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Gem · 한 권 요점
출판년도 1843–1855 (선집 1923)
Selections from the Writings of Kierkegaard
키르케고르 선집
『디아프살마타』, 『공포와 전율』, 『그리스도교 훈련』, 『순간』에서
Let others complain that the times are wicked. I complain that they are paltry; for they are without passion.
다른 사람들은 시대가 사악하다고 불평하라. 나는 시대가 하찮다고 불평한다.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to find a truth which is truth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am willing to live and to die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기꺼이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이념을 찾는 것.
한눈에 보기
군중과 체면, 이해로 건너뛰려는 시대의 습관을 한 사람의 실존 앞에 세우는 덴마크 철학자의 글 모음. 이 글은 그 목소리를 스물두 가지로 따라간다.
비슷한 책
- 프리드리히 니체 Thus Spake Zarathustra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The Confessions of Saint Augustine (고백록)
- 데카르트 Discourse on the Method (방법서설)
한 권 요점
Selections from the Writings of Kierkegaard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마흔두 해를 살다 간 철학자이자 신학자입니다. 흔히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그는 체계를 세우는 철학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평생 붙들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학술 논문과 달리 풍자와 비유, 가상의 인물이 얽혀 있어서 처음 읽으면 낯섭니다. 그는 여러 책을 가명으로 냈습니다. 같은 사람이 쓴 글인데도 책마다 말하는 사람이 달라서, 독자가 저자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려는 장치였다고 설명됩니다.
이 글이 소개하는 책은 이 가운데 대표작을 골라 영어로 옮긴 선집입니다. 첫 대목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실린 경구 모음 「디아프살마타」, 다음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묵상한 『공포와 전율』, 그다음은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를 읽는 『그리스도교 훈련』, 마지막은 죽기 직전 덴마크 국가교회를 향해 쏟아낸 소책자 『순간』입니다. 이 책들은 신앙이 없는 독자에게도 읽을 거리가 많지만 기독교의 신앙을 전제로 쓰인 글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신앙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키르케고르가 무엇을 어떻게 물었는지를 보여 주려 합니다.
그는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엄격하고 우울한 아버지 밑에서 종교적 분위기 속에 자랐습니다. 젊은 날 약혼을 파기한 일, 당대 지식인 사회의 조롱을 받은 일, 생애 마지막에 교회를 정면으로 공격한 일은 그의 글과 떼어 놓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생애의 사건보다 글 자체에 무게를 두겠습니다.
줄거리
이 선집에는 하나의 줄거리가 없고 네 개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울한 미학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세상의 분주함과 체면을 비웃으며, 자신의 슬픔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꾸어 파는 시인을 떠올립니다. 둘째는 침묵하는 관찰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파고들며 믿음이 어떻게 이해를 넘어서는지를 묻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진지하게 읽으려는 목소리, 넷째는 기독교 세계라는 환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목소리입니다.
네 목소리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삶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가 직접 건너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래 스물두 가지는 이 흐름을 따라 골랐습니다.
대목별로 읽기
1. 시인이란 비명이 음악으로 들리는 사람이다
「디아프살마타」는 첫 문장부터 도발적입니다.
What is a poet? An unhappy man who conceals profound anguish in his heart, but whose lips are so fashioned that when sighs and groans pass over them they sound like beautiful music.
시인이란 무엇인가? 마음속에 깊은 고뇌를 감추고 있으나, 입술이 그렇게 생겨서 한숨과 신음이 그 위를 지나면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이 시인을 독재자 팔라리스의 청동 황소에 갇혀 천천히 구워지는 사람들에 견줍니다. 비명이 폭군의 귀에는 달콤한 음악으로 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시인에게 "다시 한 번 노래해 달라"고 청하는데, 그 말은 사실 "새로운 고통이 네 영혼을 괴롭히기를" 바란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평론가는 시인과 같지만 가슴에 고뇌도 입술에 음악도 없다고 그는 비꼽니다. 그래서 차라리 암아게르섬의 돼지치기가 되어 돼지에게 이해받는 편이, 시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편보다 낫다고 합니다.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예술가의 고통을 얼마나 쉽게 즐기는지를 날카롭게 짚은 대목입니다.
