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Gem · 한 권 요점
출판년도 1641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성찰
제1철학에 관한 성찰
And let him Deceive me as much as he can, yet he can never make me not to Be, whilst I think that I am.
그가 힘껏 나를 속이게 하라. 그래도 내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결코 나를 없는 자로 만들 수 없다.
If I abstain from passing my Judgment, when I do not clearly and distinctly enough perceive what is Truth, 'tis evident that I do well, and that I am not deceived
무엇이 진리인지 충분히 분명하고 판명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내가 잘하고 있으며 속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눈에 보기
엿새에 걸친 사색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의심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고, 거기서 신과 세계를 다시 세워 가는 책. 이 글은 그 엿새의 길을 스물네 가지로 따라간다.
비슷한 책
- 데카르트 Discourse on the Method (방법서설)
- 스피노자 Ethics (에티카)
- 이마누엘 칸트 The Critique of Pure Reason (순수이성비판)
한 권 요점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성찰』은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1641년에 라틴어로 펴낸 철학서입니다. 앞서 『방법서설』이 자기 생각이 자란 길을 이야기하듯 들려준 책이라면, 『성찰』은 그 가운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부분, 곧 무엇이 확실한가라는 물음만 따로 떼어 깊이 파고든 책입니다. 책은 여섯 번의 "성찰"로 나뉘어 있고, 각 성찰은 하루의 사색처럼 쓰였습니다. 첫날 모든 것을 의심하고, 둘째 날 의심할 수 없는 첫 지점을 찾고, 그 위에서 하루씩 신과 오류와 물질세계와 정신과 몸의 관계를 쌓아 올립니다.
데카르트는 이 책을 네덜란드에 머물던 시기에 썼습니다. 그는 1596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1628년 무렵부터 약 2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살며 연구했습니다. 『방법서설』이 대중을 향한 프랑스어 이야기였다면, 『성찰』은 파리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보내는 헌정 서한과 함께 라틴어로 낸 책이어서, 학자들의 반론을 불러내고 답하는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홉스, 가상디, 아르노 같은 당대 사상가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에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논문처럼 결론만 늘어놓지 않고 "나는" 하고 일인칭으로 말하며, 독자가 같은 생각의 길을 직접 걷도록 이끕니다. 철학서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정신이 흔들리고 다시 서는 과정을 기록한 글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데카르트의 결론을 받아들이든 말든 먼저 그와 같은 의심을 해 보게 됩니다. 그 경험이 이 책을 철학의 고전으로 만든 힘입니다.
이 글은 그 여섯 번의 성찰을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다만 한 가지는 미리 말해 두어야 합니다. 『성찰』의 결론 가운데 여럿, 곧 신의 존재 증명과 정신과 몸의 분리는 출간 직후부터 날카로운 반론을 받았고 지금도 논쟁이 이어집니다. 이 글은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무엇을 어떻게 논증했는지를 보여 주고, 논쟁이 있는 대목에는 그렇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줄거리
제1성찰에서 데카르트는 평생 믿어 온 의견을 한 번은 모두 쓸어 내기로 합니다. 감각이 속일 수 있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려우며, 심지어 전능한 존재가 나를 늘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제2성찰에서는 그렇게 속는 나조차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첫 확실성을 얻고, 밀랍 조각 예로 감각보다 정신으로 아는 것이 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제3성찰은 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제4성찰은 오류가 어디서 오는지를 따지며, 제5성찰은 물질적 사물의 본질과 신의 존재를 다시 논합니다. 마지막 제6성찰은 물질세계가 실제로 있는지, 정신과 몸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결합해 있는지를 다룹니다. 아래 스물네 가지는 이 흐름을 따라 고른 것입니다.
