 충직한 시민으로 바꿨다. 법은 글로 쓰지 않고 교육에 맡겼으며, 일곱 살부터 공동 교육, 소녀의 운동, 혼인 풍습이 정해졌다. 헬로트를 습격하는 크립테이아는 그가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플루타르코스는 판단한다. 델포이 신탁으로 법이 훌륭하다는 답을 얻은 그는 백성에게 돌아올 때까지 법을 지키라고 맹세시키고, 델포이에서 단식으로 생을 마쳤다. 스파르타는 이후 오백 년간 번성했으나 아기스 때 금은이 들어와 쇠퇴했다. 죽은 곳은 키라, 엘리스, 크레타 등으로 갈린다. 유일한 아들 안티오로스가 자식 없이 죽어 가문이 끊겼다.

누마 폼필리우스 (전설 속 왕, 전통 연대로는 기원전 8~7세기)

플루타르코스는 누마의 재위 시기에 큰 이견이 있고, 클로디우스는 로마의 옛 기록이 갈리아인의 약탈 때 사라져 지금 것은 위조라 주장한다고 전한다. 누마가 피타고라스와 친분이 있었다는 통설도 반박된다. 로물루스가 염소 늪에서 사라진 뒤 귀족들이 의심받자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선포했고 프로쿨루스가 맹세로 증언했다. 이어 새 왕을 두고 로마인과 사비니인이 다투자 150명 원로원 의원이 낮 여섯 시간, 밤 여섯 시간씩 교대로 왕 노릇을 하는 '인터레그눔'이 시행되었다. 결국 로마인이 사비니인 중에서 왕을 고르기로 하여 쿠레스의 누마를 택했다. 누마는 폼포니우스의 막내아들로, 로마 건국일인 4월 21일에 태어났고, 타티우스의 딸 타티아와 결혼해 13년 만에 사별한 뒤 숲에서 은둔했는데 여기서 여신 에게리아와의 결합 이야기가 나왔다. 플루타르코스는 신이 인간의 육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면서도, 덕 있는 이에게 신이 마음을 쓴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한다. 약 마흔 살에 사절 프로쿨루스와 벨레수스가 왕위를 청했으나 누마는 처음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신이 전쟁의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아버지와 마르키우스가 설득했다. 즉위 후 그는 로물루스의 친위대 300명(켈레레스)을 해산했고, 퀴리누스 사제를 추가했다. 종교로 호전적 기질을 누그러뜨리려 제사와 행렬을 정하고, 170년 동안 신상을 금했으며, 폰티펙스, 베스타 여사제(서른 해 복무: 십 년 배우고 십 년 일하고 십 년 가르침), 페키알레스, 살리이를 세웠다. 살리이의 방패는 하늘에서 떨어졌고 마무리우스가 열한 개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피쿠스·파우누스·유피테르 일화는 우습지만 당시의 신앙을 보여 준다고 한다. 그는 땅을 빈민에게 나눠 농사를 장려하고, 직능별 조합을 만들어 사비니·로마의 구분을 흐리게 했으며, 달력을 열두 달로 고쳐 1월을 첫째로 삼았다. 야누스 신전 문은 43년 동안 닫혀 있었다. 그는 여든 살 남짓에 노쇠로 죽었고, 두 석관 가운데 하나에 책을 넣어 야니쿨룸에 묻었는데 약 400년 뒤 발견되어 원로원 결정으로 불태워졌다고 한다(발레리우스 안티아스). 후계자 툴루스는 종교를 비웃다 벼락으로 죽었다.

솔론 (기원전 약 638~558)

솔론의 아버지는 대다수 저자에 따르면 엑세케스티데스로, 재산은 중간 정도이나 코드로스의 후손이라 가문은 고귀했다(필로클레스만 아버지를 에우포리온이라 함 ).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코스에 따르면 어머니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어머니와 사촌이었고, 솔론이 그를 사랑했다고도 한다 . 아버지가 남을 돕다 재산을 잃자 솔론은 젊어서 상업에 나섰으나, 학문을 위한 여행이었다는 설도 있다 . 메가라와 살라미스를 두고 오래 싸우던 아테네는 섬을 되찾자고 말하면 사형이라는 법을 만들었는데, 솔론은 미친 척하고 광장에서 100행의 비가 「살라미스」를 읊어 법을 폐지시키고 전쟁을 이끌었다. 점령 방법은 콜리아스의 여인 계략이라는 통설과, 델포이 신탁에 따라 500명의 지원자와 30노 전선으로 상륙했다는 설이 병존한다 . 스파르타 5인의 중재로 아테네가 이겼다. 킬론 일파 학살의 부정(不淨)은 300명의 재판과 크레타의 에피메니데스의 정화로 수습했다. 세 파벌과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 솔론은 아르콘으로 뽑혀 중재자·입법자가 되었고 참주 자리를 거절했다. 빚을 탕감하는 세이삭테이아를 시행했는데(안드로티온은 이자만 줄였다고 함 ), 친구 코논·클레이니아스·히포니코스가 미리 땅을 사들여 의심을 받자 자기 5탈란톤(폴리젤로스는 15)의 채권을 포기했다. 드라콘의 법은 살인 관련만 남기고 폐지했고, 재산에 따라 500말·300말·200말 이하의 네 계층으로 나누었으며, 400인 의회를 두고 아레이오파고스를 법의 수호자로 삼았다. 법을 100년 기한으로 나무 축에 새긴 뒤, 10년 예정으로 이집트·키프로스를 거쳐 크로이소스를 방문해 "끝을 보라"고 말했다(연대가 안 맞는다는 이견에도 수용). 돌아오니 파벌이 다시 싸웠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상처를 꾸며 호위대 50명을 얻어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자 홀로 반대하다 무기를 문 앞에 내려놓았다. 죽음은 헤라클레이데스는 한참 뒤, 파니아스는 2년이 못 되어라 하며, 재가 살라미스에 뿌려졌다는 이야기는 우화로 본다 .

푸블리콜라 (?~기원전 503)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는 로마인이 나중에 붙인 별칭 푸블리콜라로 불렸고, 사비니와 로마의 화해에 힘쓴 발레리우스의 후손이다. 왕정기에 웅변과 재산으로 이름을 얻었고, 타르퀴니우스 거만왕 축출 때 브루투스를 도왔으나 집정관에는 콜라티누스가 뽑혔다.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원로원 맹세에서 가장 먼저 타르퀴니우스 복귀를 거부하는 서약을 했다. 노예 빈디키우스가 아퀼리우스·비텔리우스 가문과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집정관 살해와 왕 복위를 모의하는 것을 엿듣고 발레리우스에게 알렸고, 발레리우스는 편지를 압수했다. 브루투스는 두 아들에게 방어할 말이 있느냐고 세 번 묻고 처형을 명했다. 콜라티누스는 추방되고 발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었으며 빈디키우스는 최초의 해방 시민이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에트루리아 군대를 끌고 오자 아룬스와 브루투스가 맞붙어 함께 전사했고, 숲이 밤에 "에트루리아가 한 명 더 잃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 사망자는 에트루리아 11,300명, 로마는 그보다 한 명 적었으며, 푸블리콜라는 사두마차로 개선한 첫 집정관이 되었다. 자기 집이 군주 같다는 비판을 듣자 하룻밤에 허물었고, 파스케스의 도끼를 대중 앞에서 낮췄으며, 항소권·참주 지망자 즉결 처형·사투르누스 신전 국고와 재무관 제도를 도입하고 원로원 164명을 보충했다. 이후 포르센나가 쳐들어오자 코클레스가 다리를 지켰고, 무키우스는 손을 불에 넣어 스카이볼라가 되었으며 포르센나는 평화를 맺었다. 인질 클로일리아의 탈출은 말을 탔다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갈린다 . 사비니의 앗피우스 클라우수스가 5,000가구와 투항하자 땅을 주었다. 마지막 승리 뒤 사망하자 시민들이 한 푼씩 내 장례를 치렀고 여인들은 1년을 애도했다.

테미스토클레스 (기원전 약 524~459)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버지 네오클레스가 명문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외국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어머니를 트라키아의 아브로토논이라는 시구도 있고 파니아스는 카리아의 에우테르페, 네안테스는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라 한다 . 서자들이 가는 키노사르게스에 귀족 청년을 불러 신분 차이를 허물었다. 어려서부터 격렬하고 야심이 컸고 스승은 그가 "작은 인물은 아닐 것"이라 했다. 마라톤 승전 뒤 "밀티아데스의 전승비가 잠을 못 자게 한다"고 말했다. 라우리온 은광 수입의 분배를 중단시켜 100척의 함대를 짓게 했고, 아이기나를 구실로 삼아 페르시아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리스티데스는 도편추방되었다. 아르테미시온에서는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지휘권을 양보했고, 에우보이아인이 건넨 돈을 지휘관에게 주었다는 헤로도토스의 보고가 있다 . 아테네 시민이 트로이젠으로 피난할 때 아테네의 뱀이 사라졌다는 신탁 해석과 "나무 벽"이 배라는 해석으로 설득했고, 아리스티데스를 소환했다. 살라미스에서는 시키노스를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내 그리스가 도망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려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였다. 아이스킬로스는 적선 1,207척이라 했고, 아테네는 180척이었다. 크세르크세스에게는 다시 내시 아르나케스를 보내 다리가 부서진다고 속여 퇴각시켰다. 스파르타에서 지혜의 상을 받았고, 이후 성벽 재건을 스파르타 감독관들을 속여 완성했다. 피레우스 항을 건설하고, 도편추방당한 뒤 파우사니아스 사건에 연루되어 코르키라·에페이로스의 아드메토스·소아시아로 도망쳤다. 도중의 이야기들은 토막마다 저자 이견이 있다 . 크세르크세스가 이미 죽었다는 투키디데스설과 직접 만났다는 설이 갈린다 . 1년 만에 페르시아어를 익혀 왕의 총애를 얻었고, 마그네시아·미우스·람프사코스를 받았다. 이집트 반란으로 왕이 그리스 원정을 요구하자, 황소 피를 마시고 65세에 마그네시아에서 죽었다는 것이 통설이고 즉사하는 독약을 먹었다는 설도 있다 .

카밀루스 (기원전 약 446~365)

카밀루스는 독재관에 다섯 번, 개선식 네 번을 받고 "제2의 건국자"라 불렸으나 집정관은 한 번도 되지 못했다. 당시 평민이 집정관 대신 군사 호민관을 뽑았기 때문이다. 독재관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 밑에서 아이쿠이·볼스키와 싸우다 허벅지에 창이 박힌 채 싸워 감찰관이 되었다. 베이이는 7년째 포위되어 있었고, 알바 호수가 이유 없이 넘치자 포로가 된 점술가가 호수 물을 빼야 도시가 함락된다고 털어놓았다. 델포이 사절이 같은 취지의 신탁을 받아 왔다. 10년째에 카밀루스가 독재관이 되어 굴을 파 유노 신전 아래로 들어가 함락시켰고, 함락 뒤 기도하다 넘어지자 "작은 불운"이 대가라 했다. 유노 여신상이 가겠다고 속삭였다는 이야기를 Livy도 약간 달리 전한다 . 흰 말 네 필의 개선 마차와 십일조 서약 불이행으로 인심을 잃었고, 부인들의 장신구로 황금 8탈란톤을 모아 델포이에 보냈다. 팔레리이 포위 때 교사가 아이들을 넘기자 카밀루스는 교사의 옷을 벗겨 아이들에게 매질하게 했고, 팔레리이는 항복했다. 병사들과 시민의 원한 속에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의 고발로 15,000아스 벌금을 받고 망명했다. 이후 카이디키우스가 "갈리아인이 온다"는 초인간적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 알리아 강에서 로마군은 패했고 브렌누스는 로마를 점령했다. 아르데아에 있던 카밀루스는 갈리아 약탈대를 야습하고, 폰티우스 코미니우스가 수영해 카피톨리움에 가 독재관 임명을 받았다. 거위들이 야습을 알렸고 만리우스가 막았다. 7개월 포위 끝에 금 1,000 weight(무게)로 협정했으나 브렌누스가 저울에 칼을 던지며 "패자에게 화 있으라" 했고, 카밀루스가 도착해 금을 도로 빼앗고 갈리아군을 격파했다. 베이이 이주 논쟁은 백인대장의 외침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도시를 재건하는 쪽으로 끝났고, 만리우스의 선동을 재판했으며, 아니오강에서 다시 갈리아군을 물리쳤다. 원로원이 집정관 한 명을 평민에서 뽑기로 타협하자 서약대로 콘코르디아 신전을 세웠고, 이듬해 역병으로 죽었다.

페리클레스 (기원전 약 495~429)

페리클레스는 아카만티스 부족, 콜라르고스 구 출신으로 부계·모계 모두 명문이다. 아버지 크산티포스는 미칼레에서 페르시아 왕의 장군들을 쳐부수었고, 어머니 아가리스테는 피시스트라토스 아들들을 몰아낸 클레이스테네스의 손녀다. 어머니가 사자를 낳는 꿈을 꾸었고 아이는 머리가 약간 길어 조각상마다 투구를 씌웠다. 음악은 다몬, 논변은 제논, 사상과 품격은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얻었다. 젊어서는 피시스트라토스를 닮았다는 말에 정치를 피하고 군무에만 힘썼으나, 아리스티데스가 죽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쫓겨나고 키몬이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자 가난한 다수 편에 섰다. 재산으로 키몬을 당할 수 없자 공금 분배로 민중을 사서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에피알테스를 통해 빼앗았고 키몬은 도편추방되었다. 이후 투키디데스(알로페케)와 겨루어 그를 추방하고 15년간 해마다 장군으로 재선되었다. 페이디아스를 총감독 삼아 파르테논·프로필라이아·오데온을 세웠고, 델로스 금고 이전 비판에는 비용을 자기 이름으로 올리겠다고 맞섰다. 사모스는 9개월 만에 항복시켰다 (아스파시아 청탁 때문이라는 비난). 메가라 칙령 철회를 거부해 전쟁을 부른 이유를 두고 여러 설을 소개하고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고 스스로 밝힌다. 아르키다모스가 6만 대군으로 침입했을 때 싸우지 않고 성문을 닫아 버텼다. 역병이 돌자 시민은 그를 해임하고 벌금(적게 말하면 15탈란톤, 많게 말하면 50)을 물렸으며, 그는 누이와 큰아들 크산티포스 등 가까운 이들을 잃고 마지막 적자마저 잃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시민들이 다시 불러 장군이 되었고 서자에게 시민권을 허용하는 예외를 얻었다. 그는 느리게 번지는 역병으로 죽었고, 임종 때 승전비 아홉 개보다 "누구도 나 때문에 상복을 입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았다.

