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Gem · 한 권 요점
출판년도 1580
Essays
수상록 (에세)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은 최초의 에세이 모음
Thus, reader, myself am the matter of my book
그러니 독자여, 내 책의 재료는 바로 나 자신이다.
The glorious masterpiece of man is to live to purpose
인간의 영광스러운 걸작은 제대로 사는 것이다.
한눈에 보기
프랑스의 귀족이자 전직 판사 몽테뉴가 탑 속 서재에서 20년 가까이 쓴 글 모음. 죽음, 우정, 관습, 교육, 고독, 식인종, 나 자신이라는 주제를 이리저리 오가며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에세이라는 장르의 출발점인 이 책에서 스물네 가지 대목을 골라 읽는다.
비슷한 책
- 파스칼 Pensées (팡세)
- 에머슨 Essays (에세이)
- 쇼펜하우어 The Wisdom of Life (인생의 지혜)
한 권 요점
Essays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프랑스 남서부의 귀족으로, 한동안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일하다가 1571년 영지로 물러나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쓴 글에는 "에세(essai)"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말은 "시도"나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이후 "에세이"라는 장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첫 두 권은 1580년에 나왔고, 몽테뉴는 이후에도 글을 고치고 덧붙였으며 세 번째 권을 더해 확장판을 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해 논증하지 않고, 생각이 이끄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길을 벗어나기를 즐겼고, 그것이 이 책의 방법이자 매력입니다.
『수상록』의 핵심은 저자 자신입니다. 몽테뉴는 대단한 인물도 학자도 아닌 보통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고 말하며, 그 안에 인간의 조건 전체가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고대 저자들의 문장을 끊임없이 인용하지만 그것을 권위로 쓰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추는 거울로 씁니다. 신구교가 피 흘리며 싸우던 종교 전쟁의 시대에 그가 보여 준 태도, 곧 확신보다 의심을, 열광보다 절제를 택한 태도는 지금도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 글은 『수상록』 세 권에서 대표적인 에세이와 구절을 스물네 가지 골라 읽습니다. 몽테뉴의 글은 짧은 에세이도 있지만 몇십 쪽을 넘는 긴 글도 많고,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기도 하므로, 이 글은 그 곁길의 풍경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생각의 뼈대에 집중했습니다. 책의 장 번호는 판본마다 다르니 에세이 제목으로 소개합니다.
줄거리
『수상록』에는 줄거리가 없습니다. 에세이 하나하나가 독립된 글이고, 순서는 몽테뉴가 쓴 시기와 관심에 따라 이어집니다. 초기의 글은 고대 저자들의 일화를 모아 놓은 형식이 많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글이 늘어났습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시작해, 한가함과 죽음, 관습과 교육, 우정, 식인종, 고독, 자기 관찰, 경험의 순서로 읽습니다.
대목별로 읽기
1. 독자에게
책은 짧은 서문으로 시작합니다. 몽테뉴는 이 책이 아무 속임수 없는 정직한 책이며 사적인 목적으로 썼다고 밝힙니다.
READER, thou hast here an honest book; it doth at the outset forewarn thee that, in contriving the same, I have proposed to myself no other than a domestic and private end
독자여, 여기 정직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경고한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집안의 사사로운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그는 독자의 이익도, 자신의 영광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친척과 벗들이 자기를 잃은 뒤에 그의 기질과 성향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썼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호의를 얻으려 했다면 빌린 아름다움으로 자기를 꾸몄을 것이라는 말도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맺습니다.
Thus, reader, myself am the matter of my book
그러니 독자여, 내 책의 재료는 바로 나 자신이다.
자기를 쓰는 일이 허영이 아니라 하나의 탐구라는 선언입니다. 이 서문이 만든 전통, 곧 글쓴이가 자기 결점까지 드러내는 개인적 글쓰기는 이후 에세이와 자서전, 일기 문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2. 한가함이 낳는 괴물들
몽테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의외로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는 영지로 물러나 조용히 지내려 했는데, 마음은 한가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놀려 둔 땅에 잡초가 무성하듯 마음도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온갖 방종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The soul that has no established aim loses itself
정해진 목표가 없는 영혼은 길을 잃는다.
그의 마음은 고삐 풀린 말처럼 낯선 괴물과 환상을 줄줄이 만들어 냈고, 그것들의 기괴함과 터무니없음을 천천히 살피기 위해 글로 적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 마음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에세이의 기원이 이런 자기 관찰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몽테뉴의 글은 정돈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흐트러진 마음을 붙잡아 보려는 시도입니다.