대목별로 읽기
1. 평생에 한 번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첫 성찰은 어린 시절부터 참으로 받아들인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거짓이 섞여 있었는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that once in my life I should clearly cast aside all my former opinions, and begin a new from some First principles
평생에 한 번은 이전의 모든 의견을 분명히 내던지고 어떤 첫째 원리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 일을 나이가 더 들어 지혜로워질 때까지 미루다가, 이제는 행동할 시간까지 숙고로 써 버렸다고 후회할까 두려워 지금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날을 위해 모든 근심에서 마음을 풀고, 아무 일에도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홀로 물러납니다. 생각을 뒤엎는 일에도 시간과 고독이라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2. 기초를 허물면 그 위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모든 의견을 하나하나 검토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봅니다.
because the Foundation being once undermin'd, whatever is built thereon will of its own accord come to the ground
기초가 일단 허물어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은 무엇이든 저절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믿음이 기대고 있는 가장 밑바탕, 곧 감각에서 얻은 앎을 곧바로 공격합니다. 한 건물을 헐 때 기둥을 하나씩 뽑는 대신 지반을 흔드는 방식입니다. 효율적인 의심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식을 낱낱이 따지는 대신 그 지식이 의존하는 원천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3. 한 번이라도 속인 것은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감각은 가장 가까운 앎의 원천이지만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첫 번째 논거입니다.
'tis prudence never certainly to trust those that I have (tho but once) deceived us.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은 결코 확신하며 믿지 않는 것이 신중함이다.
멀리 있거나 작은 것을 감각이 잘못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곳에 앉아 난롯가에서 종이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의심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일부러 이 반론을 스스로 제기합니다. 이런 것까지 의심하는 사람은 왕이라고 우기는 가난한 사람, 머리가 유리로 되었다고 믿는 광인과 다름없다는 반문입니다. 그리고 곧 다음 논거로 넘어갑니다.
4. 꿈과 깨어 있음을 가를 확실한 표지는 없다
광인과 달리 우리는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것이 감각의 믿음을 흔드는 두 번째 논거입니다.
how often am I perswaded in a Dream of these usual occurrences, that I am in this place, that I have a Gown on me, that I am sitting by a fire, &c. Tho all the while I am lying naked between the Sheets.
내가 이곳에 있고, 가운을 입고 있고, 불가에 앉아 있다는 이런 흔한 일들을 얼마나 자주 꿈속에서 믿는가. 그동안 실제로는 시트 사이에 벌거벗고 누워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깨어 있다고 확신하는 지금도 방금 같은 확신으로 속은 적이 있음을 떠올립니다. 그 어려움이 너무 커서 놀라고, 그 놀라움이 오히려 지금 자신이 자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설득할 정도라고 털어놓습니다.
I am so far convinced of the difficulty of distinguishing sleep from waking that I am amazed, and this very amazement almost perswades me that I am asleep.
잠과 깨어 있음을 구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확신하게 되어 나는 놀라고, 바로 그 놀라움이 내가 자고 있다고 거의 나를 설득한다.
꿈에서 본 것도 어딘가 실재하는 것의 그림이라는 반론을 그는 화가의 비유로 다룹니다. 화가가 인어나 사티로스를 그릴 때도 여러 동물의 부분을 합치고, 아무리 새로운 것을 지어내도 그 색깔만은 진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눈, 손 같은 개별적인 것은 의심해도 연장, 형태, 크기, 수 같은 더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은 남는다고 봅니다.
5. 수학마저 의심할 수 있을까
천문학과 의학처럼 복합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은 의심스럽지만, 수학은 다를 것 같습니다.
for whether I sleep or wake, two and three added make five; a square has no more sides than four
내가 자든 깨어 있든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고, 정사각형의 변은 넷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된 믿음이 있습니다. 전능한 신이 나를 지금의 상태로 창조했다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땅도 하늘도 없는데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내가 둘에 셋을 더할 때마다 틀리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한 신이 그럴 리 없다는 반론에는,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속도록 허락하는 일도 선함에 어긋난다고 되받습니다. 이로써 가장 확실해 보이던 수학까지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6. 악한 정령을 가정하다
의심을 철저히 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하나의 사고 실험을 택합니다.