파비우스 (기원전 약 280~203)

파비우스 가문은 헤라클레스와 요정(혹은 그 지방 여자)의 아들이 티베르 강변에서 낳은 첫 파비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구덩이(fodere)를 파던 Fodii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참인지 거짓인지"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파비우스 룰루스의 4대손으로 윗입술의 사마귀 때문에 베루코수스, 어릴 때는 온순해서 오비쿨라(새끼 양)로 불렸다. 말이 느리고 배움이 더뎌 둔하게 보였으나 일에 나서자 신중함과 굳건함으로 드러났다. 다섯 번 집정관을 지냈고 첫 임기에 리구리아인을 격파해 개선식을 가졌다. 한니발이 트레비아에서 이긴 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충고를 물리치고 트라시메누스 호반에서 싸워 전사했고, 1만 5천 명이 죽고 같은 수가 포로가 되었다. 로마는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뽑았다. 그는 마기스테르 에퀴툼으로 미누키우스를 두고, 릭토르 24명을 거느렸으며, 시빌라 예언서를 살핀 뒤 신께 대규모 제물을 서약했다. 전략은 고지에 진을 치고 한니발을 따라다니되 결전을 피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한니발의 교사"라는 조롱을 받았다. 한니발은 카실리눔 골짜기에 갇혔다가 소 2천 마리 뿔에 횃불을 달아 빠져나갔다. 포로 교환 때 남은 240명의 몸값을 원로원이 거부하자 아들을 보내 땅을 팔아 치렀다. 로마로 간 사이 미누키우스가 싸워 이기자 민중은 그에게 독재관과 동등한 권한을 주었고, 미끼에 걸려 포위된 미누키우스를 파비우스가 구했다. 미누키우스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이후 바로가 8만 8천을 모아 칸나에에서 대패했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다. 파비우스는 도시를 수습했다. 훗날 타렌툼을 되찾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렸고 3천 탈란톤이 국고에 들어왔다 (배신한 여인의 신원은 이설이 있고, 플루타르코스는 이 대목에서 야심이 그를 이겼다고 평한다).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에는 끝까지 반대했고,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떠날 무렵 병들어 죽었다. 시민들은 각자 가장 작은 동전을 내 장례비를 댔다.

알키비아데스 (기원전 약 450~404)

알키비아데스는 아버지 쪽으로 아이아스의 아들 에우리사케스, 어머니 쪽으로 알크마이온의 후손이라 하며, 아버지 클레이니아스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이름을 얻고 코로네이아에서 전사했다. 페리클레스와 아리프론이 후견인이 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애정이 그의 명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해 씨름에서 상대 손을 물며 "여자처럼 문다"는 말에 "사자처럼"이라 답했고, 플루트를 배우기를 거부했다. 포티다이아에서 소크라테스와 한 막사를 쓰며 부상당한 그를 지켜 주었고, 델리온에서는 말을 탄 채 소크라테스를 엄호했다. 히포니코스의 뺨을 쳤다가 맨몸으로 매질을 청해 용서받고 딸 히파레테를 아내로 얻었다. 올림피아 경주에 병거 7대를 보내 1, 2, 4위(혹은 3위)를 얻었다. 도편추방이 닥치자 니키아스(혹은 파이악스)와 손잡고 히페르볼로스에게 돌렸다. 스파르타 사절을 속여 평화를 깨고 아르고스·엘리스·만티네이아와 동맹했다. 시칠리아 원정을 부추겨 니키아스, 라마코스와 함께 장군이 되었고, 함선 약 140척, 중무장 5,100명, 경무장 1,300명으로 출발했다. 헤르메스 상 훼손과 비교(秘敎) 모독 혐의로 소환되자 투리이에서 달아났고 사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스파르타로 가 길리포스 파견과 데켈레이아 요새화를 권했고, 아기스의 아내 티마이아와 아들을 두었다. 이후 티사페르네스에게 의탁했다가 사모스의 아테네군에 합류, 아비도스·키지코스에서 크게 이겼고 아테네로 개선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관 안티오코스가 에페소스 앞에서 리산드로스에게 패하자 다시 직위를 잃고 트라키아로 갔다.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장군들에게 경고했으나 무시당했고 아테네는 몰락했다. 그는 프리기아에서 파르나바조스가 보낸 자객들에게 집이 불에 싸여 불길을 뚫고 나왔으나 화살과 창에 죽었다 (암살 지시의 주체에 대해 파르나바조스·리산드로스·스파르타라는 설과, 유혹한 처녀의 형제들이 불 질렀다는 설이 병존한다).

코리올라누스 (전설적 인물, 기원전 5세기 초)

마르키우스 가문은 앙쿠스 마르키우스 등 많은 인물을 낸 귀족가이고, 가이우스 마르키우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볼룸니아 밑에서 자랐다. 훈육이 부족한 고귀한 본성은 가꾸지 않은 비옥한 땅과 같아 용맹과 끈기 못지않게 격정과 고집도 낳았다고 한다. 소년 때 타르퀴니우스가 라틴인들과 복위를 시도한 전투에서 쓰러진 병사를 구해 참나무 관을 받았다 (참나무 관의 유래는 아르카디아인 설, 참나무가 흔하다는 설, 유피테르 설을 나란히 든다). 그의 영예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채무로 괴로운 평민이 성산으로 물러나자 메네니우스 아그리파의 배 이야기로 화해했고, 호민관이 생겼다. 볼스키와의 전쟁에서 집정관 코미니우스가 코리올리를 포위하다 본대를 이끌고 나간 사이 소수를 이끌고 성문 안으로 뛰어들어 도시를 함락시켰고, 다시 코미니우스의 본대로 달려가 안티움군과 싸워 이겼다. 전리품 10분의 1을 사양하고 볼스키인 친구의 석방만 청해 "코리올라누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집정관에 출마했으나 평민에게 거부당했고, 기근 때 시칠리아 겔론이 보낸 곡식을 두고 무상 분배와 호민관 권한에 반대하다 소환되어 평민 앞에서 도발적으로 답했고, 3개 부족표 차이로 영구 추방되었다. 변장하고 안티움의 툴루스 아우피디우스 집으로 가 화덕 앞에 앉아 함께 로마를 치자고 제안했다. 로마인들이 볼스키 관객을 쫓아낸 일을 계기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르키우스가 그 거짓 고발을 꾸몄다는 설). 그는 서케이움을 받아들이고 보라 등 여러 도시를 취했고 로마 5마일 앞 클루일리우스 도랑에 진을 쳤다. 사절과 사제단을 모두 물리쳤으나 발레리아의 권유로 어머니 볼룸니아, 아내 베르길리아, 아이들이 찾아오자 "어머니, 나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라며 군을 물렸다. 로마는 여인들을 위해 여성 행운의 신전을 세웠다. 안티움으로 돌아온 그는 툴루스의 일파에게 살해당했으나 볼스키 다수는 그의 시신을 명예롭게 묻었고, 로마 여인들은 10개월 동안 애도했다.

티몰레온 (기원전 약 411~337)

티몰레온은 코린토스의 명문 티모데모스와 데마리스테의 아들이다. 형 티모파네스가 용병 4백 명을 쥐고 참주를 자처하자, 전투에서 방패로 형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던 그는 두 번 설득하다 거부당했고, 친척 아이스킬로스와 한 점쟁이가 형을 죽이는 동안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어머니가 문을 닫아걸자 단식하려 했으나 친구들이 말렸고, 거의 20년간 공적 활동을 접었다. 시라쿠사가 도움을 청하자 한 시민이 그를 지명했다. 그는 배 열 척으로 출항해 길조를 만났고, 레기온 집회를 끌어 카르타고 함대를 따돌린 뒤 타우로메니온에 상륙했다. 1천~1,200명으로 아드라논에서 히케테스의 5천 이상을 깨 약 300명을 죽이고 600명을 사로잡았고, 신전 문이 저절로 열렸다는 보고도 있다. 히케테스가 보낸 암살자 둘 중 하나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던 시민에게 제단 곁에서 죽고 다른 하나는 음모를 자백했다. 디오니시오스가 성채를 넘겨 코린토스로 떠났다(상륙 50일 이내). 마고의 카르타고 함대 150척이 들어왔으나 마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프리카로 물러났다(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쓴다). 티몰레온은 참주 성채를 시민과 함께 허물고 법정을 세웠으며, 이주민 1만 등으로 시라쿠사를 채우고 집을 1천 탈렌트에 팔았다. 크리메소스 강에서 보병 5천·기병 1천으로 카르타고 7만을 폭풍 속에서 무찔렀다(전사 1만 중 카르타고 시민 3천 이상이라 한다). 이어 히케테스와 마메르코스 등 참주를 제거했다. 히케테스의 아내·딸 처형을 막지 않은 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덜 흡족한 일로 꼽힌다. 그는 시라쿠사가 준 집과 땅에서 아내·자식과 살며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늙어 시력을 잃은 뒤에도 시민들은 그를 가마로 극장에 모셔 자문받았고, 가벼운 병으로 죽자 2백 미나로 장례하고 '티몰레온테이온'을 세웠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원전 약 229~160)

아이밀리우스는 로마 옛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루키우스 파울루스는 칸나이에서 동료가 달아난 뒤에도 남아 싸우다 죽었다. 그는 웅변이나 대중 영합 대신 용기·정의·청렴으로 이름을 얻었고, 조영관 선거에서 12명의 경쟁자를 눌렀으며 점조관으로서 옛 의례를 엄격히 지켰다. 에스파냐 법무관으로 두 번 이겨 3만을 죽이고 250개 도시의 항복을 받았으나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첫 집정관 때는 리구리아 4만을 8천으로 격파하되 선박만 거두었다. 첫 아내 파피리아와 이혼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약 60세에 두 번째 집정관이 되어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를 맡았다. 페르세우스는 바스타르나이 용병과 겐티오스에게 약속한 돈을 아껴 동맹을 잃었다. 올림포스 기슭에서 아이밀리우스는 우물을 파 물을 구하고, 나시카와 맏아들 파비우스를 우회로로 보냈다. 피드나 전날 밤 월식이 오자 달에 암소 열한 마리, 헤라클레스에 스무 마리를 바친 끝에 21번째에서 길조를 얻었다. 전투는 오후 3시경 시작해 4시 전에 끝났고, 방진의 틈에 부대를 투입해 이겼다. 마케도니아 2만5천 이상 전사, 로마측은 100명(포세이도니오스) 또는 80명(나시카)이라 한다. 페르세우스가 전장을 떠난 것을 폴리비오스는 제사를 핑계 댄 비겁으로, 포세이도니오스는 말에 차인 부상 때문이라 한다. 그는 사모트라케에서 항복했고 아이밀리우스는 그의 비굴한 간청을 꾸짖되 일으켜 세웠다. 마케도니아는 자유를 얻고 공물 1백 탈렌트만 내게 되었으나, 에페이로스 70개 도시를 약탈해 15만 명이 노예가 된 것은 그의 성품과 어긋난다. 개선식은 사흘간 열렸고, 그 전후로 두 어린 아들이 잇달아 죽었으며 그는 민회에서 운명을 말했다. 페르세우스의 최후는 단식과 불면 박해 두 설로 갈린다. 아이밀리우스는 감찰관(337,452명 집계)을 지낸 뒤 병이 나 벨리아에서 쉬다가, 귀환 후 제사를 마치고 헛소리 끝에 사흘 만에 죽었다.

펠로피다스 (기원전 약 410~364)

펠로피다스는 테베 명문 히포클레스의 아들로 부유하게 자랐으나 재산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결혼해 자녀를 두고도 공무에 몰두해 재산을 기울였다. 친구들이 돈이 필요하다 하자 "니코데모스(불구인 맹인)에게나 필요하다"고 했다. 에파메이논다스와의 우정은 만티네아 전투에서 시작되었다고 많은 이가 본다. 펠로피다스가 일곱 상처로 쓰러지자 에파메이논다스가 지켰고 스파르타 왕 아게시폴리스가 둘을 구했다. 스파르타의 포이비다스가 카드메이아를 기습하자 펠로피다스는 아테네로 망명했다. 그는 동료 12명과 사냥꾼 차림으로 눈보라 속에 테베에 들어가 카론의 집에 모였다(48명). 연회 중인 아르키아스는 음모를 알리는 편지를 받고도 "급한 일은 내일"이라며 베개 밑에 넣었다. 카론과 멜론은 여자로 변장해 아르키아스와 필리포스를, 펠로피다스는 레온티다스를 죽였다. 그는 보이오티아 총사령관이 되어 카드메이아를 포위, 협정으로 스파르타군을 내보냈다. 그와 동료는 스파르타의 스포드리아스를 부추겨 아테네를 습격하게 해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갈라놓았다. 테기라이에서는 300명으로 스파르타 2개 대대를 꺾었는데 대대 규모는 에포로스 500, 칼리스테네스 700, 폴리비오스 900으로 엇갈린다. 레우크트라 전날 꿈에서 스케다소스의 딸들이 처녀 제물을 요구했고, 밤색 암망아지가 달려와 그것으로 삼았다. 신성대를 이끈 그의 돌격으로 스파르타는 전례 없이 무너졌다. 에파메이논다스와 펠로폰네소스로 진군해 메세니아를 복원했고, 임기 초과로 재판받았으나 둘 다 무죄였다. 페르시아 왕에게 사절로 가 메세니아와 그리스의 자유를 얻었다. 일식에 놀란 시민을 두고 기병 300명만 이끌고 테살리아로 갔다가,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페라이 참주 알렉산드로스를 보고 분노해 앞서 달려나가 죽었다. 참주는 뒤에 아내 테베와 그 오빠 셋에게 살해되었다.

마르켈루스 (기원전 약 268~208)

마르켈루스는 다섯 번 집정관이 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로, 이름은 '호전적'이라는 뜻이라고 포세이도니오스가 말한다. 그는 일대일 결투를 한 번도 피하지 않았고 도전자를 반드시 죽였다. 시칠리아에서 포위된 동생 오타킬리우스를 구했고, 동료 카피톨리누스가 아들을 모욕하자 원로원에 고발해 벌금을 물렸다. 갈리아 전쟁의 집정관으로 클라스티디움 근처에서 소수의 기병으로 가이사타이 왕 브리토마르투스를 직접 쓰러뜨려 최고의 전리품을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에 바쳤다(로물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에 이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한니발이 침공하고 칸나이 패전이 있자 카누시움에서 패잔병을 모았다. 놀라에서는 한니발의 손님이 되었던 반티우스를 후하게 대접해 동지로 만들었고, 성문 세 곳으로 나와 한니발군을 처음 물리쳤다. 5천 이상 전사에 로마 5백 이하라는 수치를 놓고 리비우스는 그만큼으로 단언하지 않는다. 시라쿠사를 수륙으로 공격했으나 아르키메데스의 기계에 막혀 장기 포위로 바꿨고, 디아나 축제 때 성탑을 넘어 들어갔다. 도시를 내려다보며 울고 자유민을 해치지 말라 명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은 세 가지로 전해지며, 마르켈루스는 죽인 자를 살인자로 여겼다. 그는 시라쿠사의 미술품을 로마로 가져왔다가 파비우스 쪽 노인들에게 비판받았고, 네 번째 집정관 때 시라쿠사 사절의 고발에서 원로원의 무죄 결의를 받았다. 이후 한니발과 누미스트로, 카누시움에서 싸웠고, 한 번 패하자 병사들에게 보리를 주고 다음날 코끼리를 물리치며 이겼다. 호민관 비불루스의 고발에도 무죄가 되어 오히려 다섯 번째 집정관으로 뽑혔다. 그는 60세가 넘어 동료 크리스피누스와 기병 220명 남짓으로 언덕을 정찰하다 복병을 만나 창에 옆구리를 찔려 죽었다. 한니발은 시신을 예우했으나 유골이 누미디아인에게 빼앗겼다는 전승과 아들에게 갔다는 전승이 엇갈린다.