3.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일
가장 유명한 에세이 가운데 하나는 철학함이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말하는 글입니다. 키케로의 말을 빌린 이 제목 아래 몽테뉴는 죽음을 낯설게 여기지 말고 늘 곁에 두라고 권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잔치 한가운데 해골을 들여와 손님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도 소개합니다.
Where death waits for us is uncertain; let us look for him everywhere.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그를 찾아보자.
그리고 이 에세이의 핵심 문장이 나옵니다.
The premeditation of death is the premeditation of liberty; he who has learned to die has unlearned to serve.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섬기는 법을 잊은 사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복종하게 만든다는 통찰입니다. 삶을 잃는 일이 악이 아님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에서 악한 것이 없고, 죽는 법을 아는 것이 모든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를 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몽테뉴가 말하는 죽음의 준비는 죽음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반대로 삶을 열심히 살라고 권합니다.
4. 양배추를 심다가 죽음이 오게 하라
같은 에세이의 이 대목은 몽테뉴가 말하는 죽음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let death take me planting my cabbages, indifferent to him
죽음이 나를 양배추를 심는 중에 데려가게 하라. 죽음에는 무관심한 채로.
그는 사람이 늘 무언가를 하고 있기를, 그리고 삶의 일들을 최대한 이어 가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정원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죽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 태도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쓰던 연대기가 끝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을 지켜본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이 대목은 죽음을 의식하되 삶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균형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읽은 파스칼이 죽음을 외면하는 오락을 비판했다면, 몽테뉴는 죽음을 곁에 두고도 정원을 가꾸는 평온을 말합니다.
5. 습관이 만든 양심
몽테뉴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주제는 관습입니다. 관습에 대한 긴 에세이에서 그는 습관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수많은 사례로 보여 준 뒤, 도덕조차 습관의 산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The laws of conscience, which we pretend to be derived from nature, proceed from custom
우리가 자연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양심의 법들은 사실 관습에서 나온다.
사람은 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의견과 태도에 깊은 경외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렵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칭찬받지 않기도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저주할 때 상대가 나쁜 관습에 빠지기를 신들에게 빌었다는 예도 듭니다. 이 통찰은 앞서 읽은 파스칼의 "강 하나로 바뀌는 정의"와 같은 맥락에 있으며, 실제로 파스칼이 몽테뉴를 깊이 읽었다는 점도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몽테뉴는 이 상대주의를 무질서의 근거로 쓰지 않고, 오히려 쉽게 법을 바꾸지 말라는 보수적인 태도로 이어 갑니다.
6. 앵무새는 그만큼 말할 수 있다
몽테뉴의 교육 비판은 지금도 날카롭습니다. 현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그는 남의 문장을 옮기는 일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꼽니다.
We can say, Cicero says thus; these were the manners of Plato; these are the very words of Aristotle: but what do we say ourselves? What do we judge? A parrot would say as much as that.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의 풍습은 이러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그대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판단하는가? 앵무새도 그만큼은 말할 것이다.
남의 말을 외우는 일과 자기가 아는 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긴 에세이에서도 그는 같은 주장을 폅니다.
To know by rote, is no knowledge
외워서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가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보는 선생은 이런 사람입니다.
a tutor, who has rather a well-made than a well-filled head
가득 채워진 머리보다 잘 만들어진 머리를 가진 스승
지식을 쌓는 일보다 판단력과 품성을 기르는 일이 앞선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프랑스어로 "잘 만들어진 머리(tête bien faite)"가 되어 오늘날까지 교육 논의에서 쓰이는 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학교가 아이들을 짐승으로 만든다는 평가를 소개하며, 가르칠 때는 선생이 아이의 귀에 깔때기로 붓듯 쏟아붓는 방식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7. 그였기에, 나였기에
몽테뉴의 가장 뭉클한 글은 우정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그는 평생 사귄 수많은 인연은 "단순한 안면과 친분"이고, 진정한 우정은 두 영혼이 이음매도 보이지 않을 만큼 섞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친구는 에티엔 드 라 보에시였습니다. 왜 그를 사랑했느냐는 물음에 몽테뉴는 이렇게 답합니다.
because it was he, because it was I.
그였기 때문에, 나였기 때문에.