I will suppose, not an Infinitely perfect God, the Fountain of truth, but that some Evil Spirit which is very Powerful and crafty has used all his endeavours to deceive me
나는 진리의 원천인 무한히 완전한 신이 아니라, 매우 강력하고 교활한 어떤 악한 정령이 나를 속이려고 온 힘을 다해 왔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 정령은 하늘, 공기, 땅, 색깔, 형태, 소리를 모두 내 믿음을 낚으려는 꿈속의 덫으로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손도 눈도 살도 피도 감각도 없는데 그것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가정은 실제로 악마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속임수를 상상해서 어떤 앎이 그 앞에서도 살아남는지 시험하려는 장치입니다. 진실을 찾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속임수를 일부러 세워 보는 이 발상이 이 책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7. 깨기 싫은 달콤한 꿈
제1성찰은 이 의심이 쉽지 않다는 고백으로 끝납니다. 이 작업은 힘들고, 게으름이 마음을 일상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like a Prisoner who in his sleep perhaps enjoy'd an imaginary liberty, and when he begins to suppose that he is asleep is afraid to waken, but is willing to be deceived by the Pleasant delusion
잠 속에서 상상의 자유를 누리던 죄수가, 자신이 자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깨어나기가 두려워 달콤한 환상에 속아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익숙한 의견으로 기꺼이 돌아가고, 깨어났을 때 맞닥뜨릴 힘든 어둠이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철학의 의심이 머리만의 일이 아니라 편안한 믿음을 놓는 심리적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점을 이 비유가 보여 줍니다.
8. 움직이지 않는 한 점을 찾아서
제2성찰은 전날의 의심에 깊이 빠져 바닥에도 닿지 못하고 수면에도 오르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다시 같은 길을 가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거짓으로 놓고, 확실한 무엇을 찾거나 못 찾으면 적어도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만이라도 확실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를 떠올립니다.
Archimedes required but a point which was firm, and immoveable that he might move the whole Earth
아르키메데스는 지구 전체를 움직이기 위해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한 점만을 요구했다.
그처럼 아주 작더라도 확실한 하나를 찾는다면 큰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허무가 아니라 지렛대가 될 단 하나의 받침점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9.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어서 데카르트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만약 세상에 하늘도 땅도 정신도 몸도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면, 나는 없는 것일까요?
And let him Deceive me as much as he can, yet he can never make me not to Be, whilst I think that I am.
그가 힘껏 나를 속이게 하라. 그래도 내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결코 나를 없는 자로 만들 수 없다.
속임을 당하려면 속임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하나의 원리를 세웁니다.
Wherefore I may lay this down as a Principle, that whenever this sentence I am, I exist, is spoken or thought of by Me, 'tis necessarily True.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원리로 삼을 수 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문장은 내가 말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다.
앞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알려진 바로 그 지점입니다. 『성찰』의 표현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그러므로"라는 추론의 말이 없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마다 참이 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어떤 속임수도 이 한 점만은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얻은 첫 번째 확실성입니다.
10.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다음 문제가 따릅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나"는 무엇인가? 몸이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니 몸은 나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영혼의 여러 기능을 하나씩 점검합니다. 먹고 움직이는 일은 몸이 필요하고, 감각하는 일도 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는 떼어 낼 수 없습니다.
'tis my Thought, this alone cannot be separated from Me, I am, I exist
그것은 나의 생각이다. 이것만은 나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Let me ask therefore What I am, A Thinking Thing, but What is That? That is a thing, doubting, understanding, affirming, denying, willing, nilling, imagining also, and sensitive.
그러면 내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바라고, 바라지 않고, 상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이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의식 활동 전체를 가리킵니다. 의심하고 바라고 느끼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상상력은 있는 대로 허구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자기 인식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상이 아니라 순수한 이해입니다.
11. 밀랍 한 조각이 가르쳐 주는 것
제2성찰의 후반부는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 가운데 하나인 밀랍 이야기입니다. 벌집에서 갓 떼어 낸 밀랍은 꿀맛이 나고 꽃향기가 나고 단단하고 차가우며 두드리면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불에 가까이 가져가면 맛도 냄새도 색도 모양도 변하고, 부드럽고 뜨거워져서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Does it yet continue the same Wax? surely it does, this all confess, no one denies it, no one doubts it.
그래도 여전히 같은 밀랍인가? 분명히 그렇다. 모두가 인정하고,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밀랍으로 알아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감각으로 얻은 것은 모두 변했으니 그것일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I cannot imagine what this Wax is, but that I perceive with my Mind what it is.
나는 이 밀랍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신으로 파악한다.