아리스티데스 (기원전 약 530~468)

아리스티데스는 리시마코스의 아들로 안티오키스 부족, 알로페케 구 출신이다. 재산은 설이 갈려, 극빈했다는 통설과 부유했다는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 주장이 맞서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후자의 논거를 약하다고 본다. 그는 귀족정 편이었고 평민 편 테미스토클레스와 어릴 적부터 대립했다. 국고 관리로서 횡령을 밝혔다가 오히려 유죄를 받았으나 곧 재임용되었다. 마라톤에서는 열 장군 중 하나로 자기 지휘일을 밀티아데스에게 넘겼고, 전투 뒤 노획물을 지키며 손대지 않았다. '정의로운 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시기를 받아 10년 도편추방되었다. 글 모르는 사내가 그에게 자기 이름을 써 달라 청한 일화가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쳐들어오자 소환되어, 살라미스에서 적 함대를 뚫고 와 테미스토클레스와 화해했고 프쉬탈레이아 섬의 적을 소탕했다. 마르도니오스의 회유에는 "온 땅의 보물도 그리스의 자유만 못하다"고 답하는 결의를 냈다. 플라타이아에서는 아테네군 8,000을 이끌었고 신탁에 따라 플라타이아 인이 국경을 옮겨 땅을 내주었다. 민주정 전복 음모는 8명만 체포하고 덮었다. 그는 파우사니아스의 요청으로 우익으로 옮겼고, 마르도니오스는 스파르타인이 쳤다. 페르시아 30만 중 4만만 달아났고 그리스 전사자는 1,360명이었다. 영예 다툼은 코린토스의 클레오크리토스가 플라타이아에 돌리자는 제안으로 수습되었다. 그는 매년 플라타이아 집회와 5년마다 엘레우테리아 제전, 창병 1만·기병 1천·함선 100척 갹출을 제안했다. 귀환 후에는 모든 시민이 통치에 참여하게 했고,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방화 계획을 "가장 유익하나 가장 부당하다"며 막았다. 키몬과 함께 동맹 지휘권을 평화적으로 얻었고 분담금을 460탈란톤으로 정했다. 그는 델로스 금고 이전이 부당하나 유익하다고 했다. 죽음은 폰토스설, 아테네 노환설, 뇌물 유죄 후 이오니아에서 죽었다는 크라테로스설로 갈리며 플루타르코스는 마지막 설에 증거가 없다고 한다. 무덤은 팔레론에 있고 딸들은 국비로 혼인했다.

대 카토 (기원전 234~149)

카토는 투스쿨룸 출생이라 전해지며 사비니 땅의 아버지 영지에서 자랐다. 조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아 '신인'이라 불렸고, 본래 셋째 이름은 프리스쿠스였으나 능란하다는 뜻의 카투스에서 카토가 되었다. 17세에 한니발 전쟁에 첫 출전했고 검소한 생활로 이름났다. 이웃 영지의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그를 로마 정계로 이끌어, 군사 호민관과 재무관을 거쳐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파비우스를 본받아 재무관 때 스키피오의 후한 지출을 비판했다. 집정관으로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에서 켈티베리아인 지원을 200탈란톤에 얻어 이겼다. 그는 스페인에 머문 날보다 많은 도시를 빼앗았다고 했다(400개라면 허풍이 아니라고 플루타르코스). 후임이 된 스키피오와 반목했고, 그는 개선식을 받았다. 호민관으로 그리스에서 안티오코스와 싸우며 테르모필라이 산길을 밤에 우회해 적을 무너뜨렸고, 닷새 만에 승전보를 로마에 전했다. 국내에서는 고발을 주요 의무로 여겨 스키피오의 형제 루키우스를 유죄로 이끌었다. 본인도 50번 가까이 기소되었으며 86세에 마지막으로 법정에 섰고 90세에 갈바를 고소했다. 그는 "가장 거친 의사"를 뽑으라고 호소하여 감찰관에 당선되었고, 연회에서 사형수를 죽인 루키우스 퀸크티우스와 아내에게 입 맞춘 마닐리우스를 원로원에서 제명했다(리비우스는 갈리아 탈주병을 직접 쳤다고 전함). 사치품을 높게 평가해 무겁게 과세하고 공공 수도 불법 인입을 끊었으며 포르키우스 회당을 지었고, 국민은 그의 입상을 세웠다. 아들은 직접 가르쳤고 페르세우스 전쟁에서 용맹했다. 노예는 어린 포로를 사 길들였고 해상 대부로 재산을 불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늙은 노예를 팔아 버린 것을 냉혹하다고 평한다. 카르네아데스 등 철학자들을 서둘러 내보내려 했으며, 그리스 학문이 로마를 망칠 것이라 한 예언은 시간이 헛됨을 보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젊은 여자와 재혼해 아들 살로니우스를 두었고, 맏아들은 법무관 때 죽었다. 카르타고에서 본 풍요에 놀라 아프리카 무화과를 원로원에 떨어뜨리고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끝맺었다. 제3차 전쟁이 시작되자 곧 죽었으며 사인은 기록되지 않는다.

필로포이멘 (기원전 253~183)

필로포이멘의 아버지 크라우기스가 죽자 만티네아 출신 클레안드로스가 그를 길렀고, 에크데모스와 데모파네스가 철학을 가르쳤다. 외모는 추하지 않았으나 메가라 여관 안주인이 그를 하인으로 착각해 장작을 패게 한 일화가 있다. 그는 에파미논다스를 본받았으나 다툼을 좋아하는 성미라 군사적 덕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씨름 선수 권유를 군인에게 맞지 않는다며 버렸다. 30세에 클레오메네스가 메갈로폴리스를 야습하자 시민을 탈출시키고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셀라시아 전투에서는 명령 전에 자기 시민들로 먼저 공격했고, 두 허벅지를 투창이 관통했으나 창대를 부러뜨려 빼고 싸웠다. 안티고노스는 "그 청년은 노련한 지휘관처럼 행동했다"고 웃었다. 그는 안티고노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크레타에서 경험을 쌓은 뒤 아카이아 기병대장이 되어 기병을 훈련시켰고, 라릿소스 강 전투에서 엘리스 기병대장 다모판토스를 쓰러뜨렸다. 아카이아군의 방패와 창을 큰 방패와 긴 창으로 바꾸고 사치를 무구 장식으로 돌렸다. 마카니다스와 만티네아 근처에서 싸워, 적이 추격에 정신 팔린 사이 방치된 적 밀집대를 쳐 4,000여 명을 죽였다고 하며("그들이 말하길") 도랑가에서 참주를 직접 창으로 쓰러뜨렸다. 네메아 경기 극장에서는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조국이 나비스에게 시달릴 때 크레타에 간 일은 비난을 샀고, 해전에서는 졌으나 야습과 지형에 맞춘 대형 변경으로 만회했다. 스파르타를 아카이아에 편입시키고 나비스 재산 매각액 120탈란톤의 선물을 사양했다. 그러나 훗날 장군으로서 스파르타인 80명(폴리비오스) 또는 350명(아리스토크라테스)을 죽이고 3,000명을 노예로 팔았다. 일흔에 여덟 번째 장군으로 있을 때 메세네가 이탈하자 열병 중에 하루에 400스타디온을 달려 출정했으나 말이 넘어져 사로잡혔고, 감옥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 리코르타스가 복수했고, 폴리비오스가 유골함을 운구했으며, 훗날 뭄미우스는 그의 기념물 철거를 허락하지 않았다.

플라미니누스 (기원전 약 229~174)

플라미니누스의 청동상은 로마 대(大)아폴론상 곁에 있다. 그의 기질은 분노와 호의에 모두 뜨거웠으나 벌은 온건했고 은혜 입힌 이를 끝까지 돌보았다. 반면 명예에 목말라 큰일은 직접 하려 했다. 마르켈루스 아래 호민관으로 시작해 타렌툼 총독이 되었고, 나르니아와 코사 식민시 건설을 이끈 뒤 보통의 관직을 건너뛰어 서른이 못 되어 집정관이 되었다. 필리포스와의 전쟁이 배정되자 아프소스 협로에서 목동의 우회로 정보를 써 보병 4,000과 기병 300을 보내고, 연기 신호에 맞춰 정면 공격으로 마케도니아군 2,000가량을 쓰러뜨렸다. 질서 있는 행군으로 테살리아가 문을 열고 아카이아가 로마편에 섰다. 테베를 부드럽게 설득했고 필리포스는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 원로원이 지휘를 연장하자 26,000으로 퀴노스케팔라이에서 안개 속에 싸웠다. 필리포스 우익이 밀었으나 그는 좌익을 쳐서 방진을 무너뜨렸고 전사 8,000, 포로 약 5,000이었다. 아이톨리아인이 공을 가로채자 격분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에서 철수하고 1,000탈란톤을 내며 함선은 10척만 두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그가 그리스의 자유를 선포하자 환호가 바다까지 들렸고 까마귀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어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네메아에서 다시 자유를 선포했다. 나비스와는 잡을 수 있을 때 평화를 맺었는데, 후임 장군에 대한 우려나 필로포이멘에 대한 시기가 이유일 수 있다고 한다(그의 변명은 스파르타인도 함께 망한다는 것). 아카이아는 로마 포로 1,200명을 사서 그에게 선물했고, 개선식에는 금 3,713파운드, 은 43,270파운드, 금화 14,514개가 실렸다(투디타누스). 그는 안티오코스 전쟁에서 칼키스와 아이톨리아를 위해 집정관을 설득했다. 감찰관이 된 뒤 동생 루키우스가 카토에게 제명되자 카토를 공격했다. 말년에 비티니아에서 한니발을 압박해 독을 마시게 한 일로 비난받았다(일부 저자는 루키우스 스키피오와의 공동 임무였다고 하고, 최후는 교살·황소 피·독약설이 갈림). 이후 기록은 없고 평화롭게 죽었다고만 한다.

피로스 (기원전 319~272)

피로스는 몰롯시아인의 왕 아이아키데스와 프티아의 아들이다. 몰롯시아인들이 아이아키데스를 쫓아내자 젖먹이 피로스는 빼돌려졌고, 밤에 불어난 강가에서 참나무 껍질에 사정을 적어 돌에 말아 건너편으로 던졌으며 (일부는 창에 묶어 쏘았다고 한다) 건너편 사람들이 뗏목을 만들어 건네주었다. 일리리아 왕 글라우키아스는 카산드로스가 200탈란트를 내걸어도 아이를 넘기지 않았고, 12세 때 그를 왕에 앉혔다. 17세쯤 왕국을 다시 잃고 데메트리오스를 따라 입소스 전투에서 싸웠으며, 인질로 이집트에 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안티고네와 혼인한 뒤 군대를 얻어 귀국했다. 독살 음모를 꾸민 공동왕 네옵톨레모스는 잔치에 초대해 죽였다. 이어 마케도니아에 개입해 알렉산드로스를 돕고 영토를 받았으나, 데메트리오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피로스는 판타우코스를 일대일로 꺾고 포로 5천을 잡았으며, 베로이아에서 마케도니아군이 투항해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리시마코스와 영토를 나눈 뒤 결국 밀려났다. 타렌툼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 건너가(코끼리 20, 기병 3천, 보병 2만) 헤라클레이아에서 로마군을 이겼다. 사망자 수는 디오니시오스가 로마 1만5천·피로스 측 1만3천, 히에로니모스는 로마 7천 (기록이 엇갈림). 원로원은 노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연설로 화평을 거부했고, 파브리키우스는 황금과 코끼리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스쿨룸의 승리 뒤 그는 "또 한 번 그러면 파멸"이라 했다. 시칠리아로 건너가 에릭스를 직접 올라 함락했으나 압제로 민심을 잃고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베네벤툼에서 마니우스 쿠리우스에게 패했다. 6년을 쓰고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쳤으며, 클레오뉘모스와 스파르타를 포위했으나 여인들의 참호와 원군에 막히고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잃었다. 아르고스 야간 시가전의 혼란 속에서 한 노파가 던진 기와에 맞아 쓰러졌고, 조피로스가 어렵게 머리를 베어 안티고노스에게 가져갔다. 안티고노스는 울며 장례를 치르고 헬레노스를 복위시켰다.

마리우스 (기원전 157~86)

마리우스는 아르피눔 영토 키르하이아톤 마을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스키피오 밑에서 누만티아에서 복무했는데, 스키피오는 장차 누가 장군이 되겠느냐는 물음에 그의 어깨를 치며 답했다. 메텔루스 가문의 도움으로 호민관이 되어 원로원과 맞섰고, 같은 날 두 조영관 선거에서 연달아 떨어졌으며, 법무관 선거에서는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표가 같아 무죄가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 가문의 율리아와 혼인했고, 다리 종양 수술은 한쪽만 참고 받았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메텔루스의 부관으로 병사들의 사랑을 얻었으나 투르필리우스 처형 건으로 불화했고, 집정관이 되어 노예와 빈민까지 징집했다. 유구르타는 보쿠스가 재무관 술라에게 넘겼는데, 이것이 마리우스와 술라의 반목의 시작이었다. 이어 킴브리·테우토네스(전투원 30만)가 오자 그는 연이어 집정관이 되었고 (이들의 기원은 추측이라 함), 론강 하구에 운하를 팠다. 섹스틸리우스의 물가에서 암브로네스와 테우토네스를 꺾어 10만 이상을 죽이거나 잡았고 (숫자·전리품 분배는 다른 기록이 있음), 베르켈라이에서는 카툴루스와 함께 킴브리를 쳐 6만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여섯째 집정관 때는 사투르니누스와 손잡고 메텔루스를 추방시켰다 (루틸리우스는 뇌물이라 전함). 술피키우스를 통해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얻으려다 술라가 로마로 진군하자 도망쳤고, 민투르나이 늪에서 붙잡혔으나 병사가 그를 죽이지 못하고 달아났다 (갈리아인인지 킴브리인인지 이야기가 갈림). 아프리카를 떠돌다 킨나와 합류해 로마에 들어와 학살을 벌였다. 술라의 귀환이 다가오자 불안 속에 폭음하다 늑막염으로 일곱째 집정관 17일째에 죽었다 (피소는 7일간 앓았다고 함). 아들 마리우스는 프라이네스테에서 자결했다.

리산드로스 (?~기원전 395)

리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 후손이나 왕가는 아닌 아리스토클리토스의 아들로, 가난하게 자라 스파르타 관습에 순종했고 명예욕이 강했다. 아테네 전쟁 뒤 금은을 들여와 스파르타에 부에 대한 사랑을 퍼뜨렸으나 자신은 한 푼도 갖지 않았다. 해군 사령관으로 에페소스에 근거지를 두고 페르시아 왕자 키로스에게서 1만 다릭을 받아 선원 급료를 3펜스에서 4펜스로 올렸다. 알키비아데스의 조타수 안티오코스의 도발로 벌어진 해전에서 이겨 알키비아데스가 해임되었고, 각 도시에 열 명이 다스리는 정부의 토대를 놓았다. 칼리크라티다스가 후임이었다가 아르기누사이에서 죽자, 동맹국의 요구로 명목상 부제독으로 복귀했다. 그는 속임수를 쓰는 데 거리낌이 없어, 밀레토스에서는 화해하는 척하며 민중파가 도시에 남아 죽게 만들었다. 람프사코스를 함락한 뒤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 함대(180척)를 나흘간 응하지 않다가 닷새째 방패 신호로 기습해 포로 3천과 함대를 거의 다 얻었고, 코논은 8척으로 빠져나갔다. 플루타르코스는 오래 끈 전쟁이 한 사람의 판단으로 한 시간에 끝났다고 적는다.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와 그 해석은 여럿이다. 필로클레스 등 포로는 처형되었고 아테네는 성벽 철거를 받아들였으며, 플루트 소리 속에 성벽이 헐리고 30인 정부가 세워졌다. 그는 신처럼 제단을 받았고 밀레토스에서 800명을 속여 죽이게 했다. 파르나바조스의 고발로 소환되자 편지를 바꿔치기당해 곤란해졌고 암몬 신전 여행을 핑계 삼았다. 아게실라오스를 왕으로 세웠으나 아시아에서 냉대받았다. 그는 왕위를 가장 훌륭한 시민에게 개방하려 신탁 조작을 꾸몄으나 실패했다. 보이오티아 전쟁에서 할리아르토스 성벽 아래 테베인에게 죽었다. 사후 가난이 드러났고, 파혼한 사윗감들은 벌금을 물었으며, 아게실라오스가 찾은 연설문은 라크라티다스의 만류로 묻혔다.