그는 이 말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운명적인 힘"이 두 사람을 맺어 주었다고 합니다. 만나기 전부터 서로의 평판에 이끌렸고, 한 도시의 잔치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게 이미 가까웠다는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이 글은 우정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다 포기하는 고백입니다. 몽테뉴는 이 친구를 일찍 잃었고, 그의 많은 글이 그 상실의 그림자 아래 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8. 야만이란 우리 관습이 아닌 것
식인종에 대한 에세이는 몽테뉴의 가장 도발적인 글입니다. 그는 신대륙에서 십여 년을 산 사람이 자기 집에 있었다고 하며, 그의 이야기와 전해 들은 풍습을 바탕으로 이른바 "야만인"에 대해 말합니다.
there is nothing barbarous and savage in this nation, by anything that I can gather, excepting, that every one gives the title of barbarism to everything that is not in use in his own country.
내가 알아낼 수 있는 한 이 민족에게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은 없다. 다만 누구든 자기 나라에서 쓰이지 않는 것은 모두 야만이라 부른다는 점을 빼고는.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 나라의 의견과 관습의 본보기 말고는 진리와 이성의 다른 척도가 없다고 지적하며, 완벽한 종교와 완벽한 정부가 늘 우리 쪽에 있다고 믿는다고 비판합니다. 야생이라는 말도 자연이 스스로 키운 열매에 붙이는 말이지만, 정작 인공으로 본성을 바꿔 놓은 쪽을 야생이라 해야 맞다고 반박합니다.
We may then call these people barbarous, in respect to the rules of reason: but not in respect to ourselves, who in all sorts of barbarity exceed them.
그러므로 이성의 규칙에 비추어서는 이들을 야만이라 부를 수 있겠으나, 온갖 종류의 야만에서 그들을 능가하는 우리에 비추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어서 가장 충격적인 비교를 내놓습니다.
I conceive there is more barbarity in eating a man alive, than when he is dead
내 생각에는 죽은 사람을 먹는 것보다 산 사람을 먹는 것이 더 야만적이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고문과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혹 행위, 곧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던 일들입니다. 그의 목적은 식인 풍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잔혹함을 보지 못하는 유럽인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에세이를 읽을 때는 몇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묘사하는 신대륙 사람들의 모습은 전해 들은 이야기에 기대어 이상화한 것이고, 오늘의 인류학적 지식으로는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또 당시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오늘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 문화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비판한 이 글은 이후 문화 상대주의 논의의 오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글은 "그러나 그들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농담으로 끝납니다.
9. 가게 뒤의 방 하나
고독에 대한 에세이는 현대인에게 가장 실용적인 조언을 줍니다. 몽테뉴는 아내와 아이들, 재산, 건강을 소중히 하되 거기에 우리의 행복을 의존시키지 말라고 권합니다.
we must reserve a backshop, wholly our own and entirely free, wherein to settle our true liberty, our principal solitude and retreat.
우리는 오로지 우리 것이고 완전히 자유로운 가게 뒤의 방 하나를 남겨 두어야 한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와 으뜸가는 고독과 은신처를 마련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아내도 아이도 재산도 수행원도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이것들을 잃는 날이 와도 새삼스러운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몽테뉴가 말하는 고독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은둔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지킬 수 있는 마음의 방입니다. 이 구절은 일과 관계에 둘러싸인 사람에게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를 묻습니다.
10. 인간은 놀랍도록 변덕스러운 존재다
몽테뉴는 사람의 성품이 일관되다는 생각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한 시민의 덕에 감동해 도시 전체를 용서한 이야기와 같은 사람이 다른 때에는 잔인했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Man (in good earnest) is a marvellous vain, fickle, and unstable subject
인간은 (참으로) 놀랍도록 헛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어떤 확실하고 한결같은 판단을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인식은 그의 글쓰기에도 이어집니다. 사람이 그렇게 변덕스럽다면 글도 일관된 이론이 될 수 없고, 순간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적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몽테뉴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1.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고 흐름을 그린다
참회를 다룬 에세이는 그가 자신의 글쓰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한 곳입니다.
Others form man; I only report him
다른 이들은 사람을 빚어내지만, 나는 사람을 기록할 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자기를 그린 그림이 변하고 흔들려도 닮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돌고 있고, 카프카스의 바위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공공의 운동과 자신의 운동으로 움직이며, 항상성조차 느리게 지친 운동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I do not paint its being, I paint its passage
나는 그것의 존재를 그리지 않고, 그것의 흐름을 그린다.