데카르트는 일상의 말버릇에서도 같은 점을 찾습니다. 우리는 창밖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모자와 외투뿐이고 그 아래에 기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판단하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는 많은 일이 실은 정신의 이해라는 이 통찰은 오늘의 인지과학에서도 흥미롭게 읽힙니다.
12. 분명하고 판명한 것은 참이라는 규칙
제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첫 확실성이 왜 확실한지를 묻습니다. 답은 내가 그것을 아주 분명하고 판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일반 원리를 세웁니다.
Whatever I Clearly and Distinctly perceive is certainly True.
내가 분명하고 판명하게 파악하는 것은 무엇이든 확실히 참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문제를 인식합니다. 둘에 셋을 더하면 다섯이라는 것도 분명하고 판명하게 파악되는데, 전능한 신이 나를 늘 속이도록 만들었을 수 있다는 의심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가벼운 의심"이라고 부르면서도, 이 의심을 해소하려면 신이 있는지, 있다면 속이는 존재일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연결고리가 이후 신 존재 증명의 동기가 됩니다.
13. 무한한 존재의 관념은 어디서 왔는가
제3성찰의 핵심 논증은 내 안에 있는 신의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데카르트는 유한한 내가 무한한 실체의 관념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I could not have the Idea of an Infinite substance (seeing I my self am finite) unless it proceeded from a substance which is really Infinite.
내가 유한한 이상, 무한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내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한의 관념이 유한의 부정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합니다.
For how should I know that I doubt or desire, that is to say, that I want something, and that I am not altogether perfect, unless I had the Idea of a being more perfect then my self
내가 의심하고 바라며, 곧 무언가 부족하고 전적으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없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논증의 바탕에는 원인이 결과보다 못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논증은 큰 영향을 주었지만 강한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 전제가 정말 필연적인지, 무한의 관념이 정말 유한한 정신이 만들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철학자들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이 글은 논증을 평가하기보다 데카르트가 이 증명으로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 곧 앎의 마지막 보증을 찾으려 했다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14.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지탱해 주는 것
데카르트는 같은 제3성찰에서 두 번째 논증을 덧붙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입니다. 부모에게서 왔다 해도 그것은 내 생각하는 부분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고 그는 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한 시점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음 순간에도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the same Power and Action is requisite to the Conservation of a Thing each Moment of its Being, as there is to the Creation of that Thing anew, if it did not exist.
어떤 것의 존재를 순간마다 보존하는 데에는, 그것이 없었다면 새로 창조하는 데 필요한 것과 같은 힘과 작용이 필요하다.
삶을 시간의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각 조각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므로,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현대 독자에게 낯설지만, 존재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유지되는 것이라는 감각을 묻게 합니다. 결론에서 데카르트는 신 앞에서 감탄하며 멈춥니다. 믿음으로는 내세의 가장 큰 행복이 신의 위엄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하고, 이 삶에서도 같은 일이 가장 큰 기쁨을 준다고 그는 말합니다.
15. 오류는 의지가 이해보다 앞설 때 생긴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이 나를 만들었는데 나는 왜 틀리는가? 제4성찰의 물음입니다. 그는 오류가 두 능력, 곧 이해하는 능력과 선택하는 의지의 결합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that seeing the Will expatiates it self farther then the Understanding, I keep it not within the same bounds with my Understanding
의지가 이해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가는데, 나는 의지를 이해와 같은 경계 안에 붙들어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는 대개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지만 의지는 어떤 제한도 없이 모든 것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까지 판단을 내릴 때 오류가 생긴다는 설명입니다. 오류의 원인은 신이 준 능력이 아니라 내가 그 능력을 잘못 쓰는 데 있다는 결론입니다.
16. 모를 때는 판단을 멈추라
이 진단에서 데카르트는 오류를 피하는 매우 실용적인 처방을 이끌어 냅니다.
If I abstain from passing my Judgment, when I do not clearly and distinctly enough perceive what is Truth, 'tis evident that I do well, and that I am not deceived
무엇이 진리인지 충분히 분명하고 판명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내가 잘하고 있으며 속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이것이 매번 지키기 쉽지 않다는 점도 압니다. 우리는 한 가지 앎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규칙을 계속 되풀이해 묵상하여 오류를 피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확신이 없을 때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단순한 규칙이 이 책의 가장 실용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하루의 성찰에서 그는 오류와 거짓의 원인을 알았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만족합니다.