술라 (기원전 138~78)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귀족 가문 출신이나 가세가 기울어 젊어서 셋집에 살았다. 얼굴이 흰 바탕에 붉은 반점이 있어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배우·광대와 어울렸고 니코폴리스와 계모의 유산을 받았다. 마리우스의 재무관으로 리비아에 가서 보쿠스에게서 유구르타를 넘겨받았고 그 장면을 인장반지에 새겨 마리우스를 자극했다. 법무관 선거에서 한 번 떨어졌다가 돈으로 당선되었다. 카파도키아에서 아리오바르자네스를 복위시켰고 파르티아 사절을 처음 맞았다. 사회전쟁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행운을 스스로 앞세웠다. 50세에 집정관이 되고 메텔라와 혼인했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가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빼앗자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불을 지르며 들어갔고 마리우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스에서 아테네를 포위하며 아카데미 숲을 베고 델포이·올림피아의 신전 재물을 가져갔으며, 3월 초하루 성을 함락해 학살하다가 "소수를 위해 다수를 용서한다"고 했다. 카이로네이아에서 아르켈라오스를 이겼는데 자기 병사는 14명 실종이라 썼다. 오르코메노스에서는 깃발을 잡고 병사를 되돌렸다. 다르다노스에서 미트리다테스와 화약했다. 아시아에 2만 탈란트를 부과하고 병사들을 민가에 머물게 했으며, 이탈리아로 건너가 반대파를 연이어 격파했다. 콜리네 문 앞에서 삼니움의 텔레시누스와 싸워 왼쪽 날개가 무너져 진영으로 물러났으나 크라수스 쪽 승리로 적 대부분이 꺾였고, 항복한 6천을 원로원 연설 중 학살했다. 이어 방을 붙여 공민을 숙청하고(80, 220, 220명) 독재관이 되었다. 개선 뒤 '펠릭스'를 칭했으나 독재를 내려놓았다. 메텔라가 죽고 발레리아와 재혼했으며, 방탕한 생활 끝에 몸이 이에 먹히는 병으로 회고록 22권을 마친 이틀 뒤 죽었다. 폼페이우스가 장례를 치렀고 묘비문은 직접 지었다.

키몬 (기원전 약 510~450)

카이로네아 출신 플루타르코스는 먼저 다몬의 일화를 전한다. 로마 대장이 소년 다몬을 노리자 다몬은 동료 16명과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새벽 장터에서 그를 죽였고, 사형을 선고한 관리들마저 죽이고 달아났다. 지나던 루쿨루스가 도시의 무죄를 확인했고, 훗날 오르코메노스인의 고발 때 마케도니아 총독에게 진상을 써 보내 도시를 구했다. 그 감사로 저자는 루쿨루스를 키몬과 짝지어 쓴다고 밝힌다.

키몬은 밀티아데스와 트라키아 왕 올로로스의 딸 헤게시필레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50탈란트 벌금을 물고 옥사해 누이 엘피니케와 고아가 되었고, 처음엔 방탕하다는 평을 받았다. 살라미스 전에 말고삐를 여신께 바치고 방패를 들고 항구로 내려가 이름을 얻었고, 아리스티데스의 후원으로 테미스토클레스의 맞수가 되었다. 말과 인품만으로 파우사니아스에게서 동맹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에이온에서 페르시아인을 포위해 부테스가 스스로 불에 몸을 던지게 했고, 스키로스의 해적을 몰아내 테세우스의 유해를 아테네로 모셨다. 정원 울타리를 허물고 가난한 이에게 식탁을 열었으며 뇌물을 물리쳤다. 갤리선 200척으로 에우리메돈 하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해 200척을 잡고 같은 날 육전도 이긴 뒤 페니키아 선박 80척까지 잡았다. 타소스를 평정했으나 마케도니아를 치지 않았다는 고발을 받고 무죄가 되었다. 스파르타 지진 때 원군을 설득했으나 스파르타가 돌려보내자 10년 도편추방되었고, 타나그라에서 동료 100명이 그의 무구를 들고 전멸한 뒤 페리클레스의 발의로 소환되었다. 평화를 맺고 이집트·키프로스로 200척을 이끌었으나 불길한 꿈과 징조 끝에 키티온 포위 중 죽었고, 군은 30일간 그의 지휘로 귀환한 듯했다.

전승이 갈리는 대목도 있습니다. 에이온 이후 비문에 키몬 이름은 없으나 당대인이 최고 영예로 보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탁 개방이 라키아다이 구민에게만 한정되었다고 하고, 에포로스는 페르시아 해군 제독을 티트라우스테스·육군 사령관을 페렌다테스라 하나 칼리스테네스는 아리오만데스가 총지휘라 한다. 적함은 파노데모스는 600척, 에포로스는 350척이라 한다. 칼리스테네스는 왕이 평화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나 크라테로스의 문서집에 조약 초안이 있다고 한다. 키몬의 쌍둥이 아들의 어머니는 스테심브로토스는 클리토르의 여인이라 하고 디오도로스는 이소디케라 한다. 엘피니케의 혼인 여부는 "어떤 이들은"(Some affirm)이라 전한다. 죽음은 병사(病死) 혹은 소규모 접전의 부상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고 어떤 이는 달리 말한다". 이소디케 애가의 저자를 파나이티오스는 아르켈라오스로 본다.

루쿨루스 (기원전 약 118~56)

루쿨루스의 할아버지는 집정관이었고 아버지는 착취죄로 유죄였다. 청년 때 아버지의 고발자를 고발해 칭찬을 받았고, 술라가 회고록을 그에게 헌정했다. 형제 마르쿠스와 함께 조영관에 뽑혔다. 술라의 명으로 겨울에 작은 배 여섯 척으로 리비아·이집트에 가 선박을 모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선물을 대부분 사양했다. 피므브리아가 미트리다테스를 함께 막자는 제안을 거절했고, 아시아에 부과된 2만 탈란트 징수를 맡았다. 집정관 뒤 프라이키아라는 여인을 통해 킬리키아와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를 얻었다. 코타가 칼케돈에서 배 60척과 보병 4천을 잃고 갇히자 시민 한 명을 구하는 편이 낫다며 구원했고, 보병 3만, 기병 2,500으로 지구전을 택했다. 키지코스를 구하고 라인다코스·그라니코스에서 적을 대파했으며, 사상자가 30만에 가깝다고 전한다. 카비라에서 미트리다테스를 달아나게 하고 아미소스에서 병사들의 방화에 눈물을 흘렸다. 아시아 채무를 이자 1%로 정리해 4년 만에 갚게 했다. 티그라네스(보병 15만, 기병 5만 5천)를 티그라노케르타 앞에서 부상 100, 전사 5로 꺾었으나, 병사들의 반란과 클로디우스의 선동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접었다. 트리아리우스가 패해 7천이 전사했고, 폼페이우스가 후임이 되어 1,600명만 남겼다. 어렵게 개선식을 치른 뒤 정계에서 물러나 호화로운 별장·연회·도서관에 빠졌고, 정신이 흐려져 형제가 재산을 맡았다. 죽자 군중이 마르스 들판에 묻으려 했으나 형제가 설득해 투스쿨룸에 묻었다.

전승이 갈리는 대목도 있습니다. 피므브리아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우정, 혐오, 신의 섭리 중 어느 것인지 확언하지 않는다("whatever reason"). 사상자 30만은 "보고된다"(It is reported). 정계 은퇴 이유는 국가의 병폐 때문이라는 설과 이미 충분히 컸고 쉬고 싶어서라는 "다른 이들"의 설이 나란히 나온다. 말년의 정신 쇠퇴는 노령·병 탓이라는 설과, 코르넬리우스 네포스가 부정하며 해방노예 칼리스테네스의 약 탓이라 한 설이 갈린다. 카토의 말은 "그 말은 있었으나 카토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이들도 있다"고 전한다. 낙타를 로마인이 처음 본 것이라는 살루스티우스의 서술에는 의아해하며 반박한다.

니키아스 (기원전 약 470~413)

플루타르코스는 투키디데스·필리스토스와 겨루지 않고 흩어진 자료로 성품을 보충한다고 밝힌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 사후 부유한 귀족들이 클레온에 맞서는 방패로 세워 최고 자리에 올랐다. 천성이 소심해 전쟁에는 자신이 없었으나 행운이 이를 가렸고, 고발자를 두려워해 민중에게 겸손했다. 라우리온 은광의 재산으로 델로스에 다리를 놓고 종려나무를 봉헌하는 등 화려한 공연을 베풀었고 독실했다. 키테라를 점령했으며, 코린토스 전투에서 시신 둘을 두고 오자 휴전을 청해 승리의 영예를 포기했다. 필로스에서 스파르타인 400명이 스팍테리아에 갇히자 클레온의 도발에 지휘권을 넘겼는데 클레온이 20일 내에 해냈고, 니키아스는 수치를 얻었다.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전사하자 평화(니키아스 평화)를 이끌었으나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 사절을 속여 판을 흔들었다. 둘이 힘을 합쳐 히페르볼로스를 도편추방시켰다. 시칠리아 원정을 반대했으나 알키비아데스·라마코스와 함께 지휘관이 되었고, 시라쿠사로 곧장 가자는 안을 물리치고 지체했다. 속임수로 적을 카타나로 유인한 뒤 진을 쳤고 성벽을 거의 완성했으나, 라마코스가 전사하고 길리포스가 도착해 전세가 뒤집혔다. 데모스테네스가 배 73척, 중무장 5천으로 와 야간 공격에 실패(2천 전사)했고, 월식으로 철수를 한 달 미뤘다. 항구 해전에 패해 육로로 후퇴하다 아시나로스 강에서 길리포스에게 항복했고, 시라쿠사인들은 장군들의 처형을 결의했다.

전승이 갈리는 대목도 있습니다. 티마이오스는 두 장군이 처형이 아니라 헤르모크라테스의 전갈로 자살했다고 하여 투키디데스·필리스토스와 다르다. 테오프라스토스는 히페르볼로스 추방 때 니키아스 대신 파이악스가 맞섰다고 하나 대부분의 저자는 다르게 말한다. 메톤이 미친 척했다는 이야기와 밤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갈린다. 니키아스가 평화 협상에서 제비 뽑기를 돈으로 조작했다는 말은 테오프라스토스를 인용한다. 감옥 채석장에서 대부분 죽었고, 이마에 말 낙인이 찍힌 이도 있었다고 한다.

크라수스 (기원전 약 115~53)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감찰관과 개선식을 지낸 이의 아들로, 두 형제와 한 식탁을 쓰는 작은 집에서 자랐다. 재산은 300탈란트에서 7,100탈란트까지 불었고, 술라의 몰수 재산 매입과 불난 집 헐값 매입(건축 노예 500명 이상)이 큰 몫이었다. 마리우스·키나에게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자 스페인으로 달아나 비비우스의 해안 동굴에 8개월 숨었고, 이후 술라 편에서 싸웠으며 폼페이우스와 경쟁했다. 카이사르의 채무 830탈란트를 보증해 주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카푸아 검투사 78명이 탈주하며 시작되었다. 여러 법무관과 집정관이 패한 뒤 사령관이 된 크라수스는 달아난 병사 500명을 열 명씩 제비로 처형했고, 레기움 지협에 길이 300스타디온의 방벽을 쌓았다. 분리된 반란군 1만 2,300명을 죽였고 스파르타쿠스는 싸우다 전사했으나, 도주병을 잡은 폼페이우스가 공을 가로챘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두 번 집정관이 되었고(첫 임기에 1만 개 식탁 잔치), 시리아를 받아 호민관 아테이우스의 저주 속에 출정했다. 60세에 유프라테스를 건너 임페라토르로 환호받았으나 시리아에서 신전 재물 무게를 달며 시간을 보냈다. 카시우스의 만류와 아르타바제스의 6천 기병 제안을 물리치고 아리암네스를 따라 사막으로 들어갔다. 발리소스 강 부근에서 수레나의 파르티아 기병에게 포위되었고, 아들 푸블리우스는 기병 1,300을 이끌고 추격하다 전사했다. 카라이에서 안드로마코스에게 속아 늪에 빠졌고, 협상 자리의 혼란 속에 죽었으며 머리와 오른손은 호로데스에게 보내졌다. 2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승이 갈리는 대목도 있습니다. 말라카를 약탈했다는 설을 크라수스 본인은 늘 부인했다. 그를 벤 자는 포마크사트레스라 하나 "다른 이는 다른 사람이라 하고" 포마크사트레스는 머리와 손만 베었다고 하며, 플루타르코스는 이것이 "확실한 앎이 아니라 추측"이라 한다. 전사자 2만·포로 1만은 "일반적으로 말한다". 수레나 처형은 호로데스의 질투 때문이라 하고 호로데스는 아들 프라아테스에게 목 졸려 죽었다고 이어 서술한다. 호로데스가 수레나만 보낸 이유를 크라수스를 얕봐서라고 보는 일부의 설을 플루타르코스는 개연성이 낮다며 부정한다.

세르토리우스 (기원전 약 126~73)

사비니 지방 누르시아의 명문 출신으로,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레아 밑에서 자랐다. 변론으로 이름을 얻다가 군사 쪽으로 기울었다. 카이피오 휘하에서 킴브리·테우토네스에 패해 부상당하고도 갑옷을 입은 채 론 강을 헤엄쳐 건넜고, 마리우스 밑에서는 켈트 복장으로 적진을 정탐했다. 스페인 카스툴로에서 기리소이니아인의 야습을 받자, 그들의 무구를 입고 성에 들어가 몰살시켰다. 마르시 전쟁 때 한쪽 눈을 잃고도 명예로 여겼고, 호민관 선거에서 술라파에 밀려 술라의 적이 되었다. 킨나 편에 서서 마리우스 영입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졌고, 마리우스가 풀어 준 노예 4천 명이 만행을 저지르자 모두 쏘아 죽였다. 술라가 우세하자 스페인으로 가 길을 막은 산악 주민에게 통행세를 내며 "시간을 사야 한다"고 했고, 세금 감면과 성 밖 숙영으로 민심을 얻었다. 술라의 장군 안니우스에게 밀려 아프리카로 갔다가 마우레타니아에서 아스칼리스를 치고 탕기스를 점령했다. 안타이오스 무덤의 시신이 60완척이었다고 한다(전하는 말). 루시타니아인의 요청으로 장군이 되어 흰 사슴을 디아나의 계시라 내세웠다. 병력은 로마인 2,600, 아프리카인 700, 방패병 4,000, 기병 700뿐이었으나 보병 12만의 로마 장군 넷에 맞섰고, 메텔루스를 지치게 했으며, 라우론에서 폼페이우스를 묶어 두었다. 귀족 자제를 오스카에서 가르쳤으나 실은 인질이었다. 미트리다테스와 동맹하되 아시아 속주는 내주지 않았다. 시기한 페르페나 일파가 잔치에서 안토니우스가 칼로 찔러 죽였고, 폼페이우스는 그의 서한을 읽지 않고 태우고 페르페나를 처형했다. 마지막까지 산 자는 아우피디우스뿐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말년의 스페인 인질 학대가 그의 관용이 꾸민 것이었나 의심하면서도, 역경에 시달린 성정이 변한 것이라 본다(필자 의견).

