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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Gem · 한 권 요점

출판년도 1946

Existentialism Is a Humanism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가 직접 요약한 실존주의의 첫 원칙

Man is nothing else but that which he makes of himself.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You are free, therefore choose, that is to say, invent.

너는 자유롭다. 그러니 선택하라. 곧, 만들어 내라.

한눈에 보기

1945년 파리에서 한 강연을 책으로 묶은 사르트르의 가장 짧고 유명한 글. 종이칼의 비유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를 설명하고, 불안과 버림받음과 절망, 선택의 책임, 자유와 타인을 말한다. 이 글은 강연의 흐름을 따라 열여섯 가지로 풀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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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요점

Existentialism Is a Humanism

장폴 사르트르(1905~1980)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입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그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파리에서 한 강연을 이듬해 책으로 낸 것으로,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만나는 글이 되었습니다. 당시 실존주의는 유행어가 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행동하지 않는 부르주아 철학이라고, 가톨릭 쪽에서는 인간의 어두운 면만 파헤치는 염세주의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 강연에서 그런 비난에 하나씩 답하며, 실존주의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쉬운 말로 설명합니다. 이 글은 사르트르의 모든 사상이 아니라 대중 강연으로 쉽게 풀어 쓴 입문용 요약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29년 이곳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1938년 소설 『구토』로 이름을 알렸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 파리로 돌아와 1943년 철학서 『존재와 무』를 펴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에는 잡지 『현대』를 창간하고 이 책이 된 강연을 했으며, 이후 소설과 희곡, 철학, 정치 활동으로 20세기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64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이 강연은 철학 책이면서 변론입니다. 사르트르는 청중을 설득하려 하고, 그래서 예가 많고 말이 쉽습니다. 다만 쉬운 만큼 거칠기도 해서, 읽는 동안 "정말 그럴까?"를 계속 물으면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줄거리

강연은 먼저 실존주의에 쏟아진 비난을 정리합니다. 이어 종이칼의 비유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첫 원칙을 설명하고, 이 원칙에서 나오는 책임과 불안, 버림받음, 절망을 하나씩 풉니다. 제자의 실제 사례로 선택의 어려움을 보여 주고, 실존주의가 행동의 윤리이며 타인의 자유까지 말한다고 주장한 뒤, 마지막으로 "휴머니즘"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을 가려 결론을 내립니다. 아래는 이 순서를 따랐습니다.

대목별로 읽기

1. 쏟아진 비난들

사르트르는 강연 첫머리에서 네 가지 비난을 정리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존주의가 인간을 관조 속에 가두는 절망의 철학이라고, 인류의 연대를 버리고 개인의 주관만 붙든다고 비난했습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인간의 추악한 면만 그린다고, 신의 계명과 영원한 가치를 무시하니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 비난들을 하나씩 돌려세우며, 이 철학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학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진짜 이유는 비관이 아니라 낙관, 곧 인간 앞에 선택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라고 짚습니다.

2. 종이칼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합니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실존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은 하나입니다.

existence comes before essence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종이칼을 예로 듭니다. 종이칼은 만드는 사람이 용도와 제작법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 놓고 만듭니다. 그러니 종이칼의 본질(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에 쓰이는지)이 그 존재보다 먼저입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인간도 신의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가 됩니다. 신을 지운 18세기의 무신론조차 "인간 본성"이라는 보편적 본질이 개인보다 먼저라는 생각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사르트르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신이 없다면 설계도를 가진 존재도 없습니다. 인간은 먼저 세상에 던져져 존재하고, 그다음에 스스로를 정의한다는 것이 이 첫 원칙입니다.

3.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된다

Man is nothing else but that which he makes of himself.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이 흔히 "주관주의"라고 비난받지만, 실제 뜻은 인간이 돌이나 책상과 달리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고 그것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이끼나 곰팡이처럼 그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투(企投)", 곧 자신을 앞으로 내던지는 계획입니다. 그가 말하는 선택은 "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은 대개 이미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만든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원칙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결과는 책임입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책임을 자기 어깨 위에 온전히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나를 선택하는 일은 모두를 선택하는 일

사르트르의 독특한 주장은 이 책임이 나 하나에게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나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습을 함께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것을 고르고, 더 나은 것은 모두에게도 더 나은 것이어야 하므로, 내 선택은 곧 모든 인간을 위한 선택이 됩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일부일처제의 모습을 인류 전체에 대해 긍정하는 셈이라는 예도 듭니다. 그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줄입니다. 나를 만들면서 나는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는 비난과 달리, 이 철학의 자유는 무거운 공적 책임과 붙어 있습니다.