17. 무차별은 가장 낮은 자유이다
제4성찰은 자유의지에 대한 데카르트의 생각도 보여 줍니다. 스피노자가 자유의지를 환상이라고 본 것과 대비해서 읽으면 흥미롭습니다.
For that indifference which I find in my self, when no Reason inclines me more to one side, then to the other, is the meanest sort of Liberty
어느 쪽으로도 이성이 나를 더 기울이지 않을 때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는 그 무차별은 가장 낮은 종류의 자유이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참이고 선인지를 분명히 본다면 숙고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완전히 자유로우면서도 무차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한쪽으로 강하게 기울수록, 그 기울기가 참과 선을 분명히 보는 데서 오든 신이 마음을 그렇게 두었든, 나는 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이것도 저것도 고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분명히 아는 것을 막힘없이 따르는 상태로 보는 점에서, 이 정의는 스피노자와 겹치는 구석도 있습니다.
18. 신의 목적을 알아내려 하지 말라
제4성찰에는 자연을 연구하는 방식에 대한 의미심장한 문장이 있습니다.
Upon which account only I esteem all those Causes which are Drawn from the End (viz. Final Causes) as of no use in Natural Philosophy, for I cannot without Rashness Think my self able to Discover Gods Designes.
오직 이 때문에 나는 목적에서 끌어낸 모든 원인, 곧 목적인이 자연철학에서는 쓸모없다고 여긴다. 내가 신의 계획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하기 때문이다.
신의 본성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인간의 본성은 약하고 유한하므로, 신이 왜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가 설명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자연을 목적이 아니라 원인으로 설명하는 근대 과학의 방향과 닿아 있습니다. 같은 문제를 스피노자가 훨씬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19. 상상과 이해는 다르다
제6성찰은 물질세계가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상상과 순수한 이해의 차이를 밝힙니다. 삼각형을 상상할 때는 세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그 세 선을 앞에 둔 듯 봅니다. 그런데 천 개의 변을 가진 도형은 어떨까요?
if I convert my Thoughts to a Chiliogone, or Figure consisting of a Thousand Angles, I know as well that this Is a figure comprehended by a Thousand sides
내 생각을 천각형, 곧 천 개의 각으로 이루어진 도형으로 돌린다면, 나는 이것이 천 개의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임을 잘 안다.
그는 천각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삼각형처럼 그림으로 선명하게 떠올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상상이 정신의 본질이 아니라 몸에 기대는 보조 능력일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해하는 능력은 상상 없이도 작동하지만 상상은 이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수학적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통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20. 삼각형의 본성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제5성찰은 수학적 대상의 성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I Imagine a Triangle, tho perhaps such a Figure Exists no where out of my Thoughts, nor ever will Exist, yet the Nature thereof is determinate
내가 삼각형을 상상할 때, 그런 도형이 내 생각 밖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 본성은 확정되어 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는 성질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사실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사고방식을 신에게 적용합니다.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도 내 안에서 도형이나 수의 관념만큼 자연스럽게 발견되며, 존재함이 그 본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the Existence of God can no more be seperated from his Essence, then the Equality of the Three Angles to two right ones can be seperated from the Essence of a Triangle
신의 존재는, 삼각형의 세 각이 두 직각과 같다는 성질이 삼각형의 본질에서 떼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본질에서 떼어질 수 없다.
이 논증은 이후 "존재론적 증명"의 한 계보로 논의되며,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가 이를 비판했습니다. 생각 속의 완전한 존재가 실제로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개념에서 현실로 건너뛰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이 글은 그 논쟁이 있다는 점만 알려 둡니다.
21. 나는 나의 몸과 실제로 구별된다
제6성찰의 하이라이트는 정신과 몸의 구별입니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이렇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 연장되지 않은 것으로 분명하고 판명하게 인식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몸을 연장되어 있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분명하고 판명하게 인식합니다.
'tis from hence certain, that I am really distinct from my Body, and that I can exist without it.