2. 가장 충실한 연인, 나의 우울
이 글의 화자는 자신의 슬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구로 부릅니다.
In addition to my numerous other acquaintances I have still one more intimate friend--my melancholy.
수많은 다른 지인 외에도 나에게는 한 명의 더 친밀한 친구가 있다. 나의 우울이다.
그는 즐거운 자리에서도, 일하는 중에도 우울이 자기를 불러 곁으로 데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울이 자신이 가진 가장 충실한 연인이라서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울을 병이 아니라 동반자로 보는 이 시선은 슬픔을 서둘러 몰아내야 할 것으로만 여기는 오늘의 분위기와 대조됩니다. 다만 이 목소리는 키르케고르가 가상으로 만든 인물이라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3. 분주한 사람들은 무엇을 건지는가
화자는 바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Of all ridiculous things the most ridiculous seems to me, to be busy
모든 우스꽝스러운 것 가운데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분주한 것이라고 나에게는 보인다.
그는 식사도 일도 서두르는 사람의 코에 파리가 앉거나, 지나가는 마차가 흙탕물을 튀기거나, 도개교가 눈앞에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터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What, I wonder, do these busy folks get done? Are they not to be classed with the woman who in her confusion about the house being on fire carried out the fire-tongs?
이 바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내는가? 집에 불이 나서 당황한 나머지 부집게를 들고 나온 여자와 같은 부류가 아닌가?
삶의 큰 불길 앞에서 과연 무엇을 구해 낼 것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바쁨이 곧 의미라고 믿기 쉬운 시대에, 무엇이 정말 건져야 할 것인지를 되묻게 합니다.
4. 시대는 사악한 것이 아니라 하찮다
이 선집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 이어집니다.
Let others complain that the times are wicked. I complain that they are paltry; for they are without passion.
다른 사람들은 시대가 사악하다고 불평하라. 나는 시대가 하찮다고 불평한다.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레이스처럼 얇고 연약해서 죄가 될 만큼의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욕정은 느리고 열정은 졸리며, 의무는 다하되 신에게조차 동전을 조금 깎아 속여도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비웃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과 셰익스피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미워하고 사랑하고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악함보다 미지근함을 더 문제로 보는 이 시선은 키르케고르의 모든 글을 관통합니다.
5. 인생의 의미가 먹고사는 일이라고 하기에 웃었다
화자는 자신이 웃게 된 사연을 말합니다. 어릴 때는 웃음을 잃었다가, 자라서 현실을 눈 뜨고 보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I beheld that the meaning of life was to make a living; its goal, to become Chief Justice
나는 삶의 의미가 생계를 꾸리는 것이고 그 목표가 대법관이 되는 것임을 보았다.
그는 사랑의 기쁨은 재산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고, 우정의 축복은 서로 돈 문제를 돕는 것이며, 열정은 연설을 하는 것이고, 용기는 10달러의 벌금을 무릅쓰는 것이며, 경건함은 일 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세상이 믿는 모습을 나열하고는 "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고 덧붙입니다. 이어서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들이 소원 하나를 고르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Most honorable contemporaries, I choose one thing--that I may always have the laughs on my side.
가장 존경하는 동시대 여러분, 나는 한 가지를 고르겠습니다. 언제나 웃는 쪽이 내 편이기를.
신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그것으로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는 대목입니다. 이 웃음은 세상을 비웃는 차가운 웃음이면서, 동시에 진지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쓸쓸한 웃음이기도 합니다.
6.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다
선집의 서문은 키르케고르의 젊은 시절 일기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그가 삶의 방향을 찾던 때의 기록입니다.
to find a truth which is truth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am willing to live and to die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기꺼이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이념을 찾는 것.