그는 자신의 대상을 고정할 수 없고, 순간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보니 자기모순에 빠질 수도 있지만, 데마데스가 말했듯 진리와 모순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자아를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흐르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의 선구로 자주 인용됩니다.
12. 평범한 삶에도 인간의 모든 조건이 있다
같은 에세이에서 몽테뉴는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이 왜 자기에 대해 쓰는가를 변호합니다.
every man carries the entire form of human condition.
모든 사람은 인간 조건의 전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범하고 빛나지 않는 삶을 말하지만, 도덕 철학은 평범한 삶에도 부유한 삶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저자들은 문법학자나 시인이나 법률가 같은 특별한 표지로 대중에게 말하지만, 자기는 "미셸 드 몽테뉴"라는 보편적 존재로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가 너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탓하면,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을 탓한다고 응수합니다. 이 변호는 에세이라는 형식이 소수 영웅의 이야기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 가는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13. 웃는 철학자와 우는 철학자
세상의 어리석음을 두고 웃은 데모크리토스와 울었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몽테뉴는 웃는 쪽에 선다고 말합니다.
I am clearly for the first humour; not because it is more pleasant to laugh than to weep, but because it expresses more contempt and condemnation than the other
나는 분명히 앞의 기질을 택한다. 웃는 편이 우는 편보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웃음이 더 큰 경멸과 비난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연민과 한탄은 슬퍼하는 대상에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만큼 경멸당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몽테뉴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가진 냉소적인 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냉소는 격한 것이 아니라 가볍고 유머러스하며, 자기 자신도 그 어리석음 속에 포함시키는 웃음입니다.
14. 겁이 잔인함의 어머니
몽테뉴는 잔인함을 자주 다루고, 그것을 매우 혐오했습니다. 한 에세이는 이런 관찰에서 시작합니다.
I have often heard it said that cowardice is the mother of cruelty
나는 비겁함이 잔인함의 어머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는 경험으로 보아 악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사나움은 대개 연약한 마음과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잔인한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기는 저항하는 상대에게만 발휘되고 적이 자비를 구하면 멈추지만, 비겁은 위험이 지나간 뒤 피와 학살의 몫을 챙긴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종교 전쟁 속에서 잔혹 행위를 목격한 몽테뉴의 관찰이기에 무게가 있습니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짐승에 대한 학대에도 연민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15. 나는 무엇을 아는가
『수상록』 가운데 가장 긴 글인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는 회의주의의 바탕이 되는 에세이입니다. 몽테뉴는 이 글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길게 파헤치며,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의심할 수 있음을 보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유명한 좌우명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입니다.
What do I know?
나는 무엇을 아는가?
그는 이 문구를 저울 모양의 표지와 함께 사용했다고 소개합니다. 회의주의자들이 "나는 모른다"거나 "나는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명제 자체도 함께 의심에 부치는 것이라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이 질문은 모든 지식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라, 판단을 보류하고 겸손하게 탐구하겠다는 태도입니다. 파스칼은 이 회의주의를 깊이 읽고 받아들였지만, 그 끝에서 몽테뉴와 달리 신앙으로 나아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6. 경험에 대하여, 자기 존재를 누리는 일
마지막 에세이 「경험에 대하여」는 이 책의 결론처럼 읽힙니다. 몽테뉴는 지식과 법과 책으로 인간을 다스리려는 시도의 한계를 말한 뒤 삶 그 자체를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옵니다.
'Tis an absolute and, as it were, a divine perfection, for a man to know how loyally to enjoy his being.
사람이 자기 존재를 충실히 누릴 줄 안다는 것은 절대적인, 말하자면 신적인 완전함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조건을 쓸 줄 몰라 다른 조건을 구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하는지 몰라 우리 밖으로 나간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장 몽테뉴다운 문장이 나옵니다.
when seated upon the most elevated throne in the world, we are but seated upon our breech.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앉아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 엉덩이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높은 지위와 철학의 높은 말들도 결국 몸을 가진 인간의 일이라는 유머러스한 상기입니다. 이 문장은 몽테뉴가 인간의 몸을 포함한 삶 전체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태도를 압축합니다.
17. 삶의 걸작
이 에세이의 끝에서 몽테뉴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The glorious masterpiece of man is to live to purpose; all other things: to reign, to lay up treasure, to build, are but little appendices and props.