5. 불안: 입법자가 되는 자리

사르트르는 책임에서 나오는 감정들을 "불안, 버림받음, 절망"이라는 세 말로 설명합니다. 불안은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순간, 자신이 모든 인류를 위한 입법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오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두가 그렇게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말하며 이 불안을 피하지만, 그 변명 자체가 불안의 증거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아브라함의 불안"도 같은 뿌리입니다. 천사가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이 정말 천사인지, 그리고 내가 정말 아브라함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소리를 신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일은 결국 내가 결정하는 일입니다. 앞서 읽은 토라의 모리아 산 이야기를 사르트르가 이렇게 읽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불안이 행동을 막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조건이라고 강조합니다. 부하를 죽음의 위험에 보내는 지휘관은 누구나 이 불안을 겪지만 그 때문에 행동을 멈추지 않으며, 행동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이므로 불안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6. 버림받음: 신이 없다면

"버림받음"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린 표현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결과를 끝까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르트르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신을 값비싼 쓸모없는 가설로 치우면서도 정직과 진보 같은 가치는 그대로 남겨 두려 한 세속 도덕을 비판합니다. 신이 사라지면 "선"이 하늘 어딘가에 미리 적혀 있다는 보장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인용해,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며 이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할 것을 자기 안에서도 밖에서도 찾지 못하며, 그래서 변명할 거리가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책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 여기서 나옵니다.

man is condemned to be free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유롭고,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의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사르트르는 "우리는 변명 없이 홀로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We are left alone, without excuse.

우리는 변명할 수 없이 홀로 남겨졌다.

격정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열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엄격하고, 또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선택의 결과로 보는 관점이 사회적 조건과 상처의 무게를 얼마나 가볍게 보게 만드는지는 지금도 물어볼 만한 질문입니다.

7. 제자의 딜레마

사르트르는 실제로 자신을 찾아온 제자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형이 전사하고 아버지는 협력자 기질이 있는 집에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할 것인지, 홀로 남은 어머니 곁에 남아 살아갈 힘이 되어 줄 것인지를 두고 갈등했습니다. 하나는 구체적이고 확실하지만 한 사람만을 향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더 큰 목적을 향하지만 막연하고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 경우 어떤 윤리도 답을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라고 하지만 어느 길이 더 어려운지는 알려 주지 않고,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하지만 두 길 모두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을 위험이 있습니다. 감정에 따르라는 조언은 순환에 빠집니다. 감정의 크기는 그가 그 감정으로 무엇을 했는지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조언자를 고르는 것도 이미 선택입니다. 그가 제자에게 준 답은 짧습니다.

You are free, therefore choose, that is to say, invent.

너는 자유롭다. 그러니 선택하라. 곧, 만들어 내라.

어떤 일반 도덕도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지 못하고, 이 세상에는 계시된 징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가 된 한 사람이 일련의 실패를 "신이 세속적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는 징표"로 읽었지만, 그것은 같은 실패를 목수나 혁명가가 되라는 징표로도 읽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징표를 어떻게 읽을지는 결국 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8. 절망: 희망 없이 행동하기

사르트르가 말하는 "절망"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내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 범위 안으로 제한한다는 뜻입니다. 기차가 제시간에 오리라고 가정하고 친구를 기다리는 일처럼, 우리는 내 행동에 직접 관련된 가능성 안에서만 계산하고 그 너머는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너의 행동은 죽음에서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어받을 것"이라고 반박하지만, 사르트르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선의에 의지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고 의지할 인간 본성이 없다면, 내일 누군가가 파시즘을 세우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비겁해서 그것을 막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체념(정적주의)이 아니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정적주의는 "남이 하겠지"라고 말하는 태도이고, 실존주의는 행동 밖에 현실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참여하고, 그다음에 행동하며,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9. 행동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다

이 철학이 불편한 이유를 사르트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은 "환경이 나빴을 뿐 나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존주의에서는 사랑의 행위를 떠난 사랑이 없고, 작품을 떠난 천재가 없으며, 프루스트의 천재는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이고 라신의 천재는 그의 비극들의 연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의 총합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 생각일 수 있다고 그도 인정합니다. 한편으로 현실만이 믿을 만하고 꿈과 기대는 사람을 부정적으로만 규정한다는 이 주장은 냉정한 만큼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행동의 총합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평가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사르트르는 그 위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10. 비겁한 사람은 비겁함을 스스로 만든다

사르트르가 소설에서 비겁한 인물을 그릴 때 비난받는 이유에 대한 해명입니다. 졸라 같은 자연주의 작가라면 인물의 행동을 유전이나 환경 탓으로 돌렸을 것이고, 독자는 "그게 우리 모습이고 어쩔 수 없다"고 안심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는 비겁한 인물을 자기 비겁함에 책임이 있는 존재로 그립니다.

A coward is defined by the deed that he has done.

비겁한 사람은 그가 한 행위로 규정된다.

비겁한 기질은 없고 신경질적인 기질이나 빈약한 체질이 있을 뿐이며, 비겁함을 낳는 것은 포기하고 굴복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편한 이유는 비겁한 사람이 비겁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웅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편하게 영웅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이 반론에 숨어 있습니다. 반대로 비겁한 사람이 비겁함을 버릴 가능성, 영웅이 영웅이기를 그칠 가능성도 언제나 열려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1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타인도 있다

"개인의 주관에 갇혔다"는 비난에 대한 답입니다. 사르트르는 출발점이 개인의 주관인 이유는 부르주아적이어서가 아니라 철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의식이 스스로에 이르는 절대적 진리이며, 그 밖의 모든 대상은 개연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을 사물처럼 대하는 모든 유물론과 달리 이 출발점은 인간의 존엄에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데카르트나 칸트와 달리,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 앞에서 자신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타인이 나를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나의 가장 은밀한 발견이 곧 나의 자유와 맞서는 또 다른 자유로서의 타인의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상호 주관성"의 세계에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면서도 타인과 연대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논리입니다.