그는 같은 일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해야 할 것에 대한 앎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라고 적습니다. 이 문장은 이후 실존 철학의 출발점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객관적인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내 삶을 걸 만한 진리가 아니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이 물음에 대한 키르케고르 나름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 모든 것을 의심하고 "더 나아간다"는 사람들
『공포와 전율』의 서문은 당대 지식인 사회를 시장의 떨이 판매에 비유하며 시작합니다.
Not only in the world of commerce but also in the world of ideas our age has arranged a regular clearance-sale.
우리 시대는 상업의 세계뿐 아니라 사상의 세계에서도 정기적인 재고 정리 세일을 벌였다.
철학을 하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고 하는데, 그 의심을 어떻게 해냈는지는 한마디 설명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그 철학자를 이렇게 높이 칭찬합니다.
Descartes, indeed! that venerable, humble, honest thinker whose writings surely no one can read without deep emotion--Descartes did what he said, and said what he did.
데카르트라니! 그 존경할 만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사상가의 글은 누구도 깊은 감동 없이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말한 대로 행했고 행한 대로 말했다.
데카르트는 자기 신앙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이에 비해 요즘 사람들은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처럼 전제하고 "더 나아간다"고만 한다는 비판입니다. 앞서 데카르트의 글을 읽으신 분께는 두 철학자가 이렇게 만나는 장면이 흥미로울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8. 아브라함을 보고 싶었던 한 사람
『공포와 전율』은 한 사람 이야기로 열립니다. 어릴 때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은 자랄수록 그 이야기에 더 깊이 빠집니다. 그는 학자가 아니고 히브리어도 모릅니다.
But his wish was, to have been with Abraham on the three days' journey, when he rode with sorrow before him and with Isaac at his side.
그러나 그의 소원은 아브라함이 슬픔을 앞세우고 이삭을 곁에 둔 채 말을 타고 가던 사흘 길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동방의 풍경도 약속의 땅의 화려함도 아닙니다. 모리아 산을 멀리서 바라보던 그 순간입니다. 이야기가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해지지 않고 더 불투명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해하려 할수록 이해가 멀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네 가지로 다르게 상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속여 자신을 우상 숭배자로 보이게 하는 장면, 이후 아브라함의 눈이 어두워진 장면, 기도로 용서를 구하는 장면, 이삭이 신앙을 잃은 장면입니다. 네 번의 변주는 어느 쪽도 이 사건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을 보여 줍니다. 각 변주 끝에는 아이를 젖 떼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When the child is to be weaned, his mother blackens her breast; for it were a pity if her breast should look sweet to him when he is not to have it.
아이를 젖 떼야 할 때 어머니는 자기 가슴을 검게 칠한다. 아이가 가질 수 없는 가슴이 달콤해 보이면 안타깝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변하지 않았는데 아이에게는 달라 보이도록 하는 애정의 방식, 곧 사랑이 때로 사랑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그린 비유입니다.
9. 아브라함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화자의 아브라함 찬사는 이 이야기의 가장 어려운 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He said nothing to Sarah, nothing to Eliezer, his steward; for who would have understood him?
그는 사라에게도, 집사 엘리에셀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그를 이해했겠는가?
이 사건은 설명할 수 없고, 그 시험의 성격상 침묵의 서약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키르케고르가 이 이야기를 윤리와 신앙의 긴장을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예로 읽은 이유입니다. 그는 이것을 모방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이 평범한 윤리의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이해하려 할수록 전율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 어려움을 가볍게 덮는 설교를 그는 곧이어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10. 아브라함은 이 삶을 위해 믿었다
아브라함은 영웅적 희생을 한 사람이 아니라 믿은 사람이라는 것이 화자의 주장입니다.
But Abraham had faith, and had faith for this life.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고, 이 삶을 위한 믿음을 가졌다.
그의 믿음이 오직 내세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 세상을 떠나 서둘러 모든 것을 던지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날 것을 신뢰했습니다. 만약 의심했다면 그는 다른 위대하고 고귀한 일을 했을 것이라고 화자는 상상합니다.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고 온 세상의 찬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합니다.
it is one thing to be admired and another, to be a lode-star which guides one troubled in mind.