인간의 영광스러운 걸작은 제대로 사는 것이다. 다스리고, 재물을 쌓고, 짓는 일들은 모두 사소한 부속물과 버팀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기 행실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책을 쓴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이고, 쉴 줄 아는 사람은 제국과 도시를 차지한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돌파구 앞에서 돌격을 앞둔 장군이 벗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웃는 모습을 보면 즐겁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삶을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일상을 제대로 사는 기술로 보는 이 시각이 몽테뉴 철학의 중심입니다.
18. 몽테뉴의 방법
이 에세이들의 방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야기가 논증을 이끕니다. 그는 개념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체적인 일화와 인용으로 시작해, 그 속에서 결론이 떠오르게 합니다. 둘째, 자기 관찰을 철학의 재료로 씁니다. 그의 취향, 질병, 습관, 건망증이 모두 인간 이해의 자료입니다. 셋째, 결론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글 중간에 방향을 틀고, 자기가 한 말을 뒤집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그의 글은 읽는 이를 설득하려는 글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는 글입니다. 이 방법은 이후 프랑스 모랄리스트 전통과 영국 에세이, 에머슨의 에세이로 이어졌습니다.
19. 종교 전쟁의 시대에 쓴 글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그가 산 시대와 떼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구교도와 신교도가 서로 죽이던 종교 전쟁의 한가운데였고,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을 지내며 이 갈등을 가까이서 겪었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광경 앞에서, 그가 확신의 위험과 관용의 필요를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의 "나는 무엇을 아는가?"는 지적 겸손이면서 동시에 광신에 대한 해독제였습니다. 다만 몽테뉴가 종교를 부정하거나 조롱한 것은 아니고,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의 전통을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 읽기 전에 알아 둘 것
『수상록』은 오래되고 긴 책이어서 몇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먼저 고대 저자의 인용이 많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라틴어 원문과 함께 나옵니다. 이 인용들은 때로 논의의 중심이지만 때로는 장식이므로, 인용에 막히면 건너뛰고 몽테뉴 자신의 말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또한 몽테뉴는 16세기 사람이어서 여성이나 다른 문화에 대한 견해에는 오늘의 기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앞서 본 식인종 에세이도 그렇습니다. 그의 개방적인 태도와 시대의 한계를 함께 읽는 비판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21. 몽테뉴와 파스칼
이 글을 읽은 뒤 파스칼의 『팡세』를 이어 읽으면 두 사람의 닮은 점과 갈라지는 점이 선명해집니다. 둘 다 인간 이성의 한계와 관습의 힘을 직시했지만, 몽테뉴는 그 앞에서 담담히 삶을 즐기라고 했고, 파스칼은 그 앞에서 떨며 신을 찾았습니다. 몽테뉴가 평범한 삶의 즐거움을 가르쳤다면, 파스칼은 그 평범함 속에 숨은 불안을 파헤쳤습니다. 두 사람을 함께 읽으면 같은 문제에 대한 두 가지 가장 깊은 응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22. 오늘 읽는 의미
몽테뉴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많이 다르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지식은 외운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나와 다른 관습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죽음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나 자신의 변덕스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는 이 질문들에 정답을 주지 않고 자기 경험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방식으로 답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설교가 아닌 대화로 읽힙니다.
23. 읽는 순서
처음 읽는다면 서문(독자에게)과 「한가함에 대하여」, 「철학함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 「우정에 대하여」, 「식인종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참회에 대하여」, 「경험에 대하여」를 추천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읽는다면 「경험에 대하여」가 가장 몽테뉴다운 결론을 줍니다.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는 가장 길고 어려우므로 나중으로 미루어도 좋습니다. 에세이마다 곁길이 많으니 주제를 놓치더라도 개의치 말고 읽는 즐거움을 따라가세요.
24. 이 책을 읽는 방법
『수상록』은 완독을 목표로 하기보다 침대 곁에 두고 한 편씩 읽는 책입니다. 몽테뉴 자신이 책을 그렇게 읽었고,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노트에 옮겨 적고, 그 문장이 자기 삶의 어떤 경험과 닿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 글에서 다룬 문장들은 모두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에머슨의 에세이, 쇼펜하우어의 『인생의 지혜』와 나란히 읽으면 개인의 삶에서 지혜를 길어 내는 세 가지 방식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스칼의 『팡세』로 이어 읽으면, 같은 질문이 어떻게 전혀 다른 길로 가는지가 보입니다. 몽테뉴가 서문에서 말했듯, 이 책의 재료는 결국 읽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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