에우메네스 (기원전 약 362~316)

두리스에 따르면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 카르디아의 가난한 마부의 아들이나 교양 있게 자랐고, 필리포스가 레슬링 경기에서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버지와의 우정 때문이라는 설이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알렉산드로스의 수석 서기였고, 바르시네의 자매를 아내로 얻어 왕의 인척이 되었다. 헤파이스티온과 다투었고, 함대 자금 300탈렌트 요구에 100만 보냈다가 천막이 불탔는데, 녹은 금은이 1천 탈렌트가 넘었다. 왕 사후 카파도키아·파플라고니아 총독이 되었으며, 레온나토스가 왕위를 노린다고 페르디카스에게 알리고 밤에 도망쳤다. 기병 6,300을 길렀고,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가 침공하자 총사령이 되어 먼저 네오프톨레모스를 격파했다. 케레스가 승자에게 이삭 관을 씌우는 꿈을 길조로 삼았고, 적장이 크라테로스임을 병사들에게 숨겼다. 크라테로스가 쓰러져 죽고 네오프톨레모스도 에우메네스와 맞붙어 죽었으며, 에우메네스는 죽어 가는 크라테로스 곁에서 울었다. 페르디카스가 이틀 전 이집트에서 살해되어 마케도니아인들은 에우메네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오르키니아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패하고, 기병 500, 중무장 보병 200과 함께 노라 요새에 갇혀 말을 매달아 운동시켰다. 안티고노스의 맹세문을 올림피아스와 왕들에게 맹세하도록 고쳐 포위를 풀었다. 은방패군 안티게네스·테우타모스에게는 알렉산드로스의 천막 꿈으로 협의 장소를 만들었다. 그가 병들어 가마로 실려 나오자 안티고노스가 물러났고, 모닥불 계략으로 또 속였다. 전투 뒤 짐을 빼앗기자 은방패군이 그를 묶어 넘겼고, 안티고노스는 굶기다가 사형 집행인을 보냈다.

아게실라오스 (기원전 약 444~360)

아르키다모스의 둘째 아들로, 왕위는 형 아기스의 몫이어서 엄격한 복종 교육을 받았다. 한쪽 다리가 짧았으나 스스로 농담거리로 삼았고, 조각상·초상을 금했다. 아기스 사후 리산드로스가 레오티키다스를 알키비아데스의 사생아라 하며 그를 왕으로 밀었고, 절름발이 왕을 경계한 신탁은 "순수한 혈통" 문제라는 해석으로 넘겼다. 즉위 뒤 아기스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외가에 나눠 주고, 감독관·원로원을 깍듯이 대접하며 왕권을 은밀히 넓혔다. 페르시아의 해군 증강 소식에 스파르타인 30명, 해방 헬롯 2천, 동맹군 6천을 청해 아시아로 갔다. 에페소스에서 위세를 누리던 리산드로스를 일부러 눌러 고기 써는 자로 삼았고, 리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로 떠났다. 티사페르네스를 카리아로 가는 척 속여 프리기아를 약탈하고 사르디스 부근에서 이겼으며, 티사페르네스는 티트라우스테스에게 참수되었다. 파르나바조스와는 풀밭에서 회담했다. 에피키디다스가 본국 소환을 전하자 수사·엑바타나 원정 구상을 접고 곧바로 돌아와, 페르시아 궁수 천 명이 자신을 몰아냈다고 했다(뇌물로 아테네·테베를 선동했다는 뜻). 코로네아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도 이겼다. 포이비다스의 카드메이아 점령을 감쌌고, 스포드리아스를 아들 아르키다모스의 부탁 탓에 무죄로 이끌어 비난받았다. 에파메이논다스와 보이오티아 독립을 두고 논쟁하다 화를 내며 테베를 평화에서 제외했고, 레우크트라에서 스파르타인 천 명과 클레옴브로토스 왕이 죽었다. 도망친 자들에게는 법을 "오늘 하루 잠재우겠다"며 구제했다. 4만(총 7만)의 에파메이논다스가 라코니아를 침공하자 성안을 굳게 지켜 스파르타를 구했다(테베군이 물러난 이유는 사가마다 다르다고 한다). 말년에 이집트에서 타코스를 버리고 네크타나비스를 도운 뒤, 귀국길 메넬라오스 항에서 84세로 죽었다(재위 41년). 시신은 밀랍에 싸여 운구되었다.

폼페이우스 (기원전 106~48)

로마인들은 포악한 아버지 스트라보는 미워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어릴 적부터 사랑했다. 젊은 날 아버지 진영의 모반 때 문 앞에 엎드려 눈물로 병사들을 되돌렸고, 아버지 횡령 소송은 변론으로 이겨 재판관 안티스티우스의 딸 안티스티아와 결혼했다. 스물셋쯤 피케눔에서 3개 군단을 모아 술라에게 갔고, 술라는 그를 임페라토르라 불렀다. 술라의 뜻으로 아이밀리아와 재혼했으나 그녀는 곧 해산 중 죽었다. 시칠리아에서 카르보를 재판해 처형했고, 아프리카에서 도미티우스군 2만 중 3천만 살아남았다고 하며(전언) 40일 만에 평정했다. '마그누스' 칭호는 술라가 붙였다는 설과 군대가 먼저 불렀다는 설이 있다. 술라가 말려도 개선식을 올렸다. 레피두스를 꺾고,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싸워 라우론을 잃고 수크로에서 위기를 겪었으며,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된 뒤 페르페나를 처형하고 서한을 읽지 않고 태웠다. 크라수스와 집정관이 되어 호민관직을 되살렸고, 기사 심사에서 감찰관에게 "모든 복무를 내 지휘 아래 했다"고 답했다. 가비니우스법으로 해적 토벌 전권을 얻어 군선 500척과 보병 12만으로 바다를 13구역으로 나눠 소탕했고, 3개월 만에 군선 90척과 포로 2만을 얻어 이들을 정착시켰다. 이어 마니리우스법으로 루쿨루스 대신 미트리다테스와 싸워 달밤 전투에서 1만 이상을 죽이고, 티그라네스에게 6천 탈렌트 벌금을 물렸으며, 시리아를 속주로 삼고 유대 왕을 사로잡았다. 이틀간 개선식을 올렸다. 이후 카이사르와 손잡고 율리아와 혼인했으나 율리아와 크라수스가 죽자 틈이 벌어졌고,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넘자 로마를 떠났다.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 2만 2천에 맞서 그 두 배 남짓을 거느렸으나 기병이 무너져 달아났다. 이집트에서 아킬라스와 셉티미우스에게 찔려 59세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56~323)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쪽으로 헤라클레스, 어머니 쪽으로 아이아코스의 후손이라고 모두가 인정한다. 헤카톰바이온월 6일,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탄 날 태어났고, 필리포스는 포티다이아를 함락한 직후 일리리아 승전, 올림피아 경마 우승, 아들 출생의 세 소식을 한꺼번에 받았다. 소년 때 아무도 다루지 못한 말 부케팔로스를 그림자를 피해 해 쪽으로 돌려 길들이자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는 너에게 너무 작다"고 했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이 되었다. 16세에 섭정을 맡았고 카이로네이아에서 테베 신성대에 가장 먼저 돌격했다.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20세에 즉위해 다뉴브까지 진군하고, 반란한 테베를 함락해 3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6천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계산된다). 코린토스에서 디오게네스를 만났고, 델포이 무녀에게서 "아들아, 너는 무적이다"라는 답을 받았다. 병력은 보병 3만~4만3천, 기병 3천~4천으로 자료마다 다르다. 그라니코스에서 이겼고, 이소스에서 다리우스를 패주시켜 11만 이상을 쳐부순 뒤 그의 어머니·아내·딸들을 정중히 대했다. 티루스는 7개월 포위 끝에 함락했고,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 터를 잡은 뒤 암몬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 가우가멜라에서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며 야습을 물리치고 다리우스를 격파했다. 수사에서 4만 탈란트를 얻었고 페르세폴리스 궁에 불을 질렀으나 곧 후회했는데, 술 김의 일이라는 설과 계획이었다는 설이 갈린다.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사로잡혀 죽어 가며 오른손을 전했다. 이후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을 처형하고, 술자리에서 클레이토스를 창으로 찔러 죽인 뒤 통곡했다. 숭배의 절을 거부한 칼리스테네스는 헤르몰라오스의 음모와 엮여 죽었는데, 그 최후는 설이 갈린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식 복장을 일부 받아들여 마케도니아인들을 서운하게 했다. 인도에서 포로스를 이겼고 부케팔로스가 죽었다. 병사들이 갠지스 도하를 거부해 회군했고, 말리족 성에서 화살을 맞아 죽을 뻔했다. 귀환 행군에서 보병 12만·기병 1만5천 중 4분의 1쯤만 돌아왔다. 수사에서 합동 혼례를 열고 병사들의 빚 9,870탈란트를 갚았으며,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격하게 슬퍼했다. 바빌론에서 불길한 징조를 겪은 뒤 열병이 나 다이시오스월 28일 저녁에 죽었다(일지 기준). 아리스토불로스는 30일이라 하고 독살설도 있으나, 플루타르코스는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로 본다.

카이사르 (기원전 100~44)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술라의 미움을 샀다. 술라가 키나의 딸인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고 했으나 거부해 지참금을 몰수당했다. 도피하다 술라 병사들에게 잡혔을 때 2탈란트로 풀려나 비티니아로 갔고, 돌아오는 길에 해적에게 붙잡혔다. 해적이 20탈란트를 부르자 비웃으며 50탈란트를 약속했고, 38일간 해적과 어울려 지내며 훗날 모두 십자가에 매달겠다고 농담했다.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자 배를 모아 해적을 잡아 페르가몬에서 실제로 십자가형에 처했다. 로도스에서 수사학을 배웠고, 귀국 후 아낌없는 향응과 조영관 때의 검투 320쌍 등으로 민심을 얻었다. 공직을 맡기 전에 이미 빚이 1,300탈란트였다. 마리우스의 상을 카피톨리움에 세웠고, 대제관 선거에서 카툴루스를 이겼다. 카틸리나 사건에서는 정범들의 사형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에스파냐 총독으로 가기 전 크라수스가 830탈란트를 보증해 주었다. 알프스 마을에서 "로마의 둘째보다 여기서 첫째가 낫다"고 말했다. 집정관 때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화해시켜 힘을 모았고,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으며, 갈리아·일리리쿰과 4개 군단을 5년간 받았다. 동료 비불루스는 집에 틀어박혔고, 반대하던 카토는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갈리아 전쟁은 10년이 안 되어 800여 도시를 점령하고 300개 부족을 복속시켰으며, 상대 300만 중 100만을 죽이고 100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라인강에 열흘 만에 다리를 놓았고 브리타니아에 두 번 건넜다. 알레시아에서는 성안 17만, 구원군 30만 사이에서 두 겹 성벽을 쌓고 이겼으며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서 죽고 율리아도 죽자 폼페이우스와 대립했다. 루비콘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건넜고, 60일 만에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파르살로스에서는 폼페이우스 쪽 보병 4만5천·기병 5천에 맞서 보병 2만2천·기병 1천으로 이겼고,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만나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렀다. 젤라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보고했다. 타프수스에서 5만을 죽였다는 설명이 있으나, 그가 발작 때문에 전투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문다에서도 이겼다. 종신 독재관이 되었으나 왕관 문제로 반감을 샀고, 3월 이두스에 폼페이우스 석상 아래서 쓰러졌다. 상처는 23군데였다고 한다. 향년 56세였다.

포키온 (기원전 약 402~318)

플루타르코스는 포키온의 혈통이 천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며, 선반공의 아들이라는 이도메네우스의 보고를 의심한다. 포키온은 플라톤과 크세노크라테스의 학원에서 배웠고, 웃거나 우는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으며 말이 극도로 간결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가 일어나면 "내 문장을 쳐내는 가지치기 칼"이라 했다. 젊어서 카브리아스를 따라 낙소스 해전에서 좌익을 맡아 이름을 얻었다. 그는 정치가와 장군이 분업하는 시대에 둘을 겸하려 했으며, 부재중에도 모두 45번 장군으로 뽑혔다. 에우보이아에서 필리포스 일파와 싸워 타미나이에서 이겼고, 플루타르코스(에레트리아)를 쫓아냈다. 비잔티움을 도와 필리포스를 헬레스폰토스에서 몰아냈고, 메가라에 장벽을 쌓게 했다. 아들 포코스는 절제를 가르치려 스파르타식 교육에 보냈다. 아내는 손님에게 "내 장식은 20년째 장군인 남편"이라고 했다.카이로네이아의 패배 뒤 평화 조건을 먼저 확인하자고 했으나 뜻이 꺾였고, 기병과 선박을 대야 함을 안 아테네인들이 곧 후회했다. 그는 필리포스가 죽었을 때 환호를 말렸다. 테베가 무너진 뒤 알렉산드로스가 데모스테네스 등의 인도를 요구하자 "친구 니코클레스라도 요구하면 내주겠다"며 협상을 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청원서만 받아들였고, 100탈란트 선물과 도시 4곳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하르팔로스의 700탈란트도 거절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소식에 성급한 봉기를 말렸고 라미아 전쟁에도 반대했으나, 미키온은 직접 쳐서 이겼다. 크라논에서 그리스가 지자 안티파트로스를 찾아가 교섭했으나, 그는 데모스테네스·히페리데스의 인도, 재산 자격에 따른 참정권, 무니키아 수비대를 요구했고, 참정권을 잃은 시민이 1만2천을 넘었다. 안티파트로스 사후 니카노르를 지나치게 믿어 피라이우스를 놓쳤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시민에 대한 의무를 어긴 것으로 보는 듯하다. 폴리페르콘이 민주정 복원을 선언하자 아그노니데스가 반역죄로 고발했다. 그는 폴리페르콘에게 갔으나 넘겨져 아테네 군중 앞에서 사형 표결을 받았다. 무니키온월 19일 독약을 마셨는데 독이 모자라 집행인이 12드라크마를 요구했고 시신은 국경 밖에서 화장되었으며, 아내가 유골을 집 화덕 곁에 묻었다. 얼마 뒤 아테네는 청동상을 세우고 아그노니데스를 처형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죽음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고 쓴다.

소 카토 (기원전 95~46)

카토의 가문은 증조부 대(大)카토 덕에 빛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동생 카이피오, 누이 포르키아, 이부 누이 세르빌리아와 함께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쉽게 웃지 않았으며, 배움은 느렸으나 한번 익힌 것은 잊지 않았다. 폼파이디우스 실로가 창밖에 매달고 협박해도 끄덕하지 않았다. 14세에 술라의 집에서 잘린 머리들을 보고 스승에게 "왜 아무도 저자를 죽이지 않느냐"며 칼을 달라 했다. 동생을 지극히 사랑했고, 아폴론 사제가 되어 유산 120탈란트를 받았으며, 스토아 철학자 안티파트로스에게 배웠다. 아틸리아와 혼인했으나 그녀의 부정으로 이혼했고 뒤에 마르키아와 재혼했는데, 마르키아 일은 말이 많았다.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에 동생 때문에 지원했고, 호민관으로 마케도니아에 가서 한 군단을 맡아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생이 아이노스에서 죽자 8탈란트의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는데, 유골을 체로 걸러 금을 찾았다는 소문은 플루타르코스가 믿지 않는 듯하다. 아시아 여행 중 안티오키아에서 폼페이우스의 하인으로 오해받은 일이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일어나 맞이했다. 재무관이 되어서는 서기들의 부정을 바로잡고 술라 밑에서 학살을 도운 자들에게 받은 돈을 환수시켰다. 호민관에 출마해 메텔루스 네포스의 선동을 막았고, 카틸리나 음모 때 카이사르를 공격해 정범들의 처형을 이끌었다. 폼페이우스의 혼인 제안을 "내 조국의 안전을 폼페이우스의 영광에 볼모로 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카이사르의 집정관 때 끌려가고 땅 분배법의 선서를 마지못해 했으며, 클로디우스의 책략으로 키프로스에 파견되어 7천 탈란트에 조금 못 미치는 은을 가져왔다. 법무관이 되어 부패를 막으려 했고, 집정관에는 낙선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를 따랐고, 파르살로스 뒤 아프리카로 가 우티카를 맡았다. 스키피오가 우티카 주민을 학살하려 하자 막아 냈다. 타프수스 패전 소식이 오자 300인 회의는 카이사르가 두려워 마음을 바꿨고, 카토는 노예 해방 결의를 불법이라며 말렸다. 그는 의원들을 배로 피신시킨 뒤 플라톤의 영혼 대화편을 읽었다. 아들이 치워 둔 칼을 되찾아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라 하고 잠들었다가, 새벽에 가슴을 찔렀다. 의사가 내장을 넣고 꿰매려 하자 상처를 다시 찢고 숨졌다. 우티카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자유롭고 패하지 않은 사람이라 부르며 장례를 치렀고, 그는 48세였다.