찬탄받는 것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을 이끄는 길잡이별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박수를 받는 일과,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별이 되는 일의 차이를 말합니다. 포기한 희망을 다시 붙드는 일이 희망을 단념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11. 아브라함 이야기를 값싸게 설교하는 사람들
『공포와 전율』의 가장 날카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의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칭송하면서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바치려 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그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말은 모호해서 이삭과 쉽게 바꿔 쓰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히 다리를 뻗고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들은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이 집에 가서 그대로 해 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는 분노에 차 그를 꾸짖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받을 것입니다.
Why, it was on this very same matter you preached, last Sunday!
아니, 지난 일요일에 당신이 설교한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닙니까!
키르케고르는 이 풍자로 이 이야기를 가볍게 다룰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같은 대목에서 이렇게 못 박습니다.
The fact is, the ethical expression for what Abraham did is that he wanted to murder Isaac; the religious, that he wanted to sacrifice him.
사실 아브라함이 한 일을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이삭을 살해하려 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그를 제물로 바치려 한 것이다.
바로 이 모순에 사람을 잠 못 들게 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믿음이 이를 거룩한 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브라함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판단받아야 하고, 그 결론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면 공허한 찬사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쉬운 감동과 공허한 찬사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의 문제로 읽는 이에게는 윤리를 넘어서는 신앙의 역설이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윤리와 양심의 긴장에 대한 오래된 물음일 것입니다.
12. 헤겔을 넘어서기는 쉽고 아브라함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화자는 당대를 지배하던 헤겔 철학과 자신이 아브라함 앞에서 겪는 어려움을 대비합니다.
To proceed further than Hegel is a wonderful feat, but to proceed further than Abraham, why, nothing is easier!
헤겔보다 더 나아가는 것은 놀라운 업적이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나아가는 것은 아, 이보다 쉬운 일이 없다!
자신은 헤겔을 꽤 이해하고 어려운 대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헤겔 자신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는 압도되어 마비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정합니다.
Abraham, I am not able to understand; and in a certain sense I can learn nothing from him without being struck with wonder.
나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에게서 경탄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이 대목은 이해와 신앙의 차이를 보여 주는 키르케고르의 핵심 논지입니다. 신앙은 이해의 쉬운 다음 단계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일이며, 이해의 속도로 신앙을 앞지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3. 무한한 체념의 기사
화자는 신앙의 기사를 설명하기 전에 그 앞 단계인 체념의 기사를 그립니다. 공주를 사랑하게 된 청년의 예입니다. 사정상 결혼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속물들은 "그런 사랑은 어리석다. 부유한 양조업자의 과부가 훨씬 좋은 상대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The knight of infinite resignation does not follow their advice, he does not surrender his love, not for all the riches in the world.
무한한 체념의 기사는 그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부를 준대도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랑이 정말 자기 삶의 내용인지 먼저 확인하고, 사랑을 모든 신경에 스며들게 한 뒤,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모두 받아들이고서 침묵 속에서 움직임을 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영원한 사랑의 표현으로 바꾸어 어떤 현실도 빼앗을 수 없는 것으로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공주가 다른 누구와 결혼해도 그의 체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것을 신앙 앞의 마지막 단계로 규정합니다.
Infinite resignation is the last stage which goes before faith, so that every one who has not made the movement of infinite resignation cannot have faith
무한한 체념은 신앙에 앞서는 마지막 단계이며, 그러므로 무한한 체념의 움직임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체념조차 하지 않고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가볍게 신앙을 말하는 시대를 못마땅해 한 이유입니다.
14. 신앙의 기사는 평범한 시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신앙의 기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화자는 그를 찾아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만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Good Lord! that person? Is it really he--why, he looks like a parish-beadle!