12. 인간의 본성은 없어도 조건은 있다

보편적인 인간 본성은 없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보편성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시대에 노예로 태어나든 봉건 영주로 태어나든 변하지 않는 것은 세계 속에 있어야 하고, 일해야 하고, 죽어야 한다는 필연입니다. 이런 한계에 대한 모든 인간의 기투는 그것을 넘어서거나 넓히거나 받아들이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중국인이든 인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유럽인이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보편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설명이 따릅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당시 용어를 사용하는데, 오늘의 독자는 이 표현들을 시대의 한계로 읽으며 그의 주장의 요점인 "이해 가능성"에 주목하는 편이 좋습니다.

13. 아무거나 선택해도 되는가

"선택이 아무 근거도 없다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반론에 사르트르는 세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선택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변덕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어떤 상황 속에 있고 그 상황에 대한 태도를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드의 "동기 없는 행위"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그는 도덕적 선택을 예술 작품의 창작에 비유합니다. 화가에게 미리 정해진 그림이 없듯, 해야 할 일은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만들어 낸 뒤에야 그것이 해야 했던 일이 됩니다.

셋째, "남을 판단할 수 없다"는 반론에는 절반만 맞다고 답합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정이나 결정론을 핑계로 자신의 자유를 숨기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있고, 이것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오류"의 판정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자기 존재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쓰레기라고 부릅니다. 단호하고 도발적인 표현입니다.

14. 자유가 자유를 원한다

이 강연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가치가 내게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모든 가치의 토대로서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자유를 목표로 삼는다면 타인의 자유 역시 똑같이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이어 갑니다. 타인의 자유 없이는 내 자유도 의미 있게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칸트처럼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원칙만으로는 구체적인 행동을 정할 수 없고, 도덕의 내용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예측할 수 없지만, 그 발명이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가라는 형식은 보편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소설 속 매기 털리버와 스탕달의 산세베리나를 비교해, 겉으로는 정반대의 선택이라도 자유를 향한다는 점에서 가까울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15. 삶은 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치를 스스로 만든다면 진지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마지막 반론에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신을 제외했으니 누군가는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삶에 선험적인 의미가 없다는 뜻이며, 삶은 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그 가치는 우리가 선택하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건조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의미가 어딘가에 주어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접고, 의미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16. 휴머니즘의 두 가지 뜻

강연의 제목을 해명하는 결론입니다. 사르트르는 휴머니즘이라는 말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가릅니다. 하나는 인간을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산을 넘으며 "인간은 위대하다"고 외치는 식의 이런 휴머니즘은, 소수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간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어서 부조리하고, 콩트식 인류교로 가면 닫힌 휴머니즘이 되어 파시즘으로까지 이를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데, 인간은 아직 규정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적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는 존재이고, 자신을 넘어서는 목표를 향해 갈 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입법자이고, 버림받은 채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자기에게로 돌아서서가 아니라 해방이든 어떤 구체적 실현이든 자기를 넘어선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실존주의가 일관된 무신론의 결론을 끝까지 끌어내려는 시도일 뿐이고, 신이 있어도 입장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낙관적이며, 행동의 학설이라는 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이 강연을 읽을 때 생각해 볼 것

사르트르의 주장은 강렬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를 이토록 강조하면 가난, 폭력, 차별 같은 사회적 조건이 선택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르트르 자신도 이후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속에서 이 문제를 오래 고민했습니다. 둘째, "선택이 곧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논증은 정말 모든 선택에 적용될까요. 셋째, 의미를 우리가 만든다는 생각은 해방적이지만, 어떤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사르트르는 그 기준을 "자유가 자유를 원하는가"에서 찾았고, 이 답이 충분한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또 하나, 이 글은 입문용 강연이므로 사르트르의 본격적인 철학은 1943년의 『존재와 무』에 있습니다. 이 강연의 쉬운 표현 뒤에는 훨씬 복잡한 논의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소설 『구토』와 희곡 『닫힌 방』에서 사르트르가 인간의 불편한 면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함께 읽으면 이 강연의 낙관이 얼마나 힘들게 얻어진 것인지가 더 잘 보입니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이 강연은 짧아서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종이칼의 비유와 불안, 버림받음, 절망을 다루는 부분에 집중하고, 제자의 사례와 "자유가 자유를 원한다"는 대목은 두 번째에 읽으세요. 읽다가 막히면 "내가 이 말에 동의하는 순간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책의 논리가 훨씬 가까워집니다.

사르트르를 이해하려면 그가 이어받은 책들을 함께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키르케고르의 선집,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이어서 읽어 보세요. 사르트르가 인용한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말도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이어받은 책들은 ReadGem 블로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키르케고르 선집,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글에서 이어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