아기스 (기원전 약 265~241)

아기스는 에우리폰 왕가의 에우다미다스의 아들로 아게실라오스의 6대 후손이며, 다른 왕가의 레오니다스와 함께 왕이었다. 레오니다스는 셀레우코스 왕을 따라 페르시아 궁정에서 오래 지내 그 오만을 흉내 냈다. 아기스는 어머니 아게시스트라타와 할머니 아르키다미아 밑에서 사치스럽게 자랐으나 스무 살 전에 쾌락을 끊고 거친 스파르타 옷을 입었다. 에피타데우스 감독관의 토지 처분법 뒤 부가 소수에게 쏠려 옛 스파르타 가문은 700가구 남짓, 땅 가진 자는 약 100가구였다. 아기스는 리산드로스, 만드로클리다스, 빚 때문에 가담한 외삼촌 아게실라오스,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얻었다. 리산드로스가 감독관이 되어 낸 레트라는 빚 탕감, 땅을 4,500구획과 15,000구획으로 분배, 15개 조 편성이었으나 장로회에서 한 표 차로 부결됐다. 아기스는 자기 땅과 600탈렌트를 내놓겠다고 했다. 리산드로스는 유성을 봤다며 레오니다스를 외국 여인과 혼인한 죄로 폐위하고 클레옴브로토스를 왕으로 세웠다. 아게실라오스의 꾀로 빚 문서만 불타고 토지 분배는 미뤄졌다. 아기스는 아카이아를 돕는 원정에서 젊고 가난한 병사들을 질서 있게 이끌어 그리스인의 칭송을 받았고, 코린토스 근처에서 아라토스와 합류했으나 싸움 없이 돌아왔다. 그사이 감독관 아게실라오스의 탐욕에 민심이 돌아서 레오니다스가 복귀했다. 클레옴브로토스는 아내 킬로니스의 탄원으로 목숨을 건져 추방됐다. 아기스는 믿던 암파레스·다모카레스·아르케실라오스에게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교살됐으며 할머니와 어머니도 처형됐는데, 어머니는 "스파르타에 이로움이 되기를" 하고 목을 내밀었다. 감옥에서 아기스는 후회하느냐는 물음에 그만한 계획은 후회할 수 없다고 답했다. 감독관에게 죽은 최초의 왕이었다. 바톤은 아라토스가 싸우려 했다고 쓰나 플루타르코스는 아라토스 자신의 기록을 들어 틀렸다고 본다. 테오폼포스가 메세니아인에게 죽었다는 설은 스파르타인이 부인한다. 파시파에의 정체도 설이 갈린다.

클레오메네스 (기원전 약 260~219)

레오니다스는 아기스의 아내 아기아티스(글릴리포스의 상속녀)를 어린 아들 클레오메네스와 억지로 혼인시켰다. 그녀는 남편에게 다정했고 클레오메네스는 아기스의 계획을 들으며 감화됐다. 그는 절제는 아기스 같으나 더 격렬했다. 왕위를 이은 뒤 연인 크세나레스가 아기스 이야기를 꺼리자 홀로 계획을 세우고, 전쟁이 변혁에 유리하다 보아 아카이아와 싸웠다. 아라토스가 야간 기습에 실패한 뒤 클레오메네스가 횃불과 사다리를 비꼬는 편지를 보내자 아라토스는 웃었다고 한다. 팔란티움에서 아카이아 보병 2만·기병 1천 앞에 스파르타인 5천 미만으로 맞섰으나 아라토스가 물러났고, 리카이온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아기스의 아우 아르키다모스를 불렀으나 아기스 살해자들이 그를 죽였다. 어머니의 재혼 상대 메기스토노스와 함께 감독관 식탁을 습격해 감독관 넷과 열 명 넘게 죽이고 80명을 추방했다. 땅을 공유로 나누고 빚을 없앴으며 4,000명을 충원하고 아우 에우클레이다스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아르고스를 얻었으나 아라토스가 불러들인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와 맞서다 아르고스가 반란하여 코린토스를 잃었고, 아내도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원조 조건으로 어머니 크라테시클레아와 아이들을 인질로 이집트에 보냈고, 어머니는 담담히 배에 올랐다. 메갈로폴리스를 기습해 되돌려주겠다 했으나 필로포이멘이 막자 약탈했다. 셀라시아에서 폴리비오스 기준 2만 대 3만으로 패해 스파르타인 6,000명 중 200명만 남았다. 이집트에서 먼저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금 24탈렌트를 주며 존중했으나, 후계 왕은 방탕했고 니카고라스의 모함으로 클레오메네스는 갇혔다. 그는 열세 명과 탈출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했으나 호응이 없어 동료들과 자결했다. 재위 16년, 어머니와 아이들은 처형됐다. 아르키다모스 살해를 클레오메네스가 반대했는지는 필라르코스는 반대했다 하나 불확실하다. 다모텔레스가 안티고노스에게 매수됐다는 말도 "일부의 말"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기원전 약 163~133)

티베리우스는 감찰관·집정관을 지낸 아버지 그라쿠스와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사이에서 났다. 아버지는 침실의 뱀 한 쌍 앞에서 점쟁이 말대로 수컷을 죽이고 곧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청혼도 물리치고 열두 자녀 중 남은 아이들을 길렀다. 티베리우스는 차분했고 아홉 살 아래 동생 가이우스는 격렬했다. 젊어서 점술관단에 들었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딸과 혼인했다. 아프리카에서 작은 스키피오 밑에서 적의 성벽에 처음 올랐고, 재무관으로 누만티아에서 집정관 만키누스가 포위되자 그만 믿는 적과 협상해 로마인 2만 명을 살렸다. 로마에서 협정이 비난받자 민중은 집정관만 묶어 넘기자고 했다. 그는 호민관이 되어 500유게룸(원문 "five hundred acres") 상한을 어긴 부자들의 공유지를 되찾아 가난한 시민에게 나누는 법을 냈다. 크라수스·스카이볼라·아피우스와 상의한 온건한 법이었으나 부자들이 반발했고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가 거부했다. 티베리우스는 국고를 봉인하고 관직 업무를 정지시켰으며, 35개 부족 중 17개가 파면에 표를 던진 시점에 옥타비우스를 끌어안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파면했다. 토지위원은 티베리우스, 장인 아피우스, 동생 가이우스였고, 그는 옥타비우스 자리에 자기 피보호민을 앉혔다. 아탈로스의 유산을 나누려 하자 왕관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 번째 호민관직을 구하던 날 불길한 징조 끝에 카피톨로 갔고, 나시카가 원로원 의원들과 몽둥이로 덮쳐 티베리우스는 의자 다리에 맞아 죽고 300여 명이 쇠붙이 없이 죽었다. 시신은 강에 던져졌고 동생이 밤에 장례 지내게 해 달라는 청도 거절됐다. 블로시우스는 풀려났다. 아피우스 혼담을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스키피오 이야기로 돌리는 이들이 있고 폴리비오스는 달리 쓴다. 토지법의 동기도 여러 설이 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기원전 154~121)

가이우스는 형이 죽은 뒤 한동안 조용히 지냈으나 웅변에 힘썼고, 재무관으로 집정관 오레스테스와 사르디니아로 갔다. 키케로에 따르면 형이 꿈에 나타나 같은 삶과 죽음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사르디니아에서 절제와 근면으로 연장자들도 앞질렀고, 설득으로 병사들의 겨울옷을 마련했고, 아프리카의 미킵사 왕이 곡물을 보낸 일로 원로원의 의심을 샀다. 돌아와 감찰관들에게 12년 복무, 빈 주머니로 귀환했다고 변론했다. 호민관 선거에는 이탈리아 각지에서 사람이 몰렸으나 네 번째로 당선됐다. 형의 죽음을 규탄하며 불법 추방을 민중이 다루게 하는 법을 냈고(어머니 간청으로 옥타비우스 관련 법은 철회), 이어 공유지 분배, 군복 공급과 17세 미만 징집 금지, 이탈리아인 투표권, 곡물 값 인하, 재판관을 원로원 300명에 기사 300명을 더해 600명으로 하는 법을 냈다. 연설할 때 처음 원로원이 아닌 민중 쪽을 향했다. 도로를 곧게 닦고 이정표를 세워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두 번째 호민관에 뽑혔으나 원로원은 드루수스를 내세워 더 후한 법으로 민중을 가로챘다. 아프리카에서 70일 만에 카르타고 재건을 마치고 돌아왔고, 세 번째 호민관에는 동료들의 표 조작으로 떨어졌다. 집정관 오피미우스가 법을 뒤집으려는 중 수행원 안틸리우스가 살해되자 원로원은 비상 권한을 줬다. 가이우스는 짧은 단검만 숨기고 나섰고 아내 리키니아가 매달려 말렸으나 뿌리쳤다. 풀비우스와 맏아들이 죽고 협상은 거절됐다. 가이우스는 디아나 신전에서 자결하려다 막혔고 나무다리에서 두 친구가 막는 사이 도망쳐, 푸리아이 숲에서 하인 필로크라테스의 손에 죽었다. 머리는 금으로 17파운드 남짓 나갔고 3,000명이 강에 던져졌다. 코르넬리아는 아들들의 일을 눈물 없이 옛 영웅담처럼 이야기했다. 코르넬리아가 그를 도왔다는 말과 부인하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산 채로 잡혔고 하인이 먼저 죽었다는 설도 있다.

데모스테네스 (기원전 384~322)

플루타르코스는 소시우스에게 쓰는 형식으로 작은 고장 출신도 덕을 기를 수 있다고 시작한다. 데모스테네스의 아버지는 칼 공방을 가진 부유한 시민이었고, 일곱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약 15탈렌트를 남겼으나 후견인들이 횡령했다. 허약해 '바탈로스'라 놀림받았다. 칼리스트라토스의 오로포스 재판 변론에 감동해 웅변을 택하고 이사이오스에게 배웠으며, 후견인들을 이겼으나 재산은 거의 못 찾았다. 처음 민회에서는 호흡·발음·긴 문장 때문에 조롱받았으나, 배우 사티로스에게 낭독과 몸짓의 힘을 배우고 지하 연습실에서 머리 반쪽을 밀고 몇 달씩 훈련했다. 조약돌을 물고 말하고 달리며 낭송했다. 즉흥을 피해 "등불 냄새가 난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는 연설 전 준비를 중시해 즉흥 연설을 거의 하지 않았다. 32세에 미디아스를 고발했다가 3,000드라크마를 받고 물러났다. 필리포스에 맞서 에우보이아를 되찾고 비잔티움·페린토스를 구했으며, 필리포스가 엘라테이아를 차지하자 홀로 나서 테베와의 동맹을 이끌었다. 카이로네이아에서는 방패를 버리고 달아났으나 아테네인은 그에게 전사자 추도 연설을 맡겼다. 필리포스가 죽자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렉산드로스에게 테베가 무너진 뒤 8명 인도 요구에는 양과 개 우화를 들었다. 크테시폰 재판에서 아이스키네스를 압도했다. 하르팔로스가 20탈렌트짜리 컵을 보내 받았고, 아레오파고스에서 50탈렌트 벌금을 받고 탈출해 아이기나·트로이젠에서 망명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소환됐고 벌금은 제단 비용 50탈렌트로 상쇄됐다. 크라논 패전 뒤 데마데스의 사형 동의로 쫓겨 칼라우리아 신전에서 아르키아스 앞에서 독으로 죽었고 동상이 세워졌다. 독이 갈대·반지·팔찌 중 어디 있었는지 기록이 갈리고, 데모카레스는 신의 은총이라 본다. 아이스키네스가 말한 어머니 출신은 진위를 단언하지 않는다.

키케로 (기원전 106~43)

키케로의 어머니는 좋은 집안이나 아버지는 직공의 아들이라는 설과 볼스키 왕 후손이라는 설로 갈린다. 이름 키케로는 콩(cicer) 같은 코끝 홈에서 왔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두드러져 아버지들이 그를 보러 학교에 올 정도였고, 시 「폰티우스 글라우쿠스」를 썼다. 술라 시절 크리소고누스가 사들인 재산 사건에서 로스키우스를 변호해 이겼고, 술라가 두려워 그리스로 가 안티오코스와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에게 배웠다. 델포이 신탁은 자신의 천성을 길잡이로 삼으라 했다. 시칠리아 재무관으로 호평받고 베레스를 고발해 유죄로 만들었으며, 법무관을 거쳐 집정관이 됐다. 집정관 때 카틸리나에게 도시를 떠나라 명했고, 카틸리나는 3백 명을 이끌고 떠나 2만 명가량을 모았다. 렌툴루스 일당이 알로브로게스 사절을 끌어들인 것이 문서로 잡혔고, 카이사르의 구금안과 카토의 사형안 중 사형이 의결돼 키케로가 집행하며 "그들은 살았었다"고 외쳤다. 카토가 '조국의 아버지'라 불렀다. 자화자찬과 조롱은 미움도 샀다. 클로디우스가 호민관이 되어 추방령을 내리자 키케로는 도시를 떠났고 집은 불탔으며, 16개월 만에 돌아왔다. 클로디우스의 신성모독 재판에서는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는데, 아내 테렌티아와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말이 돌았다. 밀로 변호에서는 폼페이우스 군대 앞에서 떨어 실패했다. 킬리키아 총독으로 청렴하게 다스려 임페라토르로 불렸다.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파르살로스 뒤 카이사르와 화해했다. 테렌티아와 이혼하고 젊은 여인과 혼인했고 딸 툴리아가 죽었다. 카이사르 암살 뒤 안토니우스와 맞서고 젊은 카이사르와 손잡았으나 삼두가 그를 명단에 올렸다. 카피타이에서 까마귀 징조 뒤 헤렌니우스에게 64세에 죽었고 머리와 손은 연단에 걸렸다. 카이사르가 이틀간 그를 위해 다퉜다는 것은 "it is said" 수준의 전언이다. 필롤로고스의 배신은 티로가 언급하지 않는다.