맙소사! 저 사람이? 정말 그란 말인가? 아니, 그는 교구 문지기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숲으로 산책하고, 저녁에는 아내가 양고기 머리 요리를 준비했을까 기대하며 집에 돌아옵니다. 화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He belongs altogether to this world, no philistine more so.
그는 완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며, 어떤 속물도 그만큼 이 세상에 속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매 순간 부조리의 힘으로 무한의 움직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포기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부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되찾습니다. 체념하는 기사는 춤추듯 대담한 걸음을 걷는 반면, 신앙의 기사는 흔한 시민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신앙이 살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장면입니다.
15.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모든 것을 얻는 움직임
화자는 신앙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는 움직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한 뒤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입니다.
the movement of faith must ever be made by virtue of the absurd, but, note well, in such wise that one does not lose the things of this world but wholly and entirely regains them.
신앙의 움직임은 언제나 부조리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하되, 명심할 것은 이 세상의 것들을 잃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들을 온전히, 전적으로 되찾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칼이 번뜩이는 순간에도 하느님이 이삭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을 믿었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같은 하느님이 요구하고 곧바로 철회한다는 부조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자신이 이 움직임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해낼 수는 없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When a person wishes to learn how to swim he has himself suspended in a swimming-belt and then goes through the motions; but that does not mean that he can swim.
사람이 수영을 배우려 할 때 허리띠에 매달려 동작을 따라 해 보지만, 그것이 그가 수영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살아 낼 수 있다는 것의 차이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책을 읽고 이해했다는 느낌과 실제로 살아 내는 일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16. "내게로 오라"는 초대
선집의 세 번째 부분인 『그리스도교 훈련』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서 시작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키르케고르는 이 초대가 얼마나 낯선지부터 보여 줍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러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초대는 반대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쪽이 먼저 사람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The helper himself is the help.
돕는 사람 자신이 곧 도움이다.
의사는 처방을 주고 다른 환자에게 가지만, 이 초대는 "나와 함께 머물라,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곧 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연민은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기관을 세워 주지만, 그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므로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그는 말합니다. 초대하는 사람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서야 한다는 이 지적은 신앙의 문제를 넘어 도움을 주는 일의 본질을 묻습니다.
17. 역사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훈련』의 중심에는 신앙과 지식의 구분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초대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걸림돌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역사 속의 구체적인 인물로 낮은 모습으로 이 말을 했고, 영광의 자리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기록으로는 그에 대해 알 수 없고 믿을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Can one from history learn to know anything about Christ? No.
역사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가? 아니다.
이 대답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인식론의 문제를 던집니다. 한 인물이 위대하다는 판단과 그를 믿는다는 일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분을 통해 결과로 증명되는 신앙, 곧 역사적 성공에 기대는 신앙을 거부합니다. 이 논지가 설득력이 있는지는 독자마다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앙을 증명이나 업적에 기대지 않는 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18. 찬양하는 것과 따르는 것
이 책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세계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는지 비판합니다.
The qualities for which Christ is magnified are precisely those which would have most enraged one, if one had been contemporaneous with him
그리스도가 찬양받는 바로 그 성질들은,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를 가장 격분시켰을 성질들이다.
지금은 역사가 이미 평가를 끝냈으니 안전하게 칭송할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다면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동시대성"이라고 부르며, 믿음이란 그와 같은 시대를 사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찬양과 따름 사이의 간격은 신앙뿐 아니라 어떤 이상이든 오래된 이상을 안전한 거리에서 존경하기만 하는 습관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Christendom has done away with Christianity, without being aware of it.
기독교 세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교를 없애 버렸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곧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상태를 가린다는 비판입니다. 따라서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다시 도입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19. 좁은 문이 가장 넓은 길이 되었다
선집의 마지막 부분 『순간』은 그의 마지막 해에 쏟아낸 소책자입니다. 그는 이 일이 얼마나 내키지 않는지부터 고백합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통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통치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도 현재의 순간에 일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그 일에 맞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풍자를 시작합니다. 「인류에 대한 찬사, 또는 신약성서가 더 이상 진실이 아님을 보이는 증명」이라는 제목입니다.
Therefore, the New Testament is no longer true. All credit is due to the human race!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인류에게 모든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
신약성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는데, 덴마크에서는 길이 덴마크에서 가능한 가장 넓은 길이 되었고 문도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약성서의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그는 반어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풍자는 당대의 교회와 사회 분위기를 겨냥한 것이어서 그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읽어야 하지만,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 정말 그 믿음의 요구를 감당하고 있는지를 묻는 반어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유효합니다.
20. 병든 건물을 고치려면 건물을 고쳐야 한다
『순간』의 진단은 병원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Imagine a hospital. The patients are dying off like so many flies. The methods are changed, now this way, now that: of no avail! What may be the cause? The cause lies in the building--the whole building is tainted.
병원을 상상해 보라. 환자들이 파리처럼 죽어 간다. 치료법을 이리저리 바꿔 봐도 소용이 없다. 원인이 무엇일까? 원인은 건물에 있다. 건물 전체가 오염되어 있다.
그는 종교의 상태가 나쁘다고 해서 새 찬송가집이나 새 예배서나 음악 예배를 도입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 병원에 비유합니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건물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같은 대목에서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we are not only not Christians--no, we are not even the heathen to whom Christianity may be taught without misgivings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 아니라, 의심 없이 그리스도교를 가르칠 수 있는 이교도조차 아니다.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비판은 당대의 국가 교회 제도를 겨냥한 날카로운 말이어서, 지금의 교회나 종교 공동체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도에 안주하는 신앙의 위험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신앙 안팎을 가리지 않고 되새길 만합니다.
21. 말하는 대로 사는 사람
이 선집을 관통하는 한 가지 기준은 말과 삶의 일치입니다. 데카르트에 대한 찬사에서 이미 나왔고, 그리스도의 초대를 다루는 대목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는 말 그대로를 삽니다. 키르케고르는 말과 삶이 하나라는 이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요구했고, 이 때문에 마지막에 교회와 충돌했습니다.
그는 1855년 가을 길에서 쓰러져 10월 2일 병원에 입원했고 11월 11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집의 해설은 그가 마지막까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폭탄은 터지고, 불은 뒤따를 것이다." 마흔두 살의 철학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글을 한 사건으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의 글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수에게만 읽혔지만, 이후 여러 나라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22. 군중이 아니라 단독자로
이 모든 대목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선택 앞에서 사람은 군중 속의 평균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음악을 즐기기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분주함 속에서 무엇을 구해 낼지 묻는 사람, 이해로 건너뛰지 않고 신앙의 문턱에서 멈춰 서서 전율하는 사람, 찬양만 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요구는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보여 주려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아니라, 아무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집의 서문은 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는 개인이 모든 것의 척도이며, 우리가 집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삶의 무서운 책임과 큰 만족이 모두 개인에게 있음을 일깨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나는 어떤 이념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방법
키르케고르의 글은 길고 구불구불합니다. 선집의 해설도 그의 문장이 급한 사람이나 둔한 사람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는다면 「디아프살마타」부터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짧고 재치 있는 경구들이어서 부담이 적고, 그의 목소리에 익숙해지기 좋습니다. 다음으로 『공포와 전율』의 서문과 앞부분(한 사람이 아브라함을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 찬사)을 읽고, 시간이 있으면 체념의 기사와 신앙의 기사 대목으로 넘어가세요. 신앙 이야기가 부담스러우면 『순간』의 풍자 몇 편만 읽어도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신앙이 있는 독자에게는 신앙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 되고, 신앙이 없는 독자에게는 진지함이 무엇인지 묻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다만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그가 살던 시대와 사회를 향한 것이어서, 오늘의 특정 교회나 사람들에게 그대로 옮겨 말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비춰 보는 편이 이 책의 정신에 맞습니다. 그가 원한 독자는 구경꾼이 아니라 자기 삶을 걸고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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