이로부터, 내가 내 몸과 실제로 구별되며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또 하나의 논거는 나눌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my Body is of its Nature divisible, but my Mind indivisible
내 몸은 본성상 나눌 수 있지만 내 정신은 나눌 수 없다.
발이나 팔이 잘려 나가도 정신의 일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심신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이 구별은 곧바로 다음 질문을 낳았습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실체가 어떻게 서로에게 작용할 수 있는가? 보헤미아의 엘리자베트 공주가 이 문제를 날카롭게 물었다고 알려져 있고, 오늘날의 심리철학과 뇌과학에서도 이 물음은 이어집니다. 데카르트는 제6성찰에서 정신이 몸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뇌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말하며 상호작용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22. 감각은 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제6성찰은 감각을 다시 믿어도 되는지를 다룹니다. 신이 속이는 존재가 아니라면 감각은 대체로 믿을 만하지만, 감각의 목적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알려 주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답입니다. 병든 사람이 해로운데도 물을 찾는 예가 이를 보여 줍니다.
'tis not a meer Denomination, but a real Error of Nature for it to thirst when drink is hurtful to it
마시는 것이 해로운데도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실제 오류이다.
그는 이 예에서 몸이 기계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가끔 오작동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신의 선함이 이런 오류를 허락하는 이유를 따집니다. 핵심은 감각이 앎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신호라는 점입니다. 감각을 곧이곧대로 사물의 참모습으로 읽지 말고, 그것이 알리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성으로 가려 읽으라는 말입니다.
23. 꿈과 깨어 있음의 차이는 기억의 연결에 있다
마지막으로 데카르트는 제1성찰의 "과장된 의심"으로 돌아가 이를 풀어 줍니다. 특히 꿈과 깨어 있음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의심입니다.
my Dreams are never conjoyned by my memory with the other actions of my life, as whatever happens to me awake is
내 꿈은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일과 달리 내 기억에 의해 내 삶의 다른 행동들과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
깨어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사라져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지어낸 유령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반면 어디서, 언제 왔는지 알고 그 지각을 기억으로 삶의 다른 사건들과 이을 수 있다면 나는 깨어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지각이 아니라 여러 감각과 기억과 이해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지를 함께 검토하라는 기준입니다. 첫날의 극단적인 의심은 엿새째 이렇게 일상의 상식과 화해합니다.
24.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을 거두는 길
여섯 성찰을 마치고 보면 이 책의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첫날의 의심은 모든 것을 흔들고, 둘째 날의 "나는 있다"는 첫 받침점을 줍니다. 셋째 날은 신의 존재로 앎의 보증을 찾고, 넷째 날은 오류의 원인을 설명하며, 다섯째 날은 수학적 본성과 신을 다시 논하고, 여섯째 날은 물질세계와 몸을 되찾습니다. 의심이 끝까지 간 뒤에 상식으로 돌아오는 이 곡선이 책의 매력입니다.
이 구조는 널리 영향을 끼쳤지만 약한 고리도 지적받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데카르트의 순환"입니다. 분명하고 판명한 것이 참임을 신이 보증한다고 하면서, 신의 존재는 분명하고 판명한 지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물음에 답변했지만 논쟁은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남긴 것은 어느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정말 확실한지 되묻고 그 물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태도입니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성찰』은 분량이 길지 않지만 논증이 촘촘해서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한 번에 이해하려 하지 말고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다면 제1성찰과 제2성찰만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이 두 성찰은 철학 지식 없이도 읽히고, 이 책이 왜 고전인지 알려 줍니다. 제3성찰의 신 존재 논증은 어려우니 한 번 읽고 넘어가도 괜찮고, 제4성찰과 제6성찰의 일부는 다시 돌아와 읽으면 좋습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는 홉스와 아르노 같은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의 반론이 함께 실렸고, 데카르트가 그에 답한 글도 이어졌습니다. 본문을 읽은 뒤 이 반론과 답변을 읽으면 데카르트의 논증이 어디서 흔들리고 어디서 버티는지를 훨씬 입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의심을 따라가다 보면, 책을 덮은 뒤에도 일상에서 문득 "내가 지금 정말 이것을 알고 있는가"를 되묻는 자신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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