데메트리오스 (기원전 337~283)

안티고노스와 스트라토니케(코르하이오스의 딸)의 아들이며, 형제 필리포스는 어려서 죽었다. 일부는 그가 안티고노스의 형제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안티고노스와 재혼해 아들로 여겨졌다고 전한다. 외모가 빼어나 어떤 화가나 조각가도 닮게 그리지 못했고, 향연에서는 사치스러웠으나 전쟁에서는 격렬했다. 청년 시절 안티고노스의 꿈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진 미트리다테스에게, 맹세 때문에 말 대신 창끝으로 땅에 '도망쳐라'고 써서 그를 살렸다. 22세에 처음 단독 지휘한 가자 부근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져 8천이 포로, 5천이 전사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천막과 재물을 돌려보냈고, 그는 곧 킬레스와 병사 7천을 사로잡아 똑같이 돌려보냈다. 이어 5천 탈렌트와 함선 250척으로 아테네 피레우스에 들어가 파레론의 데메트리오스를 몰아내고 도시를 해방하자, 아테네는 안티고노스 부자에게 왕과 구원신의 칭호 등 지나친 영예를 바쳤고 그는 파르테논에 묵으며 방탕했다. 키프로스 살라미스 해전(그의 180척 대 프톨레마이오스 150척)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8척만 남기고 도망쳤고, 이 일로 안티고노스 부자가 왕으로 불리자 다른 후계자들도 따랐다. 로도스는 오래 포위하고도 화평하고 물러났다. 펠로폰네소스에서 데이다메이아와 혼인했고 이스트모스에서 그리스 총사령관으로 선포되었다. 입소스에서 기병을 이끌고 안티오코스를 너무 멀리 쫓다 코끼리에게 퇴로가 끊겼고, 그가 구하러 오리라 믿던 안티고노스는 쓰러졌다. 아테네는 입항을 거부했으나 그는 훗날 기근에 빠진 아테네를 굴복시켰고, 알렉산드로스를 라리사에서 죽여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다. 접근하기 어렵고 오만한 데다 보병 98,000과 함선 5백 척의 대원정을 준비하던 중 피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쳐들어오자 군이 돌아서 허름한 옷으로 달아났다(왕위 7년). 아내 필라는 독을 먹고 죽었다. 아시아에서 재기하다 병사 8천을 잃고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해 시리아 케르소네소스에 3년 갇혀 술과 주사위로 지내다 54세에 병으로 죽었고, 아들 안티고노스가 유골을 코린토스를 거쳐 데메트리아스에 안치했다.

안토니우스 (기원전 83~30)

조부는 마리우스가 죽인 웅변가였고, 아버지는 후한 성품의 크레타의 안토니우스였다. 어머니 율리아는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재혼한 렌툴루스는 카틸리나 음모로 키케로에게 처형되었고, 이것이 키케로에 대한 원한의 첫 계기였을 것이라 한다. 안토니우스는 시신 매장이 거부되었다고 주장하나 플루타르코스는 명백한 오류라고 본다. 청년 때 쿠리오와 어울려 250탈렌트의 빚을 졌고 그리스로 떠났다. 가비니우스 휘하 기병대장으로 유대의 아리스토불로스를 사로잡고 이집트에서 펠루시움을 점령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살을 막았다. 쿠리오를 따라 카이사르 편이 되어 호민관과 점술관이 되었고, 변장하고 카이사르 진영으로 달아나 내란의 구실을 주었다. 브룬디시움에서 보병 2만과 기병 8백을 싣고 바다를 건넜고, 파르살로스에서는 카이사르가 우익을, 그가 좌익을 맡았다. 이후 로마에서는 기병대장으로서 방탕하다고 평판을 잃었다. 루페르칼리아에서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바치려 했고, 암살 뒤에는 사면 결의를 이끌었으나 장례 연설에서 피 묻은 옷을 들어 민중을 격분시켰다. 젊은 카이사르와 불화해 모데나에서 패하고 알프스에서 굶었으나 레피두스 군을 얻어 17군단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두정치에서 키케로를 내주어 그의 머리와 오른손을 연단에 걸었고, 3백 명이 처형되었다. 필리피에서 카시우스를 이겼고 직접 싸웠는지는 이설이 있으며, 브루투스의 시신에는 자색 망토를 덮었다. 킬리키아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옥타비아와 혼인하고도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다. 파르티아 원정에서는 공성기를 뒤에 두었다가 잃었고, 퇴각 27일에 보병 2만과 기병 4천을 잃었는데 절반 넘게는 병으로 죽었다. 악티움에서 함선 5백 척, 보병 10만으로 카이사르의 250척, 8만과 맞섰으나 클레오파트라의 배 60척이 달아나자 싸움을 버리고 따라가 함선 3백 척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함대가 투항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자 칼로 자신을 찔렀고, 기념관 위로 끌어올려져 그녀 곁에서 숨졌다. 클레오파트라는 39세로 죽었다. 독사, 항아리, 속 빈 핀 등 사인은 아무도 모른다. 안토니우스의 나이는 53세 또는 56세라 한다.

디온 (기원전 약 409~354)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1세는 도리스와 아리스토마케를 같은 날 아내로 맞았다. 아리스토마케의 오빠 디온은 매제의 신임을 얻었고, 시칠리아에 온 플라톤을 만나 철학에 불타올랐다. 플라톤이 덕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하자 화난 참주는 그를 스파르타인 폴리스에게 맡겨 죽이거나 팔게 했고, 플라톤은 아이기나에서 팔렸다. 디오니시오스가 죽고 젊은 디오니시오스가 즉위하자 디온은 카르타고와 평화를 맺어 오거나 자비로 전함 50척을 대겠다고 했으나 궁정은 그를 시기해 모함했다. 디온의 권유로 플라톤이 오자 궁정은 한때 철학으로 들끓었지만, 필리스토스 일파가 카르타고 사절에게 보낸 편지를 들어 디온을 이탈리아 해안으로 추방시켰다. 플라톤은 디온에게 독단적인 기질을 경계하라고 일렀다. 플라톤이 세 번째로 와서도 결국 풀려나 떠났고, 디오니시오스는 디온의 재산을 팔고 아내 아레테를 티모크라테스에게 주었다. 디온은 추방자 천여 명 중 25명만 응한 채 자킨토스에서 8백 명 미만으로 출항했다. 월식이 일었으나 예언자 밀타스가 길조로 풀이했다. 13일째 파키노스에 닿았으나 지나치다 폭풍에 밀렸고, 5일 뒤 미노아에 상륙해 디오니시오스가 이탈리아에 간 틈에 진군하자 5천 명이 합류했고 시라쿠사는 48년 만에 자유를 맞았다. 시민들은 디온과 메가클레스를 전권 장군으로 뽑고 동료 20명을 붙였다. 그러나 해군 지휘를 놓고 헤라클레이데스와 갈등했고, 소시스의 거짓 상처 사건과 필리스토스의 죽음이 이어졌다. 디오니시오스가 성채를 아들에게 맡기고 달아난 뒤 시민들은 토지 재분배를 가결하고 디온을 몰아냈다. 닙시오스의 약탈로 도시가 불타자 그를 불러 구원받았고, 디온은 아카데메이아에서 분노를 이기는 법을 배웠다며 헤라클레이데스를 용서했다. 성채가 항복해 아내와 재회했으나, 헤라클레이데스가 살해된 일은 흠이 되었다. 디온은 환영을 본 뒤 아들이 추락해 죽는 일을 겪었고, 칼리포스는 대서약을 하고도 프로세르피나 축제일에 자킨토스인들을 시켜 그를 죽였다. 칼리포스도 같은 칼로 죽었다. 디온의 누이와 아내는 히케테스가 바다에 던져 죽게 했고, 다른 이들은 아이와 함께 산 채로 던졌다고 한다.

브루투스 (기원전 85~42)

조상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낸 인물이고,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아할라 가문이다. 아버지 쪽이 평민 출신이라는 적대자들의 주장이 있으나, 포세이도니오스는 셋째 아들이 살아남아 후손이 이어졌다고 쓴다. 삼촌 카토를 가장 따랐고 그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했으며 플라톤 철학을 좋아했다. 키프로스에서 카토를 도왔고, 아버지를 죽인 폼페이우스였으나 공익을 앞세워 그 편에 섰다. 카이사르는 전투에서 그를 해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전한다. 파르살로스 패배 뒤 카이사르가 그를 용서해 가까이 두었고 카시우스까지 용서받게 했다. 도시 법무관 자리를 두고 카시우스와 다투었는데 카이사르는 카시우스의 주장이 더 강하나 브루투스를 먼저 법무관으로 삼자고 했다. 법정에 '그대는 잠들었다, 브루투스'라는 글이 붙고 카시우스가 설득하자 그는 음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키케로는 소심해서 제외했고, 포르키아는 허벅지를 칼로 베어 비밀을 나눌 자격을 증명했다. 3월 15일 폼페이우스 상이 있는 회랑에서 카이사르를 찔렀으나, 안토니우스를 죽이자는 의견은 정의를 내세워 막았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에게 장례를 맡긴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고, 민중이 격분해 그들은 로마를 떠났다. 아테네에서 몰래 군비를 갖춰 마케도니아를 장악하고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다. 젊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어 브루투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소아시아에서 크산토스 사람들이 집단으로 불에 뛰어들어 150명만 살아남았다. 사르디스에서 카시우스와 크게 다투고 눈물로 화해했다. 막사에 나타난 환영이 '필리피에서 보게 될 것'이라 했다. 필리피 첫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이겼으나 카시우스는 졌고, 피다로스가 명령 없이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심 속에 죽었다. 두 번째 전투는 오후 3시경 시작해 졌고, 소 카토의 아들 마르쿠스가 전사했다. 루킬리우스가 브루투스인 척 잡혔다. 브루투스는 스트라토 앞에서 칼에 엎어져 죽었다. 스트라토가 칼을 잡고 있었다는 이설도 있다. 안토니우스는 시신에 자색 망토를 덮었고, 포르키아는 숯을 삼켜 죽었다고 하나 브루투스의 편지와 맞지 않아 기록 시기가 의심된다.

아라토스 (기원전 271~213)

시키온 참주 아바티다스가 클레이니아스를 죽이자 일곱 살 아들 아라토스는 도망쳐 아바티다스의 누이 소소의 집에 숨었다가 밤에 아르고스로 보내졌다. 그는 참주를 향한 불타는 증오 속에 자랐고 5종 경기에서 관을 얻을 만큼 운동에 힘썼다. 아바티다스는 디니아스 등에게, 파세아스는 니코클레스에게 암살되었고 니코클레스는 4개월 통치했다.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움이 늦어지자 아라토스는 사다리를 부품으로 만들어 수레에 숨기고 자기 노예 30명과 친구들이 내준 인원, 고용한 병사를 모아 밤에 성벽을 넘었고, 개 짖는 소리와 야경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용병을 사로잡았다. 시민들이 참주의 집에 불을 질렀고 니코클레스는 지하 통로로 달아났으며 양쪽 모두 사망자가 없었다. 그는 니코클레스에게 쫓겨난 80명과 오래 쫓겨난 500명을 복귀시키고 도시를 아카이아 동맹에 넣었다. 재산 분쟁 때문에 이집트로 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150탈렌트를 받아 와 시민 15명과 함께 조정했다. 이어 장군이 되어, 시리아인 에르기노스·디오클레스 형제를 매수(성공 시 60탈렌트)하고 자기 식기와 아내의 장신구를 저당 잡혀, 달빛과 안개 속에 400명으로 안티고노스의 아크로코린토스를 점령했다. 메가라가 안티고노스를 버리고 합류했고 트로이젠·에피다우로스도 동맹에 들어왔다. 아르고스 참주 아리스티포스는 클레오나이에서 패해 전사했으나(디니아스의 전언 ) 아르고스는 해방하지 못했다.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에게 밀리자 아크로코린토스를 넘기는 조건으로 안티고노스를 불렀고, 이 일과 아리스토마코스의 익사, 만티네이아 개명이 비난받았다. 필리포스가 메세네에서 학살을 부추기고 아들의 아내를 욕보이자 결별했고, 필리포스는 타우리온에게 서서히 듣는 독을 먹이게 했다. 그는 "왕의 사랑의 대가"라 말하고 아이기온에서 17번째 장군직 중 죽었으며 델포이 신탁에 따라 시키온에 묻혔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기원전 약 436~358)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다리우스와 파리사티스의 맏아들 아르시카스로, 이름이 오아르세스라는 디논의 말도 있으나 플루타르코스는 크테시아스를 믿는다. 어머니는 아우 키로스를 편애했지만 다리우스는 맏이를 후계자로 세웠다. 파사르가다이 즉위식에서 티사페르네스가 키로스의 암살 음모를 고발했으나 파리사티스가 아들을 안고 간청해 키로스는 목숨을 구해 해안 속주로 돌아가 반란을 준비했다. 군비가 모자라서라는 설은 터무니없다고 본다 . 왕은 초기에 너그러웠고(석류를 바친 오미세스, 두 손으로 물을 떠 바친 농부 일화), 왕비 스타티라는 인기가 높았다. 키로스는 그리스 용병 1만 3천 가까이를 이끌고 진군했고, 왕은 참호까지 파고도 싸우지 않다가 테리바조스의 권유로 쿠낙사에서 맞섰다. 키로스는 아르타게르세스를 죽이고 돌진하다 죽었는데, 그 최후는 디논과 크테시아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 .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가 관자놀이를, 카리아인이 무릎 뒤를 찔렀다. 왕은 두 사람을 모두 벌했다. 자랑한 미트리다테스는 두 배에 가둬 17일 만에 죽이고, 카리아인은 파리사티스가 고문해 죽였다. 파리사티스는 주사위 내기로 환관 마사바테스를 얻어 산 채 가죽을 벗겼고, 스타티라를 독이 묻은 새 고기로 독살했다고 하며 디논은 범인을 멜란타스로 달리 쓴다. 왕은 시녀 기기스를 처형하고 어머니를 바빌론으로 보냈다. 이후 아게실라오스를 금으로 소환시키고 크니도스에서 이겨 안탈키다스 화약을 강요했다. 30만 보병과 기병 1만으로 나선 카두시아 원정은 식량난에 빠졌다가 테리바조스가 두 카두시아 왕을 서로 속이는 계책으로 화평을 맺어 수습했다. 노년에 후계자 다리우스가 아스파시아와 테리바조스 문제로 모반했으나 환관 밀고로 처형되었고, 오코스는 아리아스페스를 자살로, 아르사메스를 암살로 몰아냈다. 왕은 슬픔 속에 94세, 재위 62년으로 죽었다.

갈바 (기원전 3~기원후 69)

서두는 네로 사후 로마가 군대의 탐욕과 방종 때문에 황제를 차례로 갈아치운 혼란을 말한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근위병에게 1인당 7,500드라크마(해외 병사는 1,250)를 약속하며 갈바를 추대했으나 그 돈은 마련될 수 없었다. 갈바는 가장 부유한 사인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와 친척이었으며, 게르마니아에서 군을 잘 지휘하고 아프리카(원문 Libya) 총독으로 명성을 얻었다. 네로가 맡긴 스페인에서 8년째, 갈리아의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켜 갈바를 추대했고, 티투스 비니우스의 권유로 갈바는 황제가 아닌 '원로원과 로마 국민의 대리인'을 자처했다. 베르기니우스와 빈덱스가 맞붙어 빈덱스는 갈리아인 2만이 죽자 자결했다. 해방노예 이켈로스가 7일 만에 와서 네로의 죽음을 알렸다. 한편 님피디우스는 칼리굴라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막지 않았는데 플루타르코스는 그 연이 너무 늦어 보이며 검투사의 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황제 자리를 노렸으나 근위대 호민관 호노라투스의 설득으로 병사들이 갈바를 외치자 진영에서 살해되었다. 갈바는 가담자들과 투르필리아누스를 재판 없이 처형했고, 로마 입성 때 소란을 피운 수병들을 기병으로 짓밟아 많은 피를 흘렸다. 그는 인색했고 비니우스는 탐욕을 부렸으며 티겔리누스는 뇌물로 살아남았다. 갈바는 "병사를 사지 않고 징집한다"고 하여 군의 증오를 샀다. 독일 군단은 1월 1일 갈바의 상을 넘어뜨리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갈바는 오토 대신 피소를 양자로 삼았고 뇌우의 징조가 따랐다. 분노한 오토는 병영을 매수했고, 23명이 환호한 광장에서 "나는 끝장이다"라 중얼거렸다. 갈바는 가마로 광장에 나왔다가 습격당했다. 백인대장 셈프로니우스 덴수스만 그를 지켰다. 갈바는 목을 내밀어 죽었고, 살해자는 카무리우스라는 설이 많으나 다른 이름도 전한다 . 피소·비니우스·라코도 죽었다.

오토 (기원후 32~69)

오토는 갈바 살해 직후 카피톨리움에서 제사를 올리고 갈바의 충신 마리우스 켈수스를 풀어 주었다. 원로원에서는 온건하게 말하고 집정관직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넘겼으며 네로와 갈바가 지명한 이들을 바꾸지 않았다. 티겔리누스에게 소환령을 내리자 그는 면도를 핑계로 면도칼로 자결했다. 오토는 극장에서 '네로'로 불리는 것을 막지 않았으나 귀족들이 불쾌해하자 그만두었다. 크리스피누스가 제17대대를 데려오다 살해되자 병사들이 원로원 80명이 오토와 만찬 중이던 궁으로 몰려갔는데, 오토는 눈물로 달래고 이튿날 1인당 1,250드라크마를 주고 두 명만 처형했다. 비텔리우스가 이미 황제를 칭했고 오토는 판노니아·달마티아·모이시아 군단과 시리아·유대의 지지를 믿어 비텔리우스에게 큰돈과 도시를 제안했으나 서로 비방만 했다. 승리의 여신 상이 고삐를 놓고 티베리스 강이 범람하는 징조가 있었다. 오토는 브릭셀룸에 남고 켈수스·파울리누스·갈루스·스푸리나에게 군을 맡겼다. 비텔리우스 편 카이키나와 발렌스가 플라켄티아를 공격했으나 오토 군은 조롱에 분발해 지켰다. 베드리아쿰 회의에서 프로쿨루스와 티티아누스는 즉시 전투를, 파울리누스는 지연을 주장했고 오토는 전투를 택했다. 이유는 여러 설이며 비서 세쿤두스는 오토의 조급함을 든다 . 전투는 질서가 없었고 근위병이 도망쳐 패했으며, 목격자들도 세부는 확언하지 못했다 . 패전에도 병사들이 끝까지 싸우자 했으나 오토는 조국을 위해 통치하기보다 죽는 편이 더 명예롭다며 거부하고, 조카에게 비텔리우스를 두려워 말라고 일렀다. 조카 코케이우스를 위로하고 단검 둘 중 하나를 골라 푹 잔 뒤 아침에 칼에 엎드려 죽었다. 병사들은 화장하며 일부는 뒤따라 자결했다. 플루타르코스가 브릭셀룸에서 본 소박한 무덤이 있고, 그는 38세로 약 3개월 재위했다.

대목별로 읽기

1. 역사가 아니라 삶을 쓴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전기의 서두에서 이 책의 방법을 밝힙니다. 그가 쓰려는 것은 전쟁과 정치의 연대기가 아니라 인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my design is not to write histories, but lives.

내가 쓰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삶이다.

그는 이어, 성격은 큰 전투보다 사소한 말이나 농담에서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sometimes a matter of less moment, an expression or a jest, informs us better

때로는 하찮은 일, 한마디 말이나 농담이 우리를 더 잘 알려 준다.

그래서 이 책의 일화는 대부분 짧고 구체적입니다. 소년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길들이고, 페리클레스가 자랑으로 삼은 것이 승전비가 아니라 아무도 자기 때문에 상복을 입지 않았다는 점이고, 카이사르가 알프스 마을에서 한 한마디가 한 인물의 야망을 드러냅니다. 독자는 사건의 연표보다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게 됩니다.

2. 신화와 역사의 경계

책의 첫 전기인 테세우스 서두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지도 가장자리에 사막만 그려 넣는 지리학자에 자신을 견줍니다. 역사가 닿는 시대 너머에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Beyond this there is nothing but prodigies and fictions

이 너머에는 경이와 허구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 너머의 인물을 다루며 너그러운 독자를 청합니다. 로물루스의 승천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을 긋습니다.

so again to mix heaven with earth is ridiculous

하늘과 땅을 이렇게 뒤섞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이 태도는 책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이설이 있으면 병기하고, 믿기 어려우면 믿기 어렵다고 쓰며, 그래도 이야기는 버리지 않습니다. 건국 전설의 인물들을 진짜 역사 인물과 같은 책에 놓았다는 점이 이 책의 독특함입니다.

3. 두 입법자와 교육이라는 접착제

리쿠르고스와 누마는 건국 전설에서 이어지는 두 입법자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의 과업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웠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합니다.

The harder task was that of Lycurgus

더 어려운 과업은 리쿠르고스의 것이었다.

그는 누마가 설득과 백성의 사랑으로 일을 이룬 반면 리쿠르고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겨우 해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누마의 체제가 오래가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짚습니다.

because it wanted that cement which should have kept all together, education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줄 접착제, 곧 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법은 문서로 남기지 않고 교육으로 이어 간 스파르타와, 종교로 기질을 누그러뜨린 로마의 대비가 이 한 문장에 압축됩니다. 누마가 죽자 야누스 신전의 문이 활짝 열려 전쟁이 풀려난 장면은 그 증거로 제시됩니다.

4. 손이 깨끗한 장군

플루타르코스가 가장 자주 칭찬하는 덕은 청렴입니다. 키몬에 대해서는 공금으로 사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쓰고, 페리클레스는 소포클레스가 미소년을 칭찬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a general ought not only to have clean hands, but also clean eyes.

장군은 손만이 아니라 눈도 깨끗해야 한다.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장군론에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the excellent thing in a general is to keep his hands from taking money.

장군의 훌륭함은 돈에 손을 대지 않는 데 있다.

분담금 사정을 위임받은 아리스티데스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합니다.

went out poor, and returned poorer

가난하게 나갔다가 더 가난하게 돌아왔다.

대 카토는 같은 청렴을 자신에게 엄격한 태도로 보여 줍니다.

he could pardon all offenders but himself

그는 자기 자신만 빼고는 모든 죄인을 용서할 수 있었다.

물론 플루타르코스는 청렴이 곧 완전함은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아리스티데스와 카토의 비교에서 그는 카토의 자화자찬을 못마땅해하고 아리스티데스의 가정 경영에는 결함이 있다고 짚습니다.

5. 느린 방패와 빠른 칼

파비우스는 한니발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전략으로 로마를 지탱했습니다. 칸나이 뒤 한니발에게 바르카스가 했다는 말이 이 책에 전합니다.

You know, Hannibal, how to gain a victory, but not how to use it.

한니발이여, 그대는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승리를 쓰는 법은 모른다.

포세이도니오스에 따르면 로마인은 마르켈루스를 칼이라, 파비우스를 방패라 불렀다고 합니다.

Posidonius tells us that the Romans called Marcellus their sword, and Fabius their buckler

로마인은 마르켈루스를 그들의 칼, 파비우스를 그들의 방패라 불렀다고 포세이도니오스는 전한다.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의 비교에서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의 신중함을 함께 평가하면서도 단서를 답니다. 소심해서 기회를 놓치는 것도 장군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to lose an advantage through diffidence is no less blamable in a general

망설임 때문에 유리함을 잃는 것도 장군에게는 못지않은 허물이다.

페리클레스가 나쁜 결과를 예견한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합니다.

Pericles was a good prophet of bad success

페리클레스는 나쁜 결과를 잘 맞힌 예언자였다.

6.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올라누스

알키비아데스는 재능과 매력, 그리고 야망이 한 사람에게 모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르케스트라토스는 그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Greece could not support a second Alcibiades.

그리스는 두 번째 알키비아데스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연이은 성공이 오히려 기대를 키워 그를 몰락시켰다고 봅니다.

if ever man was ruined by his own glory, it was Alcibiades.

자신의 영광 때문에 몰락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알키비아데스였다.

짝이 된 코리올라누스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분노로 조국을 등졌다가 어머니 앞에서 마음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O mother! what is it you have done to me?

오, 어머니! 저에게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두 사람의 비교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평합니다.

He who least likes courting favor, ought also least to think of resenting neglect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푸대접에 분개할 생각도 가장 적게 해야 한다.

7. 알렉산드로스: 명예와 절제

알렉산드로스 전기는 야망의 이야기이면서 절제의 일화로 가득합니다. 가우가멜라 전날 밤 야습을 권한 장수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I will not steal a victory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

목마른 행군 중 병사가 투구에 담아 바친 물은 마시지 않고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if I alone should drink, the rest will be out of heart.

나 혼자 마시면 나머지 사람들은 기운을 잃을 것이다.

코린토스에서 디오게네스를 만난 일화도 이 책이 전합니다. 햇빛을 가리지 말라는 철학자의 대답에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if he were not Alexander, he would choose to be Diogenes.

자신이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독살설을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로 본다고 밝힙니다. 영웅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그대로 받지 않는 태도가 이 대목에도 드러납니다.

8. 카이사르의 야망

카이사르 전기는 야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여 주는 일화로 열립니다. 알프스의 가난한 마을을 지나며 그가 한 말이 전해집니다.

I had rather be the first man among these fellows

나는 이 사람들 사이에서 첫째가 되겠다.

갈리아에서의 성과는 800개가 넘는 도시를 공략하고 300개 부족을 복속시켰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젤라 승리를 친구에게 알린 짧은 편지도 유명합니다.

I came, saw, and conquered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사람들이 왕이라 부르자 그는 자신의 이름은 카이사르이지 왕이 아니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said his name was Caesar, not king.

자기 이름은 카이사르이지 왕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지막 장면은 3월 이두스입니다. 점쟁이에게 그날이 왔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이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Yes, they are come, but they are not past.

그렇다, 왔지만 아직 지나가지는 않았다.

9. 땅 없는 병사와 돈에 무너진 개혁

그라쿠스 형제의 전기는 로마 공화정의 사회 문제를 보여 줍니다. 티베리우스는 세계의 주인이라 불리는 로마 병사들이 정작 어떤 처지인지를 말합니다.

had not one foot of ground which they could call their own

자기 것이라 부를 땅 한 뼘도 없었다.

토지법에 대한 서술자의 평은 오히려 온건합니다.

Never did any law appear more moderate and gentle

이보다 온건하고 부드러운 법은 없어 보였다.

가이우스가 죽음을 맞는 날 아내 리키니아가 집을 나서는 그를 말리며 한 호소는 시대의 성격을 요약합니다.

Faction prevails; power and arms are now the only measures of justice.

파벌이 이긴다. 이제 정의의 유일한 잣대는 권력과 무기뿐이다.

스파르타의 아기스 전기에서는 개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서술자가 이렇게 평합니다.

Spartan purpose overthrown and ruined, by the love of money

스파르타의 뜻이 돈에 대한 사랑으로 뒤집히고 파멸했다.

10. 연설가의 길: 데모스테네스, 키케로, 포키온

데모스테네스와 포키온은 아테네의 마지막 시대를 대표하는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포키온이 반론하러 일어서면 데모스테네스가 말했다는 구절이 전해집니다.

Here comes the knife to my speech.

내 연설을 자르는 칼이 온다.

군중이 불평하자 포키온은 이렇게 받아쳤다고 합니다.

My friends, you are fortunate in having a leader who knows you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을 잘 아는 지도자를 가진 행운아다.

로마에서는 키케로가 같은 길을 걷습니다. 내전의 혼란 속에서 그는 편지에 이렇게 씁니다.

I know whom I should fly, not whom I should fly to.

누구에게서 도망쳐야 하는지는 알지만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키케로의 머리와 손을 본 안토니우스가 했다는 말은 한 시대의 끝을 알립니다.

Now let there be an end of our proscriptions.

이제 우리의 살생부는 끝내자.

두 연설가의 죽음을 비교하며 플루타르코스는 한쪽은 동정을, 다른 쪽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고 씁니다.

Cicero's death excites our pity

키케로의 죽음은 우리의 연민을 일으킨다.

11. 소 카토와 브루투스

소 카토는 어린 시절부터 독재에 대한 반감으로 기억됩니다. 열네 살 때 술라의 집에서 스승에게 던진 질문이 전해집니다.

Why does nobody kill this man?

왜 아무도 저 사람을 죽이지 않는가?

정치에 나선 뒤에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though Cato have no need of Rome, yet Rome has need of Cato

카토는 로마가 필요 없지만 로마는 카토가 필요하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이 말로 이어집니다.

I am master of myself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다.

브루투스는 막사에서 환영을 만나 이런 말을 듣습니다.

I am your evil genius, Brutus; you shall see me at Philippi

브루투스여, 나는 너의 악령이다. 필리피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카시우스의 시신 앞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the last of the Romans

마지막 로마인.

12.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전기는 한 사람의 성격이 사치와 아첨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를 사로잡은 방식을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Plato admits four sorts of flattery, but she had a thousand

플라톤은 아첨을 네 가지로 보지만 그녀에게는 천 가지가 있었다.

죽어 가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남긴 말은 이렇습니다.

a Roman by a Roman overcome

로마인이 로마인에게 정복당했다.

데메트리오스와의 비교에서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의 방탕이 미친 영향을 대비하며 이렇게 평합니다.

Antony himself suffered by his excesses, and other people by those of Demetrius

안토니우스는 자기 방종으로 자신이 고통받았고, 데메트리오스의 방종으로는 남들이 고통받았다.

13. 크라수스와 니키아스: 탐욕과 소심

크라수스의 부를 이 책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he made it his practice to buy houses that were on fire

그는 불타는 집을 사들이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세평은 그의 덕이 하나의 악덕에 가려졌다고 합니다.

the many virtues of Crassus were darkened by the one vice of avarice

크라수스의 많은 덕은 탐욕이라는 한 가지 악덕에 가려졌다.

파르티아 사절 바기세스의 조롱은 그가 향하는 파멸을 예고합니다.

Hail will grow here before you will see Seleucia

셀레우키아를 보기 전에 여기서 우박이 자랄 것이다.

니키아스는 반대의 약점을 가졌습니다. 소심함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이렇게 씁니다.

his timidity was a revenue to rogues, and his humanity to honest men

그의 소심함은 불량배에게는 수입이었고, 그의 인정은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었다.

스파르타와의 평화 조약은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으로 불린다고 전합니다.

so to this day it is called the Peace of Nicias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것은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불린다.

14. 갈바와 오토: 제국의 문턱

마지막 두 전기 갈바와 오토는 공화정이 끝난 뒤의 로마입니다. 갈바는 약속한 하사금을 요구하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he was used to enlist and not to buy his soldiers

그는 병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모집하는 데 익숙했다.

쓰러진 갈바는 자기 목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Strike, if it be for the Romans' good.

로마인들에게 이롭다면 쳐라.

오토는 패전 뒤 병사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I can die with more honor than I can reign.

나는 다스리는 것보다 더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if he lived not better than Nero, he died more nobly.

네로보다 잘 살지 못했다면, 더 고귀하게 죽었다.

15. 이 책을 읽는 방법

『영웅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 관심 가는 인물부터 읽어도 충분합니다. 짝이 된 두 전기를 이어 읽고 마지막의 비교를 보면 플루타르코스가 두 인물을 어떻게 견주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처음이라면 테세우스와 로물루스로 건국 전설을,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로 야망을,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로 연설가의 삶을 읽는 순서를 권합니다. 일화가 많아 사건의 연표보다는 인물의 장면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이설을 병기하고 믿기 어려운 대목에 단서를 다는 저자의 태도를 함께 따라가 보세요.

이 글과 이어 읽을 책은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군주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고전의 한 권 요점은 ReadGem